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도 그렇지만, 사진도 보여줄 수 있는 이미지만으로 짜여 있지 않다. 모두 보여줬다고 해도 그 속에 숨어 있는 무엇인가를 예인할 수 있도록 사진가는 대체로 자기도 모르는 길을 만들어 놓는다. 사진을 ‘본다’는 것은 사진이 숨겨놓은 길을 찾아 가는 일이고, 그 길 위에서 세계를 몽상하는 일이다.

관객이 길의 안쪽을 찾아 겨우 몸을 돌렸을 때, 잠재되어 있던 상(latent image)이 드러나며 관객에게 말을 하기 시작한다. 염결한 사진형식으로, 사진 속 대상이 좀체 말을 하지 않을 것 같은 민연식의 사진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침묵하는 저 검은 가지마다에 세세하게 새겨진 시간의 주름을 볼 수 있다. 겨울나무를 찾아 낯선 시간과 공간속에서 작가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래도록 지켜보는 일이었을 것이고, 작가보다 더 긴 시간을 한 곳에 버티고 서 있었던 나무들도 작가를 바라보았을 터, 그 사진이 이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검은 선분으로 겨울이 스며들었나. 강렬한 붓질로 이뤄진 무수한 선들이 올라가거나 내려가면서 겨울의 언덕으로 아득하게 뻗어나가고 있다. 갈수록 좁아지는 길목에서는 세필로 정성 드린 흔적이 멈춰 있기도 한다. 아주 어둡거나 그보다 약간 어두운 나뭇가지들의 수묵의 농담. 캄캄하지만 아름답고 슬프다.

‘겨울나무는 포장하지 않고 원초적 자기를 보여준다.’고 말한 작가의 시선이 머물렀을 자리. 아마 그때 즈음 작가는 나무라는 존재의 비의(秘意)를 내밀하게 들여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단단한 침묵에 응고된 겨울나무는 그늘과 상처와 햇빛 속에서 스스로 안온하다. 잎과 열매도 없이 오직 자기로부터 출발하여 온통 자기에게로 귀결하는 순연한 몸짓이다. 자기응시와 자기성찰로 이어진 절대공간을 흑백필름에 비유할 수 있을까.

네가-포지프로세스Nega-Posi Process를 통해 상(像)을 드러내는 흑백사진에서 삶과 죽음은 이미 한 몸이다. 실재했던 사물(referent)에서 반사된 빛이 흑백필름에 흔적으로 기입되고, 네거티브인 지하세계에 거주하다 지상의 포지티브로 올라와 다시 살아나는 사건-이미지인 것이다.

그 사건은 삶속으로 죽음을 안고와, 봄부터 겨울까지의 생의 기억들을 되살아나게 한다. 나무는 과거로 휘어진 가지의 상처와 대면하고, 애도한다. 상실과 소외를 받아들이며 선명하게 새겨진 사진 속의 새로운 고향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젠 아프지 않다. 나무의 상처는 다채롭게 소묘되고 그대로 명징하다.

‘사진적인 사실’을 표상하려는 흑백사진에서 나무의 상처를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민연식의 겨울나무는 이처럼 (불)균형 속에서 상처와 공존하며 자기를 꼿꼿하게 세워내고 있다. 작가의 작업의 출발점이자, 그가 사진작업을 하는 이유일 것이다. 어쩌면 작가에게 사진이란, 개별주체로서의 자신을 꼿꼿하게 세우는 일이 아닐까.

그러니 사진의 형식도 캄캄한 암실의 시간 속에서 작가의 손을 통해 견고하게 세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겨울나무에 느리게 쌓이는 시간과 무거운 침묵을 어떻게 표상할 수 있겠는가. 촬영에서부터 현상, 인화하는 매 순간마다 소멸과 생성의 반복을 통해 사진은 자신의 자리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그 자리란 자기보존본능인 동시에 죽음을 껴안은 삶-사진의 자리이자, 작가의 절대적인 공간이다. 그래서 민연식의 사진은, 그 사진의 ‘실재’를 직접 봐야한다. 그것이 단순한 기계적인 조작이 아니라 끝내는 사라질, 하지만 매혹적으로 아름다운 생명운동을 사진으로 다시 살게 한 작가의 기쁜 제의이자, 존재론적인 표징이기 때문이다.

최연하(독립큐레이터, 사진비평)

www.artkoreatv.com
아트코리아방송 김한정 기자 (merica2@hanmail.net)

저작권자 © 아트코리아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