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딸만 일곱 출산한 어느 한(恨) 많은 여인의 실존 이야기
- 남편과의 합방으로 얻은 귀한 아들, 반듯한 효자로 가문 대(代) 이어
- 호주상속제, 남아선호(男兒選好) 풍습이 남존여비(男尊女卑) 부추겨

아트코리아방송 야생화전문위원 및 칼럼니스트

아들을 낳지 못하면 쫓겨나는 세상에서 딸만 내리 일곱을 낳고 나이 들어 출산능력을 잃게 되자 대리모를 물색하여 대(代)를 잇게 한 훌륭한 여인이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서나 볼 수 있음 직한 현대판 씨받이 사연은 46년 전 녹차로 많이 알려진 보성의 어느 한 시골 마을에서 있었다. 이름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열아홉 나이에 이웃 면(面)에서 공직으로 있던 000씨 문중의 청년과 결혼하게 된다. 결혼 이듬해 첫 딸을 낳았다. 흔히 ‘첫 딸은 살림의 밑천’이라 했는데 가부장 제도에서 아들이 아닌 딸을 낳은 사람을 위로하는 말이었지 첫딸이 무슨 살림의 밑천이 되었을까.


둘째, 셋째, 넷째에 이어 다섯, 여섯, 일곱째까지 딸만 줄줄이 일곱을 낳고 보니 아들을 낳지 못한 죄스러운 마음은 시부모님과 남편을 대할 면목이 없었을 것이다. 여자가 아들을 낳지 못한 게 왜, 여자만의 책임이란 말인가.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그 시대의 사회통념은 그렇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었다. 요즘은 전문의 진단으로 성별을 구별할 수 있어 원하는 자식을 출산할 수 있다. 나이 들어 출산능력이 없어진 걸 알게 된 여인이 염려했던 건 여자가 아들을 낳지 못하면 쫓겨나는 칠거지악(七去之惡)을 두려워했던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들을 낳지 못해 대를 잇지 못한 책임이 자기에게 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했을 것이다. 눈앞에서 우글거리는 딸자식들을 볼 때마다 한숨만 터져 나오고 어미가 딸에게 주는 모정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천덕꾸러기가 되었던 일곱 딸들은 날마다 눈칫밥을 먹으면서도 잘 자라 줬다.

아들을 출산하지 못하여 마음고생이 심하던 어느 날 저녁참, 남편 잃고 보따리 장사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가던 친구가 찾아왔다. 그 친구는 결혼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로 결혼 후 한마을에서 함께 살았으나 남편을 일찍 잃어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친구는 생필품을 머리에 이고 다니며 농산물을 물물교환 형식으로 장사하여 생계를 이어가고 있던 처지였다. 친구의 집은 산을 넘어야 하는 먼 곳에 떨어져 있어 해가 저물어 돌아갈 수 없을 때는 가끔 친구와 함께 자면서 세상사는 얘기를 나누며 밤을 보내기도 했다. 어느 날 밤 친구에게 “어야, 나 아들 하나만 낳아 주소” 몇 번씩 꺼내려다 말문이 닫혀 못한 말이다. “무슨 소리야? 안 들은 것으로 할게” 친구 남편과 동침하라니 얼마나 황당한 말인가. 그것도 친구가 살아 옆에 있는데 말이다. 한동안 발길이 뜸하던 친구가 다시 찾아들었다. 친구가 들릴 때마다 아들을 낳아달라고 부탁하게 되었던 건 친구도 나이 들어 임신할 능력이 없을 때를 걱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느 날 밤 남편 방으로 들어가도록 간절히 애원했을 때 친구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을 뿐 말이 없었다고 한다. 그동안 친구의 여러 차례에 걸친 간절한 부탁으로 합방을 결심하고 다시 찾았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친구가 옆에 있는데 친구의 남편과의 합방이 가능했던 걸 이 시대의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는 친구를 뒤로하고 안방으로 들어가 남편에게 친구가 들어올 것이라 전해주고 돌아와 친구의 두 손을 꼭 잡았다. “고맙네. 친구야” 그동안 남편과 친구를 설득하여 합방이 이루어지기까지 아들을 낳지 못한 여인의 정신적인 고통이 얼마인가를 알 수 있다.

합방 후 한동안 발을 뚝 끊었던 친구는 탯줄이 채 마르지 않은 핏덩이를 보자기에 싸 친구에게 안겨주며, “잘 키우시게 아들이네” 한마디를 남기고 돌아간 친구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배냇저고리 위에는 아기가 태어난 날짜와 시가 적힌 쪽지가 있었는데 손꼽아보니 남편과 합방했던 달과 맞아떨어졌다. 출산 후 몸도 풀지 못하고 부석부석한 얼굴로 아기를 안고 찾아온 친구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아들을 낳지 못한 책임이 여자에게 있고 그 책임을 받아들여야 했던 여인들의 삶은 조선 시대뿐 아니라 유교문화권에서 있었던 남존여비의 사상에서나 볼 수 있을 것이다. 여자들은 아이 낳고, 밥 짓고, 빨래나 하는 세상이 조선 시대 여성의 삶 전부였다. 그 시대 우리 어머니들은 아들을 출산하지 못하면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는 반인륜적인 올가미가 씌워져 있어 쫓겨나는 처지가 되기도 했다. 당시 씨받이 문화는 가난한 여성이 돈을 목적으로 아기를 낳아 주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 경우는 친구의 간절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이루어진 순수한 친구 애(愛)인 것이다. 아들을 낳아 준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 시대 가부장제(家父長制)에서 남자의 위치는 가계(家系)를 이어가는 호주상속제가 남아선호(男兒選好) 문화를 부추겼다고 볼 수 있다. 남자의 호주상속 제도를 고집했던 유림도 시대의 흐름에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호적법 개정으로 호주상속제가 폐지되었고 여성도 호주가 될 수 있도록 제도가 개편되었다. 남자와 여자의 권리가 평등한 사회에서 ’씨받이‘ 문화는 이제 역사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아들을 얻으려는 여인의 소원에 하늘도 감동하는 듯하다. 친구의 도움으로 얻을 수 있었던 귀한 아들이었기에 말이다. 유난히도 꽃을 좋아하셨던 할머니는 이제 86세 노환으로 누워 계신다는 소식이 들어온다. 보자기에 덮여 들어왔던 핏덩이는 46세의 장년이 되어 어머니에게 자식의 도리를 다하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 가문의 대를 이으려 애쓰셨던 할머니의 훌륭한 뜻은 오래오래 후손에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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