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코리아방송 = 김한정 기자] 밤인가, 낮인가. 먹으로만 그린 수묵화로는 그걸 알아보기 쉽지 않다. 그런데 오른쪽에 절벽처럼 보이는 산등성이 위로 해인지 달인지 알 수 없는 작은 원이 그려져 있다.

신명준 '시령도' 1834년, 종이에 먹

이는 달을 그린 것이다. 어째서 달이라는 것을 금방 단정할 수 있는가. 왼쪽 끝에 보이는 새 한 마리가 힌트다. 이 새는 끼룩끼룩 길게 소리 울면서 배전을 스쳐 서쪽으로 날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 날개는 수레바퀴만하고 검정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은 듯하기도 하다. 

희미한 모습을 보고 그토록 자세하게 말할 수 있는가. 그림에는 물론 그런 묘사를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절벽과 달과 학 그리고 뱃전의 유람객을 조합하면 이들은 모두 한 군데서 나온 것이다. 북송의 정치가이자 대학자인 소식(1036-1101)이 황주에 유배 가서 지은 「후적벽부」에 이런 내용이 다 나온다.(중국에는 적벽이란 곳이 네 곳이 있지만 황주는 삼국지연의의 적벽 대전이 벌어진 곳과는 무관하다. 처음에 소식도 이를 착각해 「전적벽부」를 지었다)


그런 내용이라면 제목은 당연히 <후적벽부도>라고 해야 할 텐데 어째서 <시령도(詩舲圖)>라고 했는가. 시령은 시를 싣고 다니는 작은 배라는 뜻이다. 넓게 풀이하면 배에 가득 실린 시처럼 시를 많이 잘 지으라는 덕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 이는 詩 스승이 詩 제자에게 지어준 자(字)이기도 하다. 당시 스승의 나이는 66세이고 당시 시단에서 최고 명성을 누리던 신위(1769-1845)였다. 제자는 20살 약관의 중인시인 지망생 이학무(미상)이다.
이 그림은 스승이 자를 지어주는 자리에서 축하의 뜻으로 아들(신명준 1803-1842)을 시켜 그려준 것이다. 이때 신위 자신이 <시령도>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림 내용을 「후적벽부」로 정한 것은 아들 신명준의 의사인가. 단연코 그럴 수 없고 신위의 뜻이다.


신위는 1812년에 중국에 갔다. 그곳에서 추사의 소개로 그의 스승인 옹방강(1733-18180)을 만났다. 소식 매니어인 옹방강과의 만남을 통해 그는 새로운 시 세계를 접하게 됐다. 중국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그의 시는 당시 유행하던 개성 중심의 감각적 시풍에 가까웠다. 그런데 옹을 만나면서 소식을 통해 중후하고 격조 높은 두보의 시세계로 나아가게 됐다. 이것이 이른바 유소입두(由蘇入杜)라는 신위의 후기 시세계이다. 그는 자신이 지향하는 시세계를 젊은 제자에게 새삼 강조하기 위한 것이 이 그림이다. 


조선 그림에는 간혹 이렇게 장황한 해설이 있어야 고개가 끄덕여지는 그림들이 있다. 하지만 이 그림은 그 사정을 모르더라도 맑고 담백한 기운이 가득한 한 폭의 산수화인 점은 변함이 없다. 그림을 그린 신명준은 이때 32살이었다. 아직은 조심스러운 필치가  남아있을 때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그는 무관(無官)이었다. 벼슬을 시작한 것은 두 해 뒤로 전옥서 참봉부처 시작해 하급 관직은 전전했다. 나중에 음성현감으로 나갔으나 곧 40살에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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