[아트코리아방송 = 김한정 기자] 충무로 42번지에 위치한 충무아트홀에서는 523일 오후 일제 침략시기에 우리나라의 명산 곳곳에 우리나라의 생기를 차단하기 위해 심장에 꽂았다는 혈침(쇠말뚝)에 대한 이야기 2, '일제 쇠말뚝 뽑기, 백도의 혈침에 대한 소윤하(민족정기선양위원회) 위원장과 인터뷰를 가졌다.

이날 인터뷰에는 문총련 박동위원장이 아트코리아방송 리포터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소윤하 선생 인터뷰 2편 '일제 쇠말뚝 뽑기, 백도의 혈침’

아래 내용은 소윤하 선생이 기록했던 내용을 그대로 올린다.

제 보 자 : 신 동식(54) 동양양생원장 (山下奉文=야마시타.도모유끼)

제 보 일 : 19991217

박 힌 곳 : 전남 여수시 삼산면 거문리 백도(상백도)

제보내용 : 신 동식 동양양생원 원장의 부친인 신세우(1988.사망)씨가 일본군 남방군 총사령관인 <야마시타 도모유끼(山下奉文)>로부터 들은 양심 선언적 실토.

<1894년에 일본군 가또마루(加藤丸)장군이 백도에 혈침을 박았고 1936년에는 야마시타 도모유키(山下奉文)가 직접 상부의 지시를 받아 또 박았다.>고 함.

소윤하 선생 인터뷰 2편 '일제 쇠말뚝 뽑기, 백도의 혈침’

내 용

19991217일 동양양생원에서 신 동식 원장으로부터 제보를 받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부친 신세우 씨가 일제 패망당시 필립핀 마닐라에서 남방군 총사령관인 야마시타 도모유끼(山下奉文)가 전범자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데 영어통역을 맡았다는 것이다. 당시 <야마시타 도모유끼>가 미 군사재판소로부터 총살형을 선고 받았는데 이를 絞首刑으로 처형시키게 통역을 잘 좀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었다고 한다. 이유는 부모로부터 물러 받은 몸에 총알을 박을 수 없다는 효심의 발효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군사재판에서 한 번 총살형으로 판결이 난 것을 교수형으로 바뀌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하지만 노력과 지혜를 짜서 통역을 잘 하여 교수형으로 집행 되도록 결정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에 야마시타 도모유끼가 고맙다며 그 대가로 조선전역에 穴針 365(곳으로 추정 됨)를 박았다는 자료와 남방지역에서 약탈한 보물을 일본으로 옮기다가 미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운반선이 침몰 된 좌표 등의 자료를 넘겨주었었다는 것이다.

조국이 광복 된 후 귀국한 신세우 씨가 그 자료를 이 승만 전 대통령에게 전달하였으나 무시당했었고 뒤에 19615.16혁명 후 박 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부의장에게 본 자료를 넘겨서 혈침은 1962년부터 뽑았고 보물선 관계는 국제법상 50년이 경과되지 않아서 미뤄뒀다가 최근부터 그 일을 시작하고 있다고 했다.

소윤하 선생 인터뷰 2편 '일제 쇠말뚝 뽑기, 백도의 혈침’

1894<가또마루>(加藤丸)장군(小將)이 백도에 쇠말뚝을 박고 난 뒤 1895년에 명성황후를 시해하였고, 1936년도에 <야마시타 도모유키>(山下奉文=당시는 용산에서 근무. 육군소장)자신이 상부로부터 명령을 받고 백도에 가서 쇠말뚝을 또 박은 뒤 그 다음 해인 1937년에 지나사변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1894년과 1936년 두 차례에 걸쳐서 백도에 쇠말뚝을 박고 그 다음 해에는 큰 사건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야마시타 도모유키>는 신세우 씨에게 귀국하면 침몰 된 보물 선을 인양하여 그 돈으로 혈침을 찾아 꼭 뽑으라는 당부를 거듭했었다고 한다.

마지막 양심의 불꽃을 발휘한 매우 옳은 일본인임이 분명하다.

 

신 동식 원장으로부터 백도에 혈침이 박힌 내력 이야기를 듣고 한배달 여지학회 이 홍환 학회장 및 회원들과 상의 했더니 일단 현장 확인부터 해 볼 필요가 있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그리하여 여수시청으로 전화를 해서 백도로 가는 여정을 알아보았다. 여수에서 거문도로 배를 타고 가서 거문도에서는 백도로 가는 연락선이 없기 때문에 낚시 배를 임대해서 타고 들어가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요즘은 겨울철이라서 풍랑이 심해서 낚시 배도 삯이 비사고 잘 가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 뿐만 아니라 백도와 거문도 일원이 국립해상공원이라서 공원관리사무소의 승낙도 받아야하고 특히 백도는 명승지 제 7호로써 상육을 하려면 문화재청으로부터 상육허가를 받아야 상육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공적인 사유라면 관리를 여수시에서 하기 때문에 여수시에 신고하여 허락을 받아 상육 할 수도 있다고 했다.

소윤하 선생 인터뷰 2편 '일제 쇠말뚝 뽑기, 백도의 혈침’

탐사과정

1차 탐사 보고

19991222일 서울을 출발하여 여수로 향했다.

여수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국립공원관리공단 다도해 해상공원관리사무소 여수분소로 찾아가서 하 종수 분 소장을 만났다. 하 소장에게 내가 온 까닭을 이야기 하니 상육허가 문제는 여수시에서 하고 관리사무소는 협조기관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여수시청 문화관광과 문화재계의 정 수만 담당의 전화를 알아서 연결시켜 준다. 시청 정 수만 담당과 통화했다.

지금 백도에 보물이 있다고 허가를 신청한 사람이 있고 또 진정서도 들어 온 것이 있어서 골치 아픈 실정이지만 쇠말뚝(혈침)을 제거하는 데는 동의합니다. 일단 현장에 가서 확인하시고 상의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삼산면장님께 전화를 해 놓겠습니다. 그래야 상육을 하실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도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러면 내일 거문도로 들어가겠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그런데 요 며칠 간 풍랑 땜 세 거문도로 들어가는 배가 뜨지 못 했는데 내일 들어가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못 들어가면 여수에서 하루 더 쉬지요 뭐.

그렇게 하십시오. .

통화를 마치고 나니 퇴근시간이 되었다.

선생님 제가 이리로 발령 된지가 얼마 안 되어 아파트하나 얻어서 혼자서 잡니다. 가족들은 서울에 있고요. 그러니 여관에 가시는 것 보다 저하고 하루 밤 함께 지내시는 것이 어떨지요? 불편하시지 않으신다면 요.

아 저야 괜찮습니다. 여관비를 버는 셈이니까요.

그럼 그렇게 하십시다. 나가서 저녁은 해결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이날 하 종수 소장에게 하룻밤 신세를 톡톡히 졌다.

소윤하 선생 인터뷰 2편 '일제 쇠말뚝 뽑기, 백도의 혈침’

19991223일 오전 9시에 여수여객터미널에서 거문도행 데모크라시3호를 탔다.

듣던 대로 7일 간이나 폭풍주의보 때문에 결항 되었다가 오늘 처음 뜨는 배라서 여행객이 많았다. 바다는 아직도 꽤 많이 출렁거렸다.

9홉 시에 출항하여 거문도에 도착하니 11시였다. 2시 간이 걸렸다.

거문도에 도착하자 면사무소로 찾아갔다. 면장을 만나 내가 온 목적을 설명했다.

시청에서 전화가 왔습디다. 제가 부임 된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면내 사정은 잘 모르지만 우리 면에서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돕겠습니다.

오후에 백도를 다녀왔으면 합니다만...

그건 좀 곤란합니다. 오늘도 작은 배는 출항 금지 상태입니다. 설혹 출항허가를 받아도 파도가 높아서 백도에 접안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안 될 겁니다. 하지만 일단 해경파출소로 한 번 가 보십시다.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면장의 명함을 보니 이름이 이 정휘다. 바를 정자 빛날 휘다. 올바른 것을 빛낸다는 뜻이다.

사람의 인상이 퍽 민주주의 형이다. 말씨도 털털하고 호감이 간다.

소윤하 선생 인터뷰 2편 '일제 쇠말뚝 뽑기, 백도의 혈침’

섬에는 해경과 육경이 있다. 이들의 소속도 다르다. 해경은 해양수산부 소속이다.

면장의 성품이 아주 소탈하고 친절한 사람이다.

나는 이 면장의 뒤를 따랐다. 면사무소의 골목에서 빠져나와 오른 쪽 길로 꺾어서 걸었다. 길의 왼 쪽은 바다고 오른 쪽은 음식점이며 가게가 연이어 즐비 하다. 다방도 있고 술집도 많다. 섬치고는 너무 도시 같다. 바다에는 배들이 빼곡히 연이어 묶여 져 있다. 파도에 따라 앞뒤를 출석 거리며 춤춘다.

저 보십시오. 內港이 이정도로 출렁거리면 바깥바다는 대단 할 겁니다.

10분 간 걸어서 연락선 선착장을 지나 오른 쪽으로 돌아가니 해경파출소가 있었다.

우리가 파출소 안으로 들어가서 찾아 온 이유를 설명하고 출항할 수 있냐고 물으니 안 된다고 잘라 말한다.

현재 폭풍주의보가 금방 발효 되었습니다. 주의보가 해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녀오시도록 하십시오.파출소 소장의 말이었다. 하는 수 없이 거문장이라는 여관에 방을 잡고 쉬기로 했다.

소윤하 선생 인터뷰 2편 '일제 쇠말뚝 뽑기, 백도의 혈침’

19991224일 맑음 바람 세게 불고 파도 높음.

아침 일직 이 정휘 면장이 숙소로 찾아 왔다.

이곳은 아침 식사하는 데가 마땅한 곳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제가 가는 집으로 모시고 갈라고 왔습니다. 같이 가시지요.

아이쿠 고맙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아예 배낭도 가지고 가시지요. 아침 드시고 저랑 몇 군 데 구경하실 데가 있으니 말입니다. 이곳도 볼만한 곳이 더러 있습니다.

폭풍 주의보 해제가 아직 안 됐습니까?

기상예보를 들으니 아마 며칠 간 폭풍주의보가 계속 될 거라 합디다.

허허 낭팰세.하면서 배낭을 짊어지고 거문장 여관을 나와 이 면장의 뒤를 따랐다.

거문장은 숙소로서는 거문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시멘트 계단을 내려오니 선창으로 가는 길이 있고 그 앞 바다에는 정박 중인 어선들이 즐비하게 물위에 떠서 출렁거리는 물결에 따라 덩실거리며 춤을 추고 있다. 햇볕은 맑게 내리비치지만 차갑고 세찬 바람이 순간순간 휙 휙 얼굴을 훑으며 스쳐 지나간다. 겨울철의 남쪽 섬의 풍경이다. 건너다 뵈는 산은 겨울철을 무시하고 푸르기만 하다. 아마도 저 숲은 동백나무 숲이리라.

선착장 옆으로 난 도로를 따라 주변 풍경을 구경하면서 걸어가니 어제 갔었던 면사무소로 들어가는 골목길을 지나서 오른 쪽으로 휘어진 바닷가로 가다가 다시 왼쪽골목길로 접어들었다가 그 길을 빠져 나가니 다시 바닷가가 된다.

골목길을 빠져 나가자 왼 편에 있는 강동횟집으로 들어간다.

들어갑시다. 이집이 제 단골집입니다. 아침 식사는 거의 이집에서 먹습니다. 아줌마! 서울서 오신 손님을 뫼시고 왔싱께 오늘은 특별히 맛있는 걸로 차려보시오. 뭐가 좋은 것이 없소?이 면장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걸걸한 목소리로 떠들썩하게 소리친다.

아이 면장님 어서 오시오. 멀 로 드릴까요? 먼저 말씀을 하시오 잉.

아따 우리가 뭘 안다 요. 아줌마가 알아서 좋은 걸로 주시오 이~

잠시 후 꼼 장어 탕에다 이것저것 밥상이 차려졌다. 모두가 생선이다. 푸짐한 반찬에 소주 한 잔을 곁들여서 밥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모처럼 포식했습니다. 음식이 내 입에 딱 맞습니다.

그려라? 입맛이 맞당게 기뿌구만요 잉

얼맙니까?

밥값은 내가 계산 합니다. 달아 두시오. 나는 가요.

그리하기라. 마씩께 먹었땅게 좋쿠마니라.

집 주인 아줌마의 친절한 사투리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음식점을 나오니 남쪽이긴 하지만 겨울의 찬바람이 몸을 감싸 돌기 시작한다. 코끝이 시큼해 진다. 음식점에서 나와 왼쪽에 큰 삼호교가 보인다. 이 다리는 고도인 거문리에서 서도 덕촌리로 건너가는 무지개다리다. 너비는 승용차 두 대가 교차 할 수 있다. 다리 아래로는 제법 큰 어선들이 지나다닐 수 있다. 나는 이 면장이 안내 하는 대로 삼호교 위를 걸어서 건너갔다. 그 다리를 건너서 수월산 거문등대도 갔었고, 신선바위와 기와집 오름도 갔었다.

경치가 장관이다. 오후에는 장촌리까지 걸어갔다. 십리도 넘는 거리다. 장촌리에서 거문리로 올 때는 작은 연락선을 타고 왔다.

이 배는 장촌리와 동도 竹村리와 거문리를 연결하는 통근 연락선이다.

거문도는 古島(거문리)西島東島 섬이 세 개다. 하루 종일 걸었더니 여관방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꿈나라로 달렸다.

이 면장과 걸어 다니면서 많은 대화를 했었다. 주로 삼산면 면장으로서 이 삼산면을 어떻게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 것이며 이 지역 주민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며 앞으로 그 필요한 것을 어떻게 충족시켜 나갈 것이며 무엇을 개선 할 것과 그리고 시청에서의 부당한 행정지시와 다른 기관장들의 부당한 요구 등을 주로 이야기 했다. 나라가 잘되려면 공직자가 청렴정직하고 민원을 공평하게 처리해야 한다.

소윤하 선생 인터뷰 2편 '일제 쇠말뚝 뽑기, 백도의 혈침’

여기에서 <巨文島 風雲史( 郭泳甫 編著)>를 인용 거문도의 연혁을 소개하겠다.

거문도가 국제전략지도(國際戰略地圖)에 올랐고 따라서 일제가 백도에 쇠말뚝을 박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이기 때문에 소개한다.

거문도의 위치는 북위 341.22.73. 동경 12718.36.68이다.

 

1967. 서울대 동아문화연구소 조사팀에 의해 동도 죽촌리에서 돌도끼(磨製石斧) 2개와 石塚, 고려고분 3기 등이 발견되었고, 1976년에는 서도리에서 唐代의 오수전(五銖錢)이 발견 되었으며, 이보다 앞서 1920년에는 동도 죽촌리 뒷산 기슭(속칭: 절골) 절터에서 고려청자 기름병이 발견되기도 했었다.

이것들이 나온 것은 오래전부터 이 섬에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증거들이라 본다.

 

1885년 영국해군이 거문도를 점거하면서부터 세상에 거문도가 알려지게 됐다.

1887년 영국해군이 철수하던 해 조선군이 設鎭 했으나 1895년 돌산의 방답진(防踏鎭)과 더불어 혁파되고 말았다.

거문도에 대한 倭寇의 침입을 비롯하여 러시아, 영국 등 열강의 불법침입. 점거는 19세기에 특히 극심했다.

 

현재 거문도 주민의 입도조(入島祖)는 대부분 中世祖부터의 입주이며 따라서 선대의 先塋山이 고흥 등지에 많이 있다. 입도경위를 보면 고흥. 장흥 또는 청산도를 경유하여 여러 씨족들이 들어왔으며 생활영위에 있어서도 장흥이나 낙안(현 벌교)을 중심으로 거래가 빈번했다. 최초에 입도한 씨족은 秋氏로 전해지고 있으며 임진왜란 때는 주민들이 일시 철수했다가 壬亂 후 다시 입도했다고 한다.

거문도는 현재 여천군(1986910일 현재)에 속해있는 삼산면 관할로 되어 있으나 興陽(현 고흥)에 오랫동안 속해있었다. 이에 흥양 현지에 따라 대충 정리해 본다.

 

1414(세종 21)부터 흥양에 속하면서 삼도라 불리어 왔다. 이 삼도라는 명칭은 손죽도. 초도. 거문도 세 곳을 이르기도 한다. 이는 손죽도나 초도 주민의 호적 단자에 삼도에 삼도라는 표기가 되어 있음을 볼 수 있고, 이 대원 장군의 죽음을 슬퍼하여 노래한 삼도가에서도 알 수 있다. 삼도라하여 400여 년을 흥양(현 고흥)현의 행정관할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주민들은 자연히 고흥. 장흥. 벌교(낙안)를 중심으로 거래가 빈번히 이루어 졌고, 따라서 바다 뱃길을 드나들면서 풍랑으로 조난을 당하는 등 한 많은 애환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1896년 지방제도 개혁에 따라 돌산군-여수군-여천군에 이속되면서 여수가 제반 거래의 중심으로 바뀌고 인적 교류도 활발히 맺어져 지금은 수를 파악 할 수 없을 만큼 여수에 이주하고 있다.

한편 고흥. 장흥과는 1970년 경 까지도 소형 하물선이 간혹 거문도를 왕래하면서 수 세기 동안의 인연을 간신히 다리 놓고 있었으나 지금은 완전히 두절된 상태이다.(1986년 현재)

 

흥양(興陽=高興) 삼도라 불리던 것이 거문도로 불리게 된 것은 이곳에 거문진이 설치된 이후부터이며 이때부터 행정관보에도 거문도라 실리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속칭으로 거마도 또는 왜도, 때로는 해밀튼이라 이름 하기도 했다. 거마도는 중국 사람들이 이 고장에 드나들면서 붙인 이름이고, 倭島倭寇居留에서 비롯되었으며 해밀톤은 1845년 영국 측량선이 거문도를 측량하고 그들의 지도에 표기한 이름이다.

 

세종 때 조정에서는 일본 사람들이 고도와 초도에 거류하면서 그 근역에서 어업을 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는 기록이 있고, 1757(영조33) 8월에 홍 양한이 펴 낸 여지도서에는 손죽도라 표기되어 나오고, 1834(순조34) 김정호가 펴 낸 청수도에는 삼도, 초도는 왜로 표기되어 있다 그 후 1861(철종11), 대동여지도에 비로소 거문도가 표기되어 나온다.

 

오늘날과 같이 巨文島라 이름 하게 된 연유는 이 고장에 儒學者가 있어 이들이 鄕學을 진작한데서 비롯되었다. 중국 사람들이 이 고장에 드나들면서 거마도라 했었는데 이들과 필담으로 상통하면서 그 학문의 해박함에 거마도의 를 빼고 자로 바꿔 巨文島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순조 전 후에서 한말까지가 이 고장 학문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데 그 중에도 빼어난 유학자로는 귤은 김 유(橘隱 金 劉)와 만회 김 양록(晩悔 金 陽祿)을 들 수 있다.

 

1910년 일제통치로 접어들면서 일본수산회사에서는 大野榮太郞이라는 직원을 파견하여 수산물을 취급하여 일본으로 실어가고 1918년 거문도 어업조합이 조선총독부 인가를 받아 발족됨에 따라 경제적 착취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 먼저 1905년 신학문을 펴는 낙영사립학교가 개교됐고, 동년 거문도 우편소가 개설되었으며 서도 수월산 기슭에 국제규모의 등대도 설치완공 되었다. 이보다 앞서 1884년 독립당 지도자 고균 김옥균이 일본에 망명 할 때 거문도에 기항하여 이 고장 어민들에게 김옥균 假着이라 쓰고 시 한 수를 써주고 갔다.

 

거문도는 남해의 국경이라고 볼 수 있으며 문화권에 있어서도 양면성을 내포하고 있다.

즉 조선왕조의 유학을, 다른 한편으로는 해양을 통하여 외래문물을 받은 곳이기도 하다.

다음은 여천군 삼산면 연혁을 살펴보기로 하자.

1414(세종23)경부터 삼도라 호칭. 흥양군에 속했으며, 군정은 흥양군에 소속되어 別 將 또는 屯別將을 두었다.

1591(선조 24) 전라 좌수사로 이 순신이 부임하여 삼도를 점거하고 있던 왜구를 쫓아 버렸으며 능노군(水軍) 460명을 조직하여 守防將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

1711(숙종37)군정이 통영으로 이관되었으며 별장 또는 둔별장에게 다스리게 했다.

1855(철종6)주관행정을 개혁하여, 군정은 통영위 산하 흥양군 본포진으로 삼도군사가 복귀되고 일반 행정도 흥양으로 귀속되었다.

189623일 칙령 제 13호 지방제도개혁에 따라 삼도는 남원을 수부로 하는 돌산군 소 속으로 바뀌었다.

1896(고종33) 8월 칙령 제 31호 지방제도개혁에 따라 광주를 수부로 하는 돌산군 소 속으로 바뀌었다.

18968월 흥양에서 호적 등 행정이 돌산군으로 이관되고 삼도가 삼산면으로 개칭했다.

1896년 삼산면사무소를 서도리에 설치하고 창고도 건치 했다.

1896년 초도와 손죽도를 상도, 거문도를 하도라 칭하고 행정구역을 양분하여 집강(오늘날 의 면장에 해당)을 상도에 1, 하도에 1, 두 명을 두어 행정을 수행케 했다.

1908년 면사무소를 서도리에서 고도(거문리)로 이설했다.

19143월 일제의 지방행정구역개편에 따라 돌산군이 돌산면으로 격하되고 여수군이 설치 됨에 따라 여수군 관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1949813일 대통령령 제 161호에 의거 여수읍이 여수시로 승격됨에 따라 여수군이 여천군으로 개칭되고 삼산면도 여천군 관할로 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19655월 여천군 면출장소설치조례에 의거 삼산면관할 초도 및 손죽도에 삼산면 초도출 장소. 손죽도 출장소를 각각 설치하고 호적 기타 면 사무일부를 분장케 했다.

19705월 서도리에 속한 자연부락 변촌이 내무부인가를 얻어 리로 승격되었고 따라서 삼 산면의 행정구역은 69구에서 10구로 증가 되었으며 18개의 자연부락과 80개 반 으로 편성되기에 이르렀다.(1986년 현재)

 

비록 작은 섬이지만 역사적 그 의미는 컸다.

러시아. 영국. 일본. 중국으로부터 이 섬의 전략적 요충지로 지목받던 곳이다.

백도는 어떤 의미가 있기에 일제가 혈침을 박았을까?

그에 대한 이유는 담에 훌륭한 후인이 나타나 밝히도록 자료로 남긴다.

 

25일도 폭풍주의보해지가 되지 않았다.

26일 오후 늦게야 주의보가 해제되었다.

내일은 백도로 들어 갈 수가 있단다. 백조 호라는 낚시 배를 예약했다. 배 값이 70만원이라고 한다. 상상 밖의 값이다. 하지만 비산 배 값보다는 백도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반가웠다. 지난 23일 거문도에 도착해서 꼼작 없이 4일 간을 기다렸었다. 그러나 내일이면 백도로 들어가 혈침을 확인할 수 있다니 왠지 마음이 들뜨는 것 같았다. 백도에 박힌 쇠말뚝은 면직원인 정 용현 계장도 봤다고 한다. 쇠말뚝이 박힌 절벽으로 내려가려면 밧줄을 몸에 묶고 내려가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밧줄과 告由祭 모실 祭需도 준비도 했다. 정과 망치로 쪼아서 돌을 뚫고 들어가야 쇠말뚝을 확인 할 수 있다. 완벽하게 확인 하려면 한 개를 뽑아서 쇠의 질이나 박힌 깊이 등을 봐야 판단 할 수가 있다. 바위를 깨기 전에 자연에 알리는 간단한 알림제를 올리고 바위에 정을 대고 깨야 된다. 이것은 자연과의 거래하는 하나의 예의(禮儀)이다.

 

19991227

아침 5시에 기상하여 밧줄이랑 고유제 모실 祭需와 망치와 정 등 준비물을 확인했다

7시에 해경파출소 앞 선착장에서 만나 출발하기로 했었기에 배낭을 짊어지고 선착장으로 나갔다. 하늘에는 아직도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먼동이 틀 무렵이다. 그런데 약속했었던 선착장엔 아무도 없었다. 720분이 되니 정 용현 계장이 나타났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면장님은 곧 나오실 겁니다. 그런데 백조호가 안 보이네요.

약속을 너무 빨리 했었던 모양입니다. 이렇게 일직 잠자리에서 일어났겠어요?

아닙니다. 출어하는 사람들은 벌써 떠났어요. 이곳 사람들은 일직들 일어나는데 배가 안 보이는 걸 보니 낚시꾼들을 어디에다 실어다 놓고 오는 모양입니다.

둘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면장이 어두컴컴한 골목에서 나오며 인사한다.

잘 주무셨어요? 날씨는 참 좋겠네요. 바람 한 점 없네요.

어제만 해도 해변에 부딪치는 파도소리가 요란했었는데 지금은 쥐죽은 듯 잠잠하다.

잠시 뒤에 퉁퉁퉁퉁하는 배 엔진 소리가 나더니 바다 쪽에서 흰 물체가 밀리듯 다가온다.

낚시꾼들을 포인트에 실어다 주고 오느라고 좀 늦었습니다. 어서 타십시오.

선장이 늦어서 미안하다는 뜻으로 화달 짝 웃으면서 변명한다.

해경에 출항신고는 했소?

. 아까 낚시꾼을 태우고 갈 때 미리 신고했어요.

그럼 출발합시다.

배를 탈 때는 반드시 출항신고를 해경파출소에다 해야 한다.

말없이 밀어붙이는 뱃머리로 뛰어 올랐다.

우리가 올라타자 배가 선회하면서 거문 항을 빠져나간다. 먼데가 밝아지기 시작한다. 먼동이 튼다. 백조호가 거문 항을 출발한 시간은 730분이다.

며칠간 폭풍 때문에 애간장을 태우며 기다리다가 이제 겨우 백도로 간다고 생각하니 웬일인지 마음이 들뜬다.

 

배가 거문도 내항을 빠져나와 거문도 섬 오른쪽 산자락 끝이 스쳐 지나갔고 왼쪽으로는 동도 섬 산자락을 지나치고 있다. 이곳에서 태양이 솟는 동쪽이 백도다. 동쪽 먼 하늘은 연분홍색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바다는 무척 잠잠하다. 마치 잠자듯 잠잠하다. 배의 엔진소리만 요란하다. 이 낚시 배의 속도는 최고 19로트로 달릴 수 있다고 한다. 백도까지 한 시간 걸린다고 한다. 잠잠한 물결위로 미끄러지듯 배가 달린다. 왼 쪽 소 삼부 도를 지나고 대 삼부 도 앞을 지날 무렵 동녘 하늘은 울긋불긋 아름답게 변하고 있다.

연두색 하늘 가장자리에는 얇은 흰 조각구름이 떠있고 그 아래는 붉은 물감을 뿌린 것 같이 웬 통 붉은 빛, 그 아래는 짙푸른 쪽빛 바다에서 새빨간 불덩어리가 푸른 물결을 비좁고 연두색 하늘 가로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모두가 황홀경에 빠졌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의 연출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었다.

마치 며칠간 폭풍 때문에 기다렸던 것에 보상이라도 하는 듯하다.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뱃머리에 서 있던 이 정휘 면장이 입을 열었다.

정말 아름다운 하늘과 태양을 구경합니다. 정말 장관입니다. 아름답지요?

그렇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하늘과 바다와 태양을 본 적은 없습니다.

저런 광경을 그림으로 옮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정 용현 계장은 그림을 좋아한다면서 한 말이다.

우리가 대화하고 있는 사이에 동그란 붉은 태양은 어느새 바다위로 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갑자기 뱃머리가 출렁출렁 뛰기 시작한다.

백도에 들어가려면 이쯤에서 파도가 일어납니다. 10분 간 계속 파도가 일어납니다. 선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하고 정 용현 계장이 말했다.

정 용현 계장은 거문도 토박이다. 이 면장은 나주출신이다. 부임한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이 지역의 속살을 아직은 다 모른다. 그래서 정 계장을 대동하게 되었다.

태양은 순식간에 몇 발이나 솟아 올라서 공중에 떠있다. 파도가 높아지니 뱃전으로 파도가 쳐 올라왔다. 우리는 튀어 오르는 물세례에 쫓겨서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백도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이 파도를 넘어야 한다고 한다.

멀리 희미하게 삐죽삐죽한 백도가 보이기 시작한다.

저기 보이기 시작합니다. 저것이 백도입니다.

선실 안에서 유리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던 정 계장이 흥분된 어조로 소리친다.

아련한 수평선 위 점이 찍히듯 뾰족 뾰족한 그림이 보이기 시작한다. 펄쩍펄쩍 뛰던 배가 갑자기 미끄러지듯 달린다. 물결이 갑자기 조용해 진 것이다.

이제 파도 띠를 지났어요. 백도가 신비한 섬이라는 것은 바로 이 파도 띠를 봐도 신비한 섬인 것은 틀림없어요. 이런 파도 띠가 있는 섬이 여기 말고 또 있을까요?

어느 방향에서든 백도로 들어가려면 이 파도 띠를 지나야 합니까?

그러 문 요. 요즘도 날씨가 좋으면 밤에 갈치 낚시를 여기서 많이 합니다. 그러면 백도를 중심으로 삑 둘러가면서 낚시 선단이 낚시를 하는 데 이 파도 띠 밖에서 주로 합니다. 그리고 이 파도 띠가 어떨 때는 강하고 어떨 때는 약하답니다. 대개 조금 때가 약하고 사리 때는 엄청 강 해 진답니다. 오늘은 약한 편에 속합니다.

그러면 이 파도 띠는 백도를 수호하는 의미로 봐도 될까요?

거문도 토착민은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백도는 신성한 곳이니 조심해서 행동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우리는 선실에서 나와 뱃머리에 서서 다가서는 백도를 감상했다. 아득히 보이던 백도가 점점 가까워진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100m도 넘게 깎아지른 절벽 위에 하얗게 서있는 무인등대다. 등대 쪽으로 미끄러지던 배가 왼쪽으로 선회한다. 기암괴석이 여러 가지 형상을 하고 있는 경치를 구경시키려는 선장의 배려다. 배를 천천히 움직이며 감상하라는 선장의 마음씨가 예쁘다. 북쪽으로 가다가 다시 동쪽으로, 동에서 다시 남쪽으로. 남쪽에는 하 백도가 있다. 백도는 상 백도와 하백도가 있는데 남쪽에는 하 백도가 있고 북쪽에는 상 백도가 있다. 하 백도에서 다시 북쪽 상 백도 등대 밑으로 들어갔다.

 

시멘트로 만든 층계가 촘촘하고 뱀처럼 꼬불꼬불하게 용트림 한 계단 아래 제법 넓은 바위 모서리에 뱃머리를 댄다. 뱃머리를 바위에 대자마자 배에서 뛰어내렸다. 더디어 백도의 바위에 올라선 셈이다. 이 계단은 백도의 서쪽 계단이다. 능선 넘어 반대쪽에는 동쪽 계단이 있다고 한다. 배는 우리를 내려주고 주위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탐사가 끝나면 다시 우리를 태우고 거문도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 시멘트 계단은 1909년 조선조정으로부터 등대세우는 공사를 도급 받은 일본 사람들이 등대를 세울 때 만든 계단이라고 한다. 보기에도 무척 단단하게 만들었다. 층계와 층계의 높이도 알맞게 낮고, 깎아지른 가파른 곳을 꾸불꾸불 나선 형태로 올라간다. 계단의 수는 수 백 개는 되는 것 같다. 느린 걸음으로 계단을 오르면서 뒤를 돌아보니 우리가 내린 곳이 큰 축구장 만하게 바다가 섬의 옆구리를 둥그렇게 파고 든 곳이다. 마치 자연 같다.

우리를 실어다 준 배는 그 가운데에 떠 있다. 계단을 다 올라 능선 꼭대기에 올라서니 동쪽 바다가 확 트인다.

저기 저 바위 좀 보십시오. 저게 독수리 바위입니다. 일제 때 저 독수리 바위 머리를 잘랐던 것을 해방 후에 다시 올려서 시멘트로 붙였어요.정 계장의 설명이다.

독수리 바위 머리를 왜 잘랐답니까?

저 독수리가 일본을 향해서 쫄 듯이 노린다고 그랬답니다.

능선 왼쪽에 멀리 보이는 독수리와 같은 형상을 한 바위가 보인다. 그리고 그 능선을 따라 올라가서 왼 쪽으로 휘어 오른 제일 높은 곳에 하얀 등대가 보인다.

우리는 저 아래로 내려 가야합니다. 저 등대가 있는 곳은 북쪽이고 이쪽이 남쪽인데 저 남쪽 끝이 절벽입니다. 그 절벽에 쇠말뚝이 박혀있어요. 요 아래에는 옛날에 전 경환 씨가 온다고 해서 닦은 헬기장이 있어요.

? 전 경환 씨가 뭐하려 여기까지 왔었답니까?

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 듣기로는 일본 사람들이 이 백도에다 보물을 숨겨 뒀다는 것입니다. 그걸 찾으려고 왔었다고들 합디다. 현재도 그 보물을 찾겠다고 많은 사람들이 허가를 내려고 야단입니다.

여수시청 정 수만 담당도 그런 말을 하데요. 보물 찾겠다는 허가신청을 한 사람들끼리 진정서를 넣어서 골치 아프다고 말입니다.

능선에서 남쪽으로 낙타 등과 같이 약간 봉긋하게 튀어 오른 언덕 베기 바위위에 앉아서 잠시 쉬면서 하백도의 기암괴석을 바라보며 감상하면서 정 계장의 설명을 들었다.

자 이제 좀 쉬었으니 고유제부터 모십시다. 제사 모실 장소가 어디가 좋겠습니까?

요 아래 헬기장에서 모시면 어떨까요?

그렇게 합시다.

 

헬기장은 꽤 넓다. 헬기장 위에 제사상 차리기에 안성맞춤의 바위가 하나 있었다.

방향도 북쪽이다. 그 바위에 준비 해간 제물을 진설하고 막걸리를 따르고 세 번 절 했다.

천지신명과 백도의 토지신이시여! 소찬이나마 흠향하시고 오늘 이 탐사가 진실을 밝히는 실마리가 되도록 도와주소서.하고 심축했다. 의식을 마치고 음복으로 아침을 대신했다.

시계를 보니 열 시가 넘었다.

 

내려가시지요. 이쪽으로 내려가면 됩니다.

정 용현 계장이 앞장서서 숲을 헤치며 내려간다. 이정휘 면장과 나는 뒤를 따랐다.

숲을 헤집고 내려가니 울퉁불퉁한 바위다. 심한 경사다. 조심조심해서 내려갔다. 삐쭉하게 튀어나온 바위에다 준비해간 밧줄을 묶었다. 그리고 그 밧줄을 잡고 내려갔다. 끝은 절벽이다. 절벽에 몸을 바싹 붙이고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앞서가던 정 계장이 돌아서면서 손가락으로 가르치는 곳을 보니 쇠말뚝 두 개가 나란히 박혔다. 이때부터 면장과 정 계장은 위에 있고 나 혼자 밧줄을 잡고 내려가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쇠말뚝은 생각보다 작은 것이다. 아니 가늘다. 직경 2cm정도다. 그런데 바위에서 나온 부분이 없다. 바위와 평면을 이룬다. 또 특이한 것은 쇠말뚝 끝의 가운데가 뾰족하다. 마치 칼로 나무를 양쪽에서 빚어서 자른 것 같다. 다시 말해서 톱이나 용접기로 자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원상태가 바위위로 길게 올라 왔던 것을 자른 것이 아니라 원래 박을 때 이렇게 잘라서 바위 면과 같은 높이로 박은 것이 틀림없다. 박은 목적은 바위의 위가 아니라 바위의 속에 흐르는 氣路毁損하기 위한 목적으로 박은 것이다. 이것은 혈침 외에 다른 용도로 사용 할 목적이 전연 없음을 알 수 있다. 과연 제보내용이 진실이구나 하고 느꼈다.

이런 것이 두 개씩 짝을 지어 절벽 위 부분에 네 개, 절벽 아래로 약 8m지점 바닷물 언저리에 네 개가 박혀있다. 모두 여덟 개다. 신 동식원장의 제보 내용대로다.

이면장과 정 계장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묻는다.

혈침이 맞습니까? 일본사람들이 박은 것이 확실합니까?

일단 한 개를 뽑아 보아야 확실한 대답을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어떻게 뽑습니까? 장비도 없이...

망치와 정을 가지고 왔으니 작업은 할 수 있습니다만 작업해도 됩니까?

어때요. 작업을 하시려면 해 보시지요. 아직 시간도 있으니까요.

그러지요. 일단 한 개를 뽑아 보겠습니다.

그런디 어떻게 욜코롬 박을 수가 있을까요?

. 이것을 박을 때는 바위에 구멍을 먼저 뚫고 그 구멍에 쇠말뚝을 집어넣고 가장자리 틈새에는 백회가루를 흘려 넣고 위에는 시멘트로 막는 수법을 가장 많이 썼었습니다. 작업을 해 보면 속에서 백회가 나올 겁니다. 한 번 파 보겠습니다.

속으로는 확신이 갔지만 쉽게 혈침이라고 단정해서 말하기는 조심스러웠다.

 

밧줄을 몸에 묶고 정을 대고 망치로 쳐서 쇠말뚝의 옆을 팠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바위가 예사 바위가 아니다. 금강석과 같다. 보기에는 연질의 바위 같았는데 정을 대고 망치로 때리니 정이 탱탱 튀어 나왔다. 세 시간이 넘도록 계속 팠는데도 2cm도 못 팠다.

겉의 시멘트를 깨내고 속으로 들어가니 흰 백회가 희미하게 보인다. 쇠의 가장자리에 흰 가루가 둘러져있다.

바람이 좀 일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바람을 만나면 오도 가도 못합니다. 이제 돌아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정 계장의 경험을 존중해서 현장에서 철수하기로 하고 연장을 챙기고 있는데 바다 쪽에서 고함 소리가 났다. 바라보니 백조호가 오고 있다. 선장이 선두에 서서 손을 흔들면서 돌아가자는 신호를 보낸다. 우리는 서둘러서 내려왔었던 능선으로 올라와서 낙타 등을 넘어 올라 왔었던 서쪽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바람이 일고 있습니다. 빨리 백도를 떠야 할 것 같습니다.

배에 뛰어 오르니 선장이 말했다.

 

결론은 혈침으로 규정을 지었다.

첫째, 신 동식 원장의 제보내용대로 쇠침이 있었다.

둘쩨, 혈침이 아니면 달리 사용했을 용도가 전연 없다.

셋째, 작은 양이지만 백회가루를 사용했었던 것이 보였다.

이상과 같이 백도혈침 탐사보고를 마친다.

 

탐사과정에서 만난 사람들

 

삼산면 면장 : 이정휘(: 風角) 0662-644-2607

총 무 계 장 : 정용현

 

국립공원관리공단

해상공원여수분소장 : 하종수 0662-644-4622

 

여수시청 문화관광과

문화재계 담당 : 정수만 0662-690-2226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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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한배달 지도위원 소 윤 하 씀

 

영상촬영 : 최윤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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