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코리아방송 = 이칠용 기자] 추석이 며칠 남지 않은 이른 가을, 서울 종로구 통의동에선 흥미롭고 아름다운 전시 고고백서 袴袴白書 : 우리의 바지, 이천 년의 역사를 넘어가 열리고 있다. 2004년부터 우리 전통문화를 현대적 관점에서 재해석해 온 재단법인 아름지기가 준비한 전시다. ‘바지 고()’자를 따서 지은 전시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시대의 풍조와 미감에 따라 변화해온 바지의 조형적 형태와 실용성을 조망한 전시다.

고구려 동암리 벽화 속 격자무늬(왼쪽)와 무용총 벽화 속 물방울 무늬를 재현한 한복 바지, 삼국시대엔 남녀 모두 바지를 입었고, 디자인 또한 동일했다.

아름지기 '고고백서' 전시 개막
고구려부터 조선까지 바지 조명
현대 패션으로도 손색없는 미감

그런데 왜 바지일까. 이번 전시를 함께 준비한 조효숙 가천대학교 석좌교수는 우리 고대 문화는 그 뿌리를 북방 유목 문화, 즉 스키타이 문화에 두고 있으며 한반도에서 우리 조상이 착용한 한복의 기본형도 저고리와 바지로 분리된 이부양식의 스키타이계 복식과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 이번 전시는 한복의 기본형 중에서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모두 즐겨 착용해온 바지에 집중해 그 변천사를 새롭게 조명한다는 데 의의가 있다. 전시는 크게 세 공간으로 구성됐다. 첫 번째는 역동적이고 실용적인 삼국시대 바지.

경주 황남동 고분에서 출토된 토우가 입었던 세로 선의 바지를 재현한 '백습고'. 촘촘하게 주름을 잡아 치마처럼 우아한 실루엣이 돋보인다.

조선시대같이 남녀 복식이 유별하지 않았던 삼국시대에는 남자는 물론 여자도 바지를 겉옷으로 착용했다. 바지통이 매우 넓은 것과 좁은 것, 바짓부리에 끈을 달아 오므려 묶은 것, 별도의 옷감으로 넓은 선단을 댄 것 등 각양각색의 바지들을 볼 수 있다. 고구려시대 동암리 벽화의 격자무늬, 무용총에서 볼 수 있는 직선적인 실루엣과 짙은 물방울무늬 등에선 이 시대의 호방하고 역동적인 기풍과 더불어 현대적인 미감까지 느낄 수 있다. 경주 황남동 고분에서 출토된 토우가 입고 있던 바지를 재현한 백습고는 화려한 세로 주름 때문에 이게 바지가 맞나 싶을 만큼 우아하고 화려한 실루엣을 보여준다.

말을 타거나 활동에 편리하도록 가랑이 사이에 크고 다양한 형태의 을 덧댄 실루엣은 요즘 젊은 세대가 좋아하는 배기 팬츠를 닮아 관람객을 깜짝 놀라게 한다.

어깨끈을 달고 허리끈을 높이 맨 고려시대 여성용 바지인 '문릉관고'(앞)는 요즘 인기 있는 점프 수트를 닮았다. 허리띠를 강조하고 길이를 짧게 한 반바지 형태로 고려시대 남성 바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뮌' 한현민 디자이너의 작품(뒤).

두 번째는 개방적이고 귀족적인 고려시대 바지. ···원나라 등과 교류했던 고려시대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개방적인 동시에 다양성이 존재했던 시대다. 또 번성했던 불교문화와 화려함,

고상함을 추구하는 문벌 귀족층의 기호가 맞물려 청자·나전칠기·한지·능라 등 최고의 명품들이 생산됐다. 덕분에 고려의 바지는 지극히 다채롭고 고도의 예술성을 갖춘 귀족적인 모습을 보인다.

버선이 달린 바지인 말두고의 모습은 지난해 유행했던 삭스슈즈(신발과 양말이 하나로 붙은 디자인)’을 떠올릴 만큼 파격적이다. 어깨 끈을 달고 허리선을 높이 맨 고려시대 여인들의 바지 문릉관고의 모습은 올해 트렌드인 점프수트를 닮았다.

바짓부리를 여러 층으로 겹쳐 화려한 졸륨을 연출한 조선시대 여성 속바지 '무족이'(왼쪽). 평소엔 치마 속에 감추고 움직일 때마다 슬쩍슬쩍 그 화려함을 노출하는 방식은 조선시대 바지의 이중적인 특징을 드러낸다.

바짓부리를 여러 층으로 겹쳐 화려한 졸륨을 연출한 조선시대 여성 속바지 '무족이'(왼쪽). 평소엔 치마 속에 감추고 움직일 때마다 슬쩍슬쩍 그 화려함을 노출하는 방식은 조선시대 바지의 이중적인 특징을 드러낸다.

삼베나 모시를 사용해 홑으로 만든 '살창고쟁이'. 허리 아랫부분을 오려내 살창처럼 통풍이 잘되게 한 것으로 더위를 이겨내는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세 번째는 절제와 파격을 아우르는 이중성의 조선시대 바지. 조효숙 교수는 조선시대에 들어 바지는 커다란 변화를 맞는데 여성 바지의 속옷화, 남성바지의 단순화가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고대부터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던 여성용 겉옷 바지가 사라지고, 치마 속 속옷 형태로만 존재하게 됐다는 것. 반면 남성의 바지는 형태·색감·무늬 등이 단순해졌다. 조 교수는 그 이유를 예와 남녀유별, 검소·절제를 강조한 유교 문화의 영향 때문이라며 대신 속옷이 된 여성 바지는 화려한 디자인과 값비싼 옷감으로 치장해 절제와 파격을 아우르는 이중성을 띠게 됐다고 덧붙였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 왕의 바지를 재현한 '청금고'(가운데). 청색 금직물로 직조돼 화려함이 돋보인다. 가랑이 사이에 넓은 '당'을 덧대 입었을 때 요즘 유행하는 '배기 팬츠'처럼 편안한 실루엣을 갖는다. 좌우의 흰색 바지들은 '준지' 정욱준 디자이너가 색을 배제하고 실루엣만으로 삼국시대 한복 바지의 아름다운 실루엣을 표현한 작품이다.

평소엔 치마 속에 감추고 있다가 움직일 때마다 슬쩍슬쩍 보이도록 한 '무족이(바짓부리가 여러 층인 화려한 장식의 속바지)'가 대표적이다. 여러 겹을 껴입는 속옷의 특성상 통풍을 위해 뒤에 여밈을 주어 밑을 터놓은 것, 밑을 막고 옆트임을 한 것, 몸통의 일부를 도려낸 것 등 생김 자체가 파격적인 속바지도 많았다.

삼국시대 바지 '백습고'를 현대적으로 다시 디자인한 '부리' 조은혜 디자이너의 작품들.

이번 전시를 주목할 점은 또 있다. 시대적 기질과 심미성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의복을 재현하면서 시중에서 파는 한복감이 아닌, 연구와 고증을 바탕으로 새롭게 짠 옷감들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과거를 복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대의 기술로 그 아름다움을 직접 재현함으로써 전통의 맥을 새롭게 이어가기 위함이다. 예를 들어 삼국사기기록을 토대로 재현한 청금고는 백제의 왕이 입었던 것으로 직조와 무늬가 화려하기 이를 데 없어 요즘 파티 의상에 쓰여도 손색없다.

임선옥(파츠파츠), 정욱준(준지), 조은혜(부리), 최유돈(유돈초이), 한현민() 등 현대 디자이너들이 각각 자신들만의 컨셉트로 삼국·고려·조선시대의 바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들이 함께 전시된 것도 눈여겨 볼만하다. 삼국시대 바지를 재해석한 조은혜 디자이너는 과거 여성과 남성이 착용한 바지의 형태가 동일했고, 또 그 당시에도 바지를 입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고 말했다. 고려시대 바지 파트를 맡은 한현민 디자이너는 현대 디자이너들이 그 시대의 오리엔탈 방식과 디테일, 실루엣 등에서 많은 빚을 지고 있음을 느꼈다고 했다. 네오프렌 소재로 조선 백자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임선옥 디자이너는 조선시대 바지는 미적으로나 기능적으로나 충분히 멋지게 현대의상으로 치환될 수 있는 아이템이라고 협업 소감을 말했다.

'파츠파츠' 임선옥 디자이너가 조선시대 백자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한 현대의 바지 수트.

아름지기 신연균 이사장은 이번 전시를 통해 더 많은 사람이 전통 의복의 품격과 아름다움을 감각적으로 이해하기를 바란다더불어 잊고 있던 우리 문화유산의 가치를 재확인하고, 우리 옷 문화에 대한 다양한 담론을 만들어내는 작은 발걸음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당부했다.

이번 전시는 프랑스 명품 브랜드 까르띠에, ()이건창호 한국메세나협회,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후원하고 재단법인 아름지기와 월드컬처오픈 화동문화재단이 주최했다. 전시는 1020일까지 통의동 아름지기 사옥에서 계속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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