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와바라 시세이 *

1936년 일본 시마네현 출생으로, 도쿄농업대학과 도쿄사진전문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수은 중독 공해병인 '미나마타병'을 주제로 한 첫 번째 작업이 1962년 일본사진비평가협회가 주는 신인상을 수상으로 다큐멘터리사진가로 사진계에 입문하였다,

1964년부터 40여 년 간 한국을 수 십 차례 드나들면서 10만여 컷의 방대한 작업을 축적, 한국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분야를 망라하여 현실의 핵심을 찌르는 영상미학과 표현스타일을 시종일관 견지해 왔다는 평을 받고 있다.

사진의 본질은 '기록성'이라는 신념을 평생 구현해 온 다큐멘터리 사진가로서 1960~70년대에 집중 촬영한 그의 사진은 한국사진의 공백을 메워주는 귀중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1982년 일본 이나노부오 사진상과 2002년 한국에서 주는 동강 사진상을 수상했으며, 한국에서 그가 작업한 사진들을 모은 사진집 '내가 바라본 격동의 한국'(2008. 눈빛)이 출간되었다............

구와바라 시세이.

본 기자가 인터뷰한 날은 출국하기 전 5시간 전이었다.

구와바라 시세이는 1주일의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세미나 등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출국을 하였다.

질문)

먼저 소중한 시간을 할애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a-one갤러리에서 전시를 하시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요?

친구인 이용하씨(이하 이씨)가 갤러리를 오픈하는데 제 사진전을 열고 싶다고 연락을 해와서 협력했습니다. 격동 한국의 사진을 희망한다고 이씨가 말했기 때문에, 1960년대의 한국의 격동이랄까 있었던 일인 한일회담 반대 학생 데모와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그 두 가지를 주요 테마로 사진을 골라, 거기에 1960년대의 청계천, 1960년대의 미군기지의 여자의 사진, 농촌이나 어촌의 사진을 더해서 35점으로 정했습니다.

저와 이씨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씨는 베트남 전쟁의 마지막인 1973년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할 때 거기 있었는데 저도 베트남에 있었습니다.

취재로. 이씨는 군인, 저는 포토그래퍼 물론 만난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제 농담을 이해해주신다면 둘 다 베트남 전쟁의 전우에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연대감으로 인해 이씨에 매우 친밀감을 갖고 사진전에 협력했습니다.

복개되기 전의 청계천 판자촌-수표교 부근 1965

질문)

사진기록 작업을 하시면서 보람을 느끼셨다 거나 각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시다면?


지금 한국은 근대화, 고도성장을 해서 풍족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40여 년 전, 반세기 전의 한국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매우 힘든 상태였기 때문에 1960년대의 사진 기록은 한국의 역사가 되어있지 않나 라고 생각합니다.


청계천도 지금은아름다운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전엔 전쟁 후의 피난민이 정착했었기 때문에 당시 청계천의 모습을 찍는 것을 한국 사람들은 그다지 좋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개새끼'라고 자주 불렸습니다.


하지만 서울시 전 시장, 이후 대통령이 되는 이명박씨가 시장일 때, 청계천 개조가 완성될 때 쯤, 지금으로부터 7년 전쯤이라고 생각됩니다. 저의 사진이 역사 기록으로써 서울시 미술관에 10점정도 컬렉션 되었습니다만, 그 당시 큐레이터가 '쿠와바라상, 청계천 취재 사진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개새끼'에서 '청계천, 감사합니다'까지 약 35년 정도 걸렸는데요. 제 사진이 드디어 'OK'랄까 '좋아요'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한국은 매우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이 갖고 있는 스마트폰, 타블렛의 숫자가 일본인보다 더 많지 않을까요?

스마트폰, 삼성의 세계적인 성장은 한국의 오늘날을 상징하고 있달까,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국도 과거의 반세기를 되돌아볼 여유가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핸드폰은 일본보다도 한발, 두발 더 앞서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한국 취재 때는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약 50년 동안이기 때문에, 즐거웠던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매우 괴롭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취재를 했습니다.


제가 1964년 한국에 왔을 때는 카메라맨이라기 보단 잡지사의 특파원으로서, 말하자면 사진 기자로서의 취재였기 때문에, 아마추어랄까 일반의 카메라맨이 아니라 잡지 기자하고 포토그래퍼, 그러니까 프레스맨이었습니다.


한국은 말이죠, 일본의 식민지에서 해방된 뒤, 한국전쟁이 일어나서 1953년 7월 이십 며칠에 전쟁이 끝납니다. 그때부터 11년째에, 제가 1964년에 한국에 왔으니까요, 딱 11년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라 한국의 경제는 매우, 어려운 말로 하자면 피폐, 빈약한 상태였습니다.

한국의 정치는, 북한과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려운 말로 하자면 임전태세,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군이 매우 센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대통령은 박정희씨였지요. 그래서 제 취재는 판문점이라든가 논산훈련소라든가 농촌이라든가 어부의 어촌이라든가 서울시민, 부산시민의 생활을 기록했습니다.


1965년이 되어, 1년 뒤입니다만, 서울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에 격렬히 반대하는 학생데모가 일어났습니다. 부산에서도 대구에서도 조금 일어났었다고 기억합니다만, 그 취재에 약 2개월가량 걸렸습니다.


학생데모때는, 제가 일본인 기자라는 것을 한국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취재하자는 한국의 협력자의 요청에 따라 제 이름을 '김대명'이라고 붙여서, 데모현장에서는 항상 '김형!'이라던가 '김대명!'이라고 불리면서 다녔습니다.

질문)

이번에 전시중인 사진들 중에서 인상 깊었던 사진을 골라 보신다면?

그 당시의 기억을 더듬으며 사진 설명을 하는 구와바라 시세이

4.19혁명 5주년 기념일. 침묵의 학생 데모가 빗속에서 결행되었다.

지금은 장년에 접어든 이들은 한국의 정치, 사회, 문화 등의 영역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다. 서울 종로.1965


이사진은 서울대 학생과 고려대 학생이 함께 비오는 날에 조용한 데모를 하고 있는 것을 제가 촬영한 것입니다. 그 사진은 비교적 한국에서 학력이 높은 사람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다지 학력이 높지 않은, 예를 들어 중졸인 분에게는 그런 조용한 학생데모보다도 이런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때의 사진 쪽이 아무래도 인기가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한일회담 학생데모의 다음엔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이 있었습니다.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이라는 것은 한국 3~4천년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해서, 제가 취재한 것을 '백의의 민족 유사이래 최초의 해외파병'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보도 했었습니다만, 그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취재는 매우 어렵고 힘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국군본부쪽이 협력해주셔서 외국인으로서는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매우 자세하게는 아니지만 기록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 기록한 것이 남아있는 것이 제 사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고려대학교 정문 앞에 데모 진압군이 출동했다. 1965.8.22.

이 사진 때는 굉장히 무서웠네요. 이것은 고려대학교의 캠퍼스인데 학생이... 이거 경찰이 아니에요. 육군. 헌병. 그렇기 때문에 몇 명씩 잡혀가는거에요.

우리 프레스쪽 사람들도 꽤나 무서워서 어딘가에 숨든가 도망쳤습니다. 무서웠네요. 무서운 이유가 '필름을 내놔'라는 게 상황이 생길 수 있으니까요. 취재한 필름을. 이게 가장 무서웠네요. 뺏기면 아무것도 안 남으니까요.

죽은 자에게는 매질하지 않는다. 이승만 대통령 장례행렬. 동대문. 1965

1965년 5월쯤이네요.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하와이에서 돌아가셔서 서울에서 장례가 거행됐을 때 제가 여기 남대문 근처의 그랜드 호텔 옥상에서 찍은 것이에요. 이게 남대문인가요? 서울역이 이쯤에 있지 않을까요? 어딘가에. 이건 제가 체재하고 있을 때의 기록입니다. 하지만 매우, 뭐랄까요, 독재적인 이승만이라고 불렸겠지만 한국에선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누구도 불만을 얘기하지 않는 유교사상이 있는지, 그런 민족성을 제가 느꼈습니다.

전장으로 떠나는 아들에게 귓속말을 하는 노모. 아들은 다시

손을 잡을 수 있었을까. 서울 여의도비행장. 1965

맹호사단에 한발 앞서 해병대 청룡여단이 부산항에서 출발했다.

열차를 타고 항구 안으로 들어가는 병사들. 1965

배트남에서 귀국한 무언의 병사들이 묻힌 묘지가 하나 둘씩 늘어났다.동작동 현충원

질문)

이렇게 인터뷰에 협조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끝으로 앞으로 향후 계획이 있으시다면?

내 나이 77세인데 이제 80이 되면 현역에서 은퇴하려합니다.

미술관 운영에 전념하며 촬영된 원고를 암실에서 전통방식으로

프린트작업을 할 계획입니다. 감사합니다.

구와바라 시세이, 이용하 관장

인터뷰 후 기념사진

구와바라 선생님을 우리의 갤러리에 모시고 작품전 '격동의 한국‘과 세미나를 열게 됨을 무한한 감사와 영광으로 생각하며, 바쁘신 일정에도, 저의 초청에 흔쾌히 응해주시고 격려 해주신 구와바라 시세이 선생님께 존경과 감사를 보냅니다.

[a-one갤러리 관장 이용하-초대의 글 중에서]

구와바라 시세이 (桑原史成, Kuwabara Shisei, 1936~)

약력

1936 일본 시네마 현 츠와노 출생

1960 도쿄 농업대학, 도쿄 사진 전문학교 졸업

1962 일본사진비평가협회 신인상

1965 고단샤 사진상 수상

1971 사진집 ‘미나마타 병(1960~1970)’ 으로 일본사진협회 연도상 수상

1982 이나 노부오상 수상

2002 동강 사진상 수상, 강원도 영월군

2006 사가미하라상 수상

사진전

1962 개인전 ‘미나마타’ 후지포토살롱, 도쿄

1966 개인전 ‘한국 민족 분단의 비극’ 후지포토살롱, 도쿄

1979 개인전 ‘베트남’ 긴자 니콘살롱, 도쿄

1982 2인전 ‘미나마타, 한국, 베트남’ 긴자, 신주쿠,오사카 니콘살롱

1989 ‘한국-격동의 사반세기’ 조선일보미술관, 서울

1994 개인전 ‘병든 대국 러시아’ 긴자, 오사카 니콘살롱, 도쿄

1997 구와바라 시세이 상설전, ‘러시아’ ‘한국’

1998 구와바라 시세이 상설전 ‘베트남’

1999 츠와노 현대 포토 갤러리

(2004년 ‘구와바라 시세이 사진미술관’ 으로 명칭 변경)

1999 ‘치쿠호’ 긴자니콘 살롱, 도쿄

2002 ‘격동의 한국 1964~2001)’ 프레스센터, 서울

2003 ‘임진강 - 내가 본 북한’긴자 니콘 살롱, 도쿄

2008 초대전 ‘내가 본 격동의 한국’ 한미사진미술관, 서울

2009 초대전 ‘내가 본 격동의 한국’ 고은미술관, 부산

아트코리아방송:김진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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