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코리아방송 = 김한정 기자] 김지수 작가의 작업은 작가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서재에서 맡았던 오래된 책 냄새의 기억으로부터 출발한다. 오래된 책들이 쌓여 발산하는 냄새와 아버지의 냄새가 뒤섞여 그 안에서 작가는 많은 상상을 할 수 있었다. 이처럼 진하고 농후한 경험으로부터 작가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예민한 후각을 사용하여 대부분의 경험들을 기억하게 된다.

김지수 개인전 '풀 풀 풀-향'

이번 전시는 후각이 예민한 작가의 근원을 묻는 <유전감각>과 작업실에 불이 났던 경험을 바탕으로 제작한 <냄새나무> 드로잉 시리즈 그리고 아버지가 실제로 사용한 낡은 서류 가방과 이끼로 작업한 설치작품 <아버지와 나> 등을 선보인다.
 

김지수 개인전 '풀 풀 풀-향'

<유전감각>은 가족의 체취를 채집하여 작은 유리병에 넣고 가까이 갔을 때 관객이 이 냄새를 맡을 수 있도록 설치한 작업이다. 작가는 체취를 맡았을 때 떠오르는 인상을 시구로 옮겨 적는데 ‘태초의 이끼로 뒤덮인 숲에서 방금 걸어 나온듯한 체취’, ‘날씨에 따라 달라지는 마음의 냄새’, ‘일만 년 된 원고지와 원고지 사이에 흐르는 공기의 깊고 넓은 냄새’, ‘새하얀 노트에 고급잉크로 써내려간 시의 냄새’ 등이 그것이다. 작가는 직접 조향한 향을 전시장 전체에 퍼지게 하고 이를 ‘겹겹이 퇴적된 동굴 속의 빛을 타고 흘러나오는 냄새’로 명명한다. <냄새나무>는 작업실에 불이 났던 사고를 계기로 무언가 탔을 때 나는 냄새, 그을림 등의 강렬한 기억을 바탕으로 제작한 작업이다.
 

김지수 개인전 '풀 풀 풀-향'

 

김지수 개인전 '풀 풀 풀-향'


전시 서문 중
김지수 작가는 냄새 분자들의 운동을 엔트로피(Entropie)로 이해한다. 동물과 사람과 식물의 흔적이 향기의 숲을 이루고 자연과 사회, 역사, 숲과 인간의 생(生)이 교차하는 사건, 세계를 인간의 후각, 냄새로 기록하고 표현한다. 이번 전시는 가족의 체취를 채집한 <유전감각> 설치작업과 <냄새나무> 드로잉을 통해 예측할 수 없는 향의 운동을 은유하는 작업을 선보인다. 사방으로 솟아오르고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햇빛과 물과 공기가 만나는 생명력이 넘치는 모습이다. 그것은 식물이기도 하고 동물이기도 하며 인간의 정신이기도 하다.
김노암(아트스페이스 휴 디렉터)

김지수 개인전 '풀 풀 풀-향'

작가노트
나는 감각이 많이 발달되어 있다. 그 중에서 후각이 특히 발달하여 어린 시절 형제들 사이에서 별명이 ‘개코’였다. 우리 몸에는 400개가 넘는 후각 수용체가 있는데 그 중에서 개인마다 활성화의 정도에 따라 냄새의 민감도가 다르다고 한다. 후각 수용체가 발달한 나는 주로 ‘후각적 상상력’에 관심이 많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특별한 냄새는 역사학자인 ‘아버지의 서재’ 냄새, 그리고 그가 정원에서 나무를 손질할 때 쓰던 오래된 가위의 손잡이 냄새이다. 아버지의 서재에서는 오래된 책 냄새와 아버지의 체취가 섞여 묘한 향이 났고, 나는 가끔 서재에 혼자 들어가 책을 보거나 상상하길 즐기며 그 냄새공간을 점유했다. 이러한 아버지의 ‘서재’와 ‘정원’은 나의 작업에 있어서 영감의 원천이자 <유전감각>의 출발지이다.

김지수 개인전 '풀 풀 풀-향'

 
오래 전 식물학 전공자와 융합 프로젝트를 할 때 식물 실험실에 처음 들어선 순간의 냄새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다양한 크기와 종류의 초록 식물들이 있었는데, 식물 고유의 냄새와 다른 화학약품 냄새가 섞여 그곳만의 독특한 향이 났다. 이때 식물의 다양한 냄새를 맡았던 기억에서 영감을 얻어 식물추출물을 활용하여 식물과 사람이 ‘냄새’로 교감하는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올해 5월에는 우연히 퍼포먼스 워크샵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나의 퍼포먼스 차례에 자연스럽게 손, 정수리, 목, 발 등의 신체의 냄새를 맡는 퍼포먼스를 하게 되었다. 그때 퍼포먼스 상대의 체취를 언어로 표현하면 마치 ‘태초의 이끼 숲에서 방금 걸어 나온 냄새’ 같았다. 그날의 경험 이후 나는 지인들의 냄새를 상상하며 마치 ‘시’처럼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글을 쓰며 체취를 채집하기 시작했다.

김지수 개인전 '풀 풀 풀-향'
김지수 개인전 '풀 풀 풀-향'

나는 세상이 보이지 않는 ‘냄새’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식물과 사람, 동물들은 서로 좋아하고 꺼려하는 냄새로 모이고 흩어진다. 이번 전시는 나의 ‘감각’의 근원에 대하여 묻고 탐색하는 <유전감각>에 대한 작업과 함께 다양한 생태 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곳의 냄새를 맡고 채집하는 여정에서 드러난 회화와 드로잉으로 구성되어 있다. 근원적인 감각의 뿌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나와 세계가 ‘냄새’라는 감각으로 마치 ‘생명의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이러한 ‘냄새’는 나에게 다른 생명체와의 교감과 동시에 과거와 현재, 미래의 삶을 연결해 주는 매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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