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천 – 움직이는 이미지 속에서 살아가기

글 윤원화

한 세기 전 에디슨이 영화 카메라와 뷰어를 발명했을 때, 그는 움직이는 이미지를 자동 판매기 같은 기계에 동전을 넣으면 몇 분간 작은 구멍 너머로 반짝이다 사라지는 하찮은 볼거리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필름에서 디지털 매체에 이르는 기술적 변천 속에서, 영상은 폭발적으로 진화하여 오락과 예술을 넘어 사람들이 상호작용하고 정보를 주고받는 사회적 환경의 기본 양식으로 자리잡았다. 단순히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보는 것뿐만 아니라, 스마트폰 화면을 스크롤해서 뉴스를 읽고, 화상 통화를 하고, 네비게이션 화면을 보면서 운전을 하고, 게임 속 몬스터와 함께 사진을 찍는 것까지 무빙 이미지의 경험이라고 한다면, 오늘날 그것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다르면서 놀라울 정도로 평범하게 일상 속에 스며들었다.

지난 세기에 영화가 움직이는 이미지의 형태로 살아 있는 세계를 포착하려고 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이제는 우리 자신을 포함한 세계 전체가 이미 언제나 디지털 데이터로 매개되는 이미지의 운동 속에 휩쓸려 있는 듯하다. 김희천은 이렇게 출렁이는 세계를 탐사하면서 그 기록을 일련의 비디오 작업으로 재구성해 왔다. 사적인 비디오 다이어리처럼 시작된 그의 작업은, 이미지 제작자인 동시에 다중적인 이미지 데이터로서 새로운 사회적 삶을 살게 된 작가 자신의 경험이 피드백 되면서 빠르게 전개되고 있다. 그는 데이터의 흐름에 의해 꿰뚫리고 연장되어 서로 뒤얽힌 사람들과 시청각적 이미지들의 복합체를 비디오 설치로 재구성하여,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새의 시점으로 내려다보는 듯하면서 동시에 그 세계 속으로 더욱 낯설고 깊이 굴러 떨어지는 양가적인 운동을 발생시킨다.

김희천, «탱크» 전시 전경, 2019, 아트선재센터, 사진: 김연제

2017년 두산갤러리에서의 전시 《Home》이 미디어 이미지와 이질적인 기억들로 침식된 도시를 마치 귀신 들린 집처럼 보여주었다면, 서울에서 2년만에 열린 개인전 《탱크》가 불러내는 것은 일종의 귀신 들린 신체다. 움직이는 신체들이 끊임없이 기록되면서 데이터를 생산하고, 그 데이터가 신체를 둘러싼 환경과 심지어 신체 자체를 대체하는 곳에서, 신체에서 파생된 이미지들은 현실과 가상, 자기와 타인이 갈라지고 다시 만나기를 반복하며 끊임없이 재배치되는 거울의 미궁을 이룬다. 그 속에서 자기는 언제 어디에 있으며 대체 어디까지가 자기일까? 그것은 어떻게 자기에 갇히거나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고 움직일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사고 실험으로서, <탱크>는 누구의 것이라고 특정할 수 없는 이미지와 목소리를 교차시키며 그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시간의 갈래들을 따라간다.

전시장에 설치된 스크린은 이중의 어둠 속에 침잠해 있다. 관객은 암흑 속을 더듬더듬 걸어 들어가야 스크린과 마주할 수 있지만, 스크린 위에 영사되는 것도 대부분 어둠 속의 이미지다. 종잡을 수 없는 빛, 간헐적인 폭발 또는 충돌음 같은 것이 간간히 터져 나오는 가운데, 캄캄한 물 속을 헤엄치는 듯이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가끔 두 손이 시야에 들어올 뿐인 상태가 반복된다. 작가의 목소리로 삽입된 일인칭 내레이션은, 이것이 수중 동굴에서 사고를 당한 다이버의 시체를 수습하기 위해 사고 순간까지 계속된 그의 비디오 기록을 바탕으로 부유 탱크에서 잠수 시뮬레이션 훈련을 시작한 자기의 기록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화자가 누구이며 언제 어디서 이야기하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김희천, «탱크» 전시 전경, 2019, 아트선재센터, 사진: 김연제

여기서 그는 직업 다이버처럼 말하고 있으나, 다른 곳에서는 카메라맨으로서 케이팝 댄스를 연마하는 아마추어 댄서들을 촬영하며 신체와 자기의 연결을 끊으려는 그들의 판타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언뜻 보면 서로 무관한 것 같지만 댄서 에피소드는 다이버 에피소드의 주제를 상반된 방식으로 변주한다. 댄서와 다이버는 모두 신체라는 기계와 그것을 운전하는 정신을 분리하고 후자를 타인의 운동 기록으로 대체한다. 그러나 댄서의 경우, 그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자기가 누구이며 언제 어디에 있는지 계속 확인하면서 일관성을 유지하려는 내면의 기록 관리자 기능을 잠시 끄고 자기를 신체 바깥으로 탈출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댄서는 문자 그대로 춤추는 기계가 되어 새로운 신체 이미지들을 생성하고 그 이미지에 자기를 실어 날려 보낸다. 여기서 자기는 통제의 주체로서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해방의 대행자들로 분산된다. 다시 말해 나는 내가 아닌 것들의 도움으로 내가 아닌 것이 되어 내가 알지 못하는 시간과 공간들로 흩어진다.

반면 다이버의 세계에서 신체와 자기의 단절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다이버는 감각이 무용해지는 가혹한 환경에서도 신체에 대한 통제력을 잃지 않고 전임자가 신체를 분실한 지점까지 내려가서 그것을 되찾아 오기 위해 훈련하고 있지만, 신체에 대한 강박은 검은 물 속에서 실종자의 수를 늘릴 뿐이다. 과거의 신체가 남긴 기록을 현재의 신체로 재생하여 미래의 신체를 더욱 완벽하게 조작하려는 시도는 각자의 자기에 집착하는 다중적인 신체 이미지들을 통제 불능으로 확산시킨다. 이것은 일종의 잠수함 운전사로서 다이버에게 치명적인 일로 밝혀진다. 마지막 잠수 장면에서, 다이버는 어둠 속에서 조그만 빛의 얼룩을 보고 그것을 향해 다가간다. 가까워질수록 그것은 모습을 바꾸어, 멀리서 빛나는 별들 같다가, 부패한 시체의 얼룩진 피부 같다가, 바로 눈앞에서야 빛이 반사된 바위로 드러나고 다이버는 그것과 충돌한다.

김희천, <탱크> 스틸 이미지, 영상 설치, 스테레오, 컬러, 41분, 2019, 작가 제공

붉게 물든 화면은 다이버의 시간이 여기서 끝났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재현이 현실의 새로운 토대가 된 세계에서 죽음이란 계속 반복되고 변조될 수 있는 루틴의 종점에 지나지 않는다. 또는 그저, 실종된 다이버의 궤적은 또 다른 수색 다이버에 의해 반복될 것이다. 이러한 반복으로부터 무엇이 산출될 수 있으며 어떤 의외의 동선이 그려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김희천의 비디오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의 카메라는 스스로도 잘 알지 못하는 어떤 출구를 찾아 어딘가 구멍난 곳을 응시하고 그 속으로 뛰어들어 길을 잃고 떠돌기를 되풀이한다. 거듭되는 탈출의 시도 속에서 작가 자신의 이미지와 목소리와 기억은 계속 조각나고 불어나서 점점 더 이질적인 판본으로 재구성된다.

김희천, «탱크» 전시 전경, 2019, 아트선재센터, 사진: 김연제

작가의 나르시시즘적 변형태이자 실패한 탈출의 시도가 남긴 부산물로서, 이렇게 증식한 자기들은 김희천의 근작들에서 적극적으로 자기 아닌 것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것은 스크린 바깥에서 자기가 아닌 인물들을 촬영하는 것, 자기가 아닌 카메라가 되는 것일 수도 있고, 스크린 위에서 자기가 아닌 인물로 재구성되는 것, 자기가 아닌 이미지 또는 목소리가 되는 것일 수도 있다. <탱크>는 전작들에서 일부 실험된 이런 방법들을 총동원하여 자기 아닌 것들로 이루어진 소우주를 가설한다. 그것은 보여주고 본다는 것이 자기와 그 바깥을 합선시키는 촉각적 상호작용이 된 세계를 가로지르며, 온전한 자기에 대한 집착과 자기를 돌파하려는 충동 사이에서 분해되고 재합성된 자기들의 풍경을 어둠 속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만화경처럼 펼쳐 놓는다.

그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전시장은 도입부에 장황하게 설명되는 부유 탱크처럼 외부 감각을 차단하여 관객이 자신의 신체를 망각하도록 유도한다. 전통적인 영화관에서도 신체는 어둠 속에 숨겨지지만, 그것은 무엇이든 볼 수 있는 전능한 눈이 되기 위한 대가이다. 반면 김희천의 <탱크>에서 관객은 신체 없는 빈칸이 되어 마찬가지로 각자의 신체와 유리된 빈칸들의 운동과 직면한다. 그것은 작가의 조작되고 합성된 이미지, 본인은 이미 빠져나가고 없는 빈칸들로 이루어진 일종의 훈련 프로그램으로서, 미디어로 포화된 세계에서 살아가려면 신체의 자리를 채우려는 충동에 굴복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빈칸을 이용해서 움직여 나가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그 메시지는 발신자를 식별할 수 없는 것으로서 마지막까지 픽션으로 남는다.

김희천, <탱크> 스틸 이미지, 영상 설치, 스테레오, 컬러, 41분, 2019, 작가 제공

김희천의 비디오 작업이 지금의 세계를 리얼하게 포착한다면, 그것은 삶이 곧 영화가 되기를 꿈꾸었던 지난 세기의 판타지가 예상치 못하게 실현된 세계, 여전히 그 작동 방식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미지의 픽션 생성기로서 현실을 비춰 보인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새로운 기술과 오래된 신체, 당연해 보이지만 의외로 근래에 만들어진 문화적 관습들과 부조리해 보이지만 실은 뿌리 깊은 심리적 충동들 사이에서 불안정하게 재배치되는 세계는 끊임없이 새로운 모멘텀을 꿈꾸고 그 꿈에서 깨기를 반복한다. 김희천은 그 내부에서 세계를 관찰하고 모방하며 허점을 노린다. 그의 작업의 근간에는 꿈에서 깨야 한다거나 꿈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기보다 일단 이 꿈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야겠다는 단순한 의구심이 있으며, 그것이 그를 미래의 꿈을 파는 상인들과 구별 짓는다.


윤원화
시각문화 연구자. 저서로 『그림 창문 거울: 미술 전시장의 사진들』, 『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 등이 있다. <다음 문장을 읽으시오>(일민미술관, 2014)를 공동 기획했고,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2018에서 <부드러운 지점들>을 공동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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