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코리아방송 = 김한정 기자]  종로구 율곡로에 위치한 아트비트갤러리에서는 2019. 11. 27 ~ 2019. 12. 10일까지 Placescape - 김봄展이 열릴 예정이다.

Placescape - 김봄展

공간에 대한 자리매김
이선영(미술평론가)


김봄의 ‘Placescape’ 전은 장소와 풍경이라는 두 개념어가 복합되어 있다. 장소와 풍경은 비슷한 의미 같지만, 둘을 나란히 놓고 보자면 차이가 난다. 풍경은 장소로부터 일정 거리를 둔 것이다. 장소는 내가 속한 보다 가까운 곳이고 풍경은 내 시야에 들어오는 공간이다. 풍경은 보다 많은 것들을 담지만 그 구성요소들은 크기가 작고 추상적이다. 전시된 작품들은 원근법적 풍경부터 위성사진으로 포착된 지도까지를 포괄한다. 한편 장소는 나와 친밀한 곳이며 이곳에서의 사물은 보다 크고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장소에서의 사물은 독특한 배치와 각도 등이 가능하다. 지도에 기반한 작품이 전시된 1층과 달리, 2층 전시 작품들의 경우, 바로 앞에서 본 듯한 장소도 꽤 많이 등장한다. 여기에서의 장소는 공간적 지각만큼이나 시간적 기억을 포함한다. 그것은 일종의 심상 지도(mental map)이다. 조너선 스미스는 [자리잡기 to take place]에서 경관 내에서 의미의 위치와 정보를 어떻게 지각하는지를 다룰 때 심상 지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Placescape - 김봄展

심상 지도는 단순한 물리적 위치나 환경을 넘어서, 주관적인 감정이 깊이 개입되는 의미깊은 자리들이 포진해 있다. 김봄의 작품에는 이러한 지각과 기억들이 표시되곤 한다. 자리를 ‘특별히 지정함으로서 기억되고, 기억을 일으키며 기억 속에서 영속화되는 것’(조너선 스미스)이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10여 년 전부터 그려온 지도를 바탕으로 하는 작업과 지도 내부를 여행한 결과물을 담았다. ‘Placescape’라는 복합어처럼 양자는 구별되지 않는다. 장소와 풍경은 안과 밖 같은 관계로, 안팎은 연동된다.

Placescape - 김봄展

어떤 대상, 사람, 장소 등은 가까이서, 그리고 멀리서 봐야 그 진면목을 알 수 있다. 첫인상은 강력한 것이지만, 좋은 의미든 아니든 지속적으로 수정될 기회를 가진다. 작가가 전공한 동양화나 소재로 삼은 고지도 등은 여러 시점이 담겨 있다. 이러한 복합적 풍경에는 보이는 것과 아는 것, 중요한 상징 등이 한데 녹아있다. 비록 현대의 추상적 시공간은 이러한 다차원성을 억제하고, 모든 것을 동일한 코드로 환원시키려 하지만 말이다.

Placescape - 김봄展

추상적인 체계로부터의 탈주에서 예술의 역할은 크다. 예술 자체가 코드로부터의 탈주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세계시로 통일되었듯이, 현대인은 위도와 경도라는 좌표축으로 나뉘어진 하나의 지도만을 알고 있다. 통일은 생산적이다. 다만 그 생산력이 인간과 자연을 위한 방향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예술가 또는 예술가적인 사람은 늘 다른 시공간을 꿈꾼다. 작품의 면면에서 세계 곳곳에 수많은 발자국을 남겼을 김봄은 어딘가 도착하면 먼저 높은 데로 올라간다고 한다. 그리고 지도를 보면서 이동한다.

Placescape - 김봄展

전시장 1층의 작품들이 거시적인 시공간이라면 2층은 풍경 내부로 침투해서 여러장소들과 만난 경험이 표현되어 있다. 물론 여기에서도 1층의 고지도에서 현대적 지도에 이르는 풍경들처럼 여러 시공간대가 반영된다. 시점의 변화 없이 그대로 본 풍경도 있다. 바람에 흩날리는 여러 종류의 나무들 16개 정도를 정사각형 캔버스에 담은 시리즈 작품 [The place where the wind blows]은 바람결에 따라 잎새 모양이 고정된 듯한 나무들이다.

그것들은 줄기는 안 보이고 잎만 포착되어 있다. 부분으로 잘려진 대상은 확대된 평면으로 다가온다. 이 시리즈는 마치 리좀처럼 붙은 단위들이 다양한 녹색의 계열로 칠해져 있다. 하나의 개체지만 작가가 여러 시간대 여러 장소에서 만난 초록 생명체들에 대한 인상을 모아놓은 듯하다. 나무지만 리좀처럼 부분적 요소들이 자유롭게 엉겨 있는 모습이 여러 장소에서의 미시적 탐사과정을 떠올린다. 책을 복제하기보다는 지도를 그리면서 나아가길 권하는 철학자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천개의 고원]에서 식물들의 지혜를 전한다. 저자들에 의하면, 식물들은 뿌리를 갖고 있을지라도 언제나 어떤 바깥을 가지며 거기서 식물들은 항상 다른 어떤 것, 예컨대 바람, 동물, 사람과 더불어 리좀 관계를 이룬다. 리좀은 어떤 지점이건 다른 어떤 지점과도 연결 접속될 수 있고 되어야 함을 말한다. 리좀은 하나의 질서를 고정시키는 점이 아니라 선이다.

Placescape - 김봄展

들뢰즈와 가타리에 의하면 하나의 리좀은 어떤 곳에서든 끊어지거나 깨질 수 있으며, 자신의 특정한 선들을 따라 혹은 다른 새로운 선들을 따라 복구된다. 물론 리좀과 나무가 전혀 반대되는 것은 아니다. 김봄이 그린 것은 리좀처럼 보이는 나무의 일부이다. 리좀 안에는 나무 구조나 뿌리 구조가 있다. 하지만 역으로 나무의 가지나 뿌리의 갈래가 리좀으로 발아할 수도 있다. 김봄의 작품에서 풍경을 담기에는 그다지 적절하지 않은 정사각형 프레임은 소우주의 느낌을 준다. 그러나 고립된 자족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작가가 세계 속에서 만난 식물들 수만큼이나 열려있는 시리즈 작업의 구성적 단위로 다가온다. 사방위로 확장성이 있는 정사각형 캔버스들은 언제든지 덧붙여지고 재배치될 수 있다. 초록의 다양한 계열과 다양한 수종을 근접 포착한 평면적 작품들은 그 자체로 미시적 우주를 담은 또 다른 지도가 된다. 낯선 여행지에서 만난 기이한 대상들과 기억들이 흩뿌려져 있는 장소에는 나무, 토끼, 여우 같은 도상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Placescape - 김봄展

장소와 풍경은 일종의 무대 세트가 되고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작품 [Pinnacles]는 화면 전체가 일정한 밀도를 유지한 뾰족한 산봉우리 모양의 암석들로 채워져 있다. 돌과 산은 규모만 다를 뿐 같은 질을 가진다. 그 작품은 여행자의 발바닥을 괴롭혔을 돌길이 있는 장소와 산이 있는 풍경 모두를 암시할 수 있는 융통성을 가진다. 사이사이에 나무, 집, 동물, 자동차, 아주 작게 사람도 배치된다. 시각적 관습상, 작은 것은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작품 [Red roofs]에서는 붉은 계열의 색조로 칠해진 지붕들이 마치 어떤 거대한 힘에 떠밀려온 물건들 같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 캔버스에 아크릴로 그린 그림들은 멀고 오래된 기억도 생생하게 현재화 한다. 초창기 작업에서는 사진을 붙이기도 했는데, 그것은 김봄의 작품이 기본적으로 시공간을 꼴라주하는 방식임을 알려준다. 여러 곳을 다니면서 사진과 영상을 찍고 이를 다시 편집하는 과정은 영화를 제작하는 것처럼 시공간의 편집하는 과정과 비슷할 것이다.

Placescape - 김봄展

공간예술인 그림에 이러한 시간적 과정을 담기 위해서는 설득력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지금은 주로 캔버스에 아크릴로 작업하지만, 동양화를 전공했던 김봄의 경우에는 여백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도나 풍경 등에 넉넉하게 배치된 여백은 시공간의 단층들이 주는 충격을 상쇄하는 장이 되기 때문이다. 여백처럼 하얗게 나오는 부분은 젯소 칠만 된 부분으로 여러 시공간이 중첩될 수 있는 유동적인 바탕이다. 지도를 바탕으로 한 1층의 작품 또한 구별되는 차원의 조율이 있다. 고지도를 바탕으로 한 작품은 유기적인 선의 흐름이 위성사진을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길도 건물도 직선적이다. 놀랍게도 지금의 지형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고지도의 풍경은 삶의 터전을 감싸 안고 있는 포근한 분위기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신화든 전설이든 민담이든 서사가 생겨날 것 같다. 현대적 지도가 장소를 잘게 자른 듯한 느낌이라면, 고지도는 보는 이의 자리도 염두에 두는 상징적 우주로서의 면모가 있다.

Placescape - 김봄展

지도는 개념이면서도 하나의 그림이다. 개념이든 그림이든 실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지도의 경우에는 사물과 유사한 기호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사진처럼 지시대상과의 관련을 가진다. 기호학자 안느 에노에 의하면, 최초의 이미지 기호학은 이미지를 그것이 표현한 것과 흡사한 유사물(analogon)이다. 그 예로는 도로 표지판과 지도, 도면 등이 있다. 그러나 대상과 기호는 점차 분리된다. 미셀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현실과 긴밀했던 언어의 위상이 변화함을 추적한 바 있다. 미셀 푸코는 역사를 인식론적으로 다시 보면서, 16세기 말까지 유사성(resemblance)은 지식을 구성하는 역할을 했다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땅은 하늘을 반영했고 사람의 얼굴에는 창공의 별이 반영되어. 회화는 공간의 모방이었다. 즉 이전 시대에 현실의 언어는 독립된 기호들의 총체가 아니었다. 언어는 세계 내에 고정되어 있었으며 세계의 일부를 형성했고, 이때의 언어는 사물들과 유사했다.

한 사물의 이름은 그 이름이 지시하는 사물 속에 저장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르주 장이 [기호의 언어]에서 썼듯이, 이전 시대에는 지도도 그림지도였다. 이후에는 추상적 기호로 가득한 도표로 바뀌게 된다. 미셀 푸코는 말과 사물이 유사의 관계로 얽혀있었던 시대가 바벨탑과 함께 무너졌다고 본다. 언어의 첫 번째 존재 이유였던 사물과의 근원적 유사성을 상실하자마자 제 언어는 분화되었고 서로 양립할 수 없게 되었다. 기호가 자율성을 획득한 것은 발전일수도 있지만, 바벨탑의 신화는 그것을 인간에 대한 형벌로 평가한다. 김봄이 이 전시에서 활용하는 고지도와 현대적 지도는 세계와의 관련 속에 있던 기호/언어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보여준다. 작품 [통영 1]은 고지도 형식 속에 산과 마을이 보이는데, 기와집들은 보는 방향이 여럿이다. 가장자리에는 고층 빌딩들이 서 있다. 현대적 장면은 지도 보다는 멀리서 본 풍경에 가깝다. 이러한 이중적 비전은 어떤 도시든 개발 시기의 차이에 의해 구도심/신도심으로 나뉘는 상황을 반영하기도 한다.


작품 [통영 2]는 구글 지도로 본 통영의 풍경으로, 녹지와 시내, 현대적 항구가 구별된다. 작품 [In the air 1]는 항구에 줄지어 배열한 컨테이너가 마치 아파트촌 같기도 하다. 반듯반듯한 접안 시설 주변의 컨테이너 선적 배는 위에서 본 모습이다. 이전 시대의 지도에서 바다 괴물이 그려져 있곤 하던 미지의 장소는 육지와 대조되는 산뜻한 블루로 칠해졌다. 작품 [마포]는 반은 지도 반은 풍경이다. 반듯한 길 사이에 이전의 쓰레기 산(난지도)을 인공적 녹지로 개발한 지역도 보인다. 구글 지도 또한 현실을 반영하는 현실과 유사한 기호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추상적인 공간으로 잘게 나누어진 현실을 재현하는 것에 불과하다. 어디선가 추상적으로 주어진 좌표축 속의 공간에서 하나의 점이 될 수 있을 따름이다. 김봄의 작업은 ‘추상적인 공간(abstract space)’으로 모든 것이 자리매김 되는 현대에 ‘의미로 가득 찬 구체적인 자리(concret place)’(조너선 스미스)를 생성하기 위한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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