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택 아트코리아방송 논설고문칭찬합시다 운동본부 총재

청년 신격호는 문학청년(문청) 이었다. 일제 말 고향 울주에서 일본으로 밀항한 것도 소설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젊은 시절 그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품에 빠졌다. 롯테라는 회사명도 베르테르의 연인 샤롯데에서 따와 지었다.

롯데월드타워 앞에 쾨테 동상까지 세울 정도였다. 그는 롯데 브랜드를 만든 것이 내 일생 일대 최고의 선택이라고 했다. 그의 청년 시절은 낭만주의로 채색돼 있지만 23세 때 창업한 후로는 꼼꼼함을 트레이드마크로 달고 다녔다.

“23개 전 계열사에서 생산되는 15.000가지 제품의 특성과 생산자, 소비자 가격을 다 알고 있다.”고 말한 적도 있다. 롯데호텔을 지을 땐 세계 유명 호텔을 다 다녀본 뒤 카펫과 벽지 색깔까지 지정할 만큼 일일이 다 챙겼다. 백화점에 나가면 매장 진열 상태부터 나사못 하나까지 지적해 임직원들 혼쭐을 빼놓기 일쑤였다.

기업이란 말을 좋아해 야구 구단 이름도 자이언츠로 지었지만 경영 스타일은 한없이 세심했다. 그는 일본에서 번 돈을 외교행낭에 숨겨 들여와 46세 때 한국에 롯데제과를 세웠다. 고국 진출 당시 신문 광고까지 내고 조국을 장시간 떠나 있었던 관계로 서툰 점도 허다할 줄 생각된다.’면서도 성심성의를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약속을 투자로 실행됐다. 호텔, 백화점, 음료, 레저업에 속속 투자하며 롯데를 5대 그룹으로 키웠다. 그 마지막 결정체가 123층짜리 서울의 랜드마크 롯데월드타워였다.

디자인을 23번이나 바꿔가며 입지에서 설계, 시공까지 직접 챙겼고, 완공 후엔 한동안 49층 레지던스에서 말년을 보냈다. 경영인으로서 그의 원점은 일본이었다. 한국 진출 이후 40여 년간 홀수 달은 한국, 짝수 달은 일본을 오가는 셔틀 경영을 계속했다.

일본에서 축적한 자본과 경영 노하우를 가져왔지만 한국에서 더 큰 경영 성과를 거두었다. 한국롯데를 매출 기준으로 일본롯데의 20, 종업원은 30배로 키웠다. 그는 한국에서 번 돈은 모두 한국에 재투자하겠다 약속했고 평생 지켰다.

1세대 창업가인 신 명예회장은 맨손으로 국내 그룹 재계 5위 롯데그룹을 일궈냈다. ‘대한 해협의 경영자등의 별칭을 얻었다. 일본에서 사업가로 성공하자 귀화하라는 권유도 빈번했지만 한국 국적을 바꾸지 않았다.

1942년 단돈 83앤을 들고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자산규모 115조 원으로 키웠다. 불호령과 꼼꼼함으로 직원을 떨게 했지만, 댐 건설로 수몰돼 사라진 고향(울산 신기리) 주민들을 위해 43년간 매년 5월 첫째 일요일 위로잔치를 열기도 한 인간미 넘치는 재계의 거인이었다.

신격호 명예회장은 1921104일 영산 신지 접성촌인 울산시 울주군 삼통면 둔기리에서 신진수(1973년 작고)씨의 5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신 회장은 한 인터뷰에서 “73가구가 모여 사는 마을에서 세 번째 부자였지만 논 열다섯 마지기(1마지기는 약 200)에서 나온 것을 식구들이 먹고 나면 조금 남는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10~20km에 달하는 거리를 걸어 통학하는 열정을 보였지만,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다. 숙부의 도움으로 2년제 농업보습학교를 졸업한 그는 일본으로 건너간 뒤 신문, 우유 배달을 하며 와세다 고등 공업학교 화학과를 마쳤다.

고객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신의성실과 특유의 꼼꼼함은 이때부터 빛을 발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우유 배달시간이 정확했다. 입소문이 나 몰려드는 주문에 배달시간을 맞추기 어렵자 직접 아르바이트를 고용했다.

아르바이트가 아르바이트를 고용한 것이다. 1921년생 신회장이 영면했다. 이병철(1910년생), 정주영(1915년생)에 이어 1세대 기업인 최후의 생존자였다. 기업의 목표는 이윤극대화라 하지만 우리 1세대 창업주들은 기업 보국 정신으로 무장한 산업 전사들이었다.

애국심을 기반으로 국가가 필요로 하는 사업에 뛰어들어 성장의 기회를 찾았다!

 
저작권자 © 아트코리아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