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rtual Facade - 최은정展
Virtual Facade - 최은정展
  • 김한정 기자
  • 승인 2019.06.19 15: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트코리아방송 = 김한정 기자] 동대문구 홍릉로에 위치한 수림아트센터에서는 2019. 05. 27 ~ 2019. 06. 26까지 Virtual Facade - 최은정展이 열릴 예정이다.

Virtual Facade - 최은정展
Virtual Facade - 최은정展

‘익명의 풍경’ 속 범람과 절제의 미학
홍경한(미술평론가)


예술가에게 작품이란 실제의 삶과 따로 떼어 낼 수 없는 다양한 관계성에 관한 조형에 있다. 기표로써 존재하는 이미지는 단지 어떤 상황과 표상자체를 지시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 내부엔 보이지 않는 것의 보임과 보임에 가려져 미처 보지 못하는 것에 관한 질문도 들어있다. 그것이 실존에 관한 것이든 욕망에 관한 것이든, 하다못해 내재율에 관한 것이든 시각으로는 파악 불가능한 다양함이 배어 있다.

익명의 풍경과 건축적 유형

작가 최은정의 작품에서 일차적 목도는 ‘익명의 풍경’이다. 언뜻 보면 도시 설계 같기도 하고 다채로운 구조물이 일단의 나무 및 식물들과 어우러진 비현실적인 정경 같기도 하다. 전반적으론 무언가 상당히 넘쳐나다가도 절제되는 양상이 뚜렷하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파괴된 질서 위에 걸쳐진 범람과 절제의 풍경, 이식된 풍경이다.

작가에 의해 가공된 ‘인공적 풍경’이라는 점도 명백하다. 최은정의 작품에선 과거 예술가들이 그토록 찾아내려 했던 있는 그대로의 현실재현1)은 들어 있지 않다. 골재를 연상케 하는 가늘고 두터운 도형과 무지개, 기둥, 문, 기타 추상적 이미지를 제외하곤 인지 가능한 사람도 없고 새를 비롯한 동물도 없다. 적어도 외적으론 건축적 유형학의 일부로까지 비춰진다.

Virtual Facade - 최은정展
Virtual Facade - 최은정展

흥미로운 건 그의 풍경 어디에도 종속적인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매우 평평하며 병렬적이다. 모든 사물에 균등한 역할을 부여한 채 다각도의 화면 아래 존재하기에 동시적 관점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런데도 일부 장면에선 세밀한 묘사가 눈에 띄고, 이 세밀함은 배경까지 꽉 채워 여백조차 채워진 비현실적인 풍경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그리고 그 뒤엔 자유로운 공상과 매혹적인 환상이 따른다.

다채로운 해석이 가능하지만 그 중에서도 환상, 그것의 기원은 분명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임에도 다른 공간으로 전치시켜 가둬 버리는 작가 특유의 구성에 있다. 환상은 현실2)을 밑동으로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상상력을 동원하여 비현실적, 비실재적 풍경을 연출해내는 가공의 세계이다. 다만 이 가공의 세계는 현실과의 살아있는 접촉이 상실된 공간으로써, 현실과 인접성을 갖는데 반해 환상은 현실과의 인접성을 물리침으로써 현실 밖의 상상의 공간을 더욱 현실적일 수 있게 한다. 독특한 구성의 원인이다.

Virtual Facade - 최은정展
Virtual Facade - 최은정展

환상에 대한 또 하나의 발원은 풍경을 이해하는 방식과 구조에 관한 작가 스스로의 연구에 있다. 우리가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rico)의 작품을 접했을 때 느끼는 감정이란 형이상학적인 것에 머물 수도 있지만, 그 시작은 고전에 대한 철저한 연구였다.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그림에서 체감되는 원인 모를 숭고함 혹은 경외감이 사실은 르네상스 초기 지오토(Giotto di Bondone)나 프레스코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건 이미 공공연한 부분이며, 베니스 구겐하임이 소장하고 있는 마그리트(Rene Magritte)의 풍경 ‘빛의 제국’(The Empire of Light, 1954)이 보이는 것과는 달리 매우 철학적인 논제와 치밀한 탐구가 결합된 것임을 우린 모르지 않는다.

사실 이 모든 예는 작가의 설명처럼 인간의 시선을 사로잡는 ‘픽처레스크’(Picturesque)한 풍경에서부터 이상적이나 조화로운 ‘아르카디아’(Arcadia)적 풍경에 접목된다. 작가는 여기에 혼란을 덧댄 제3의 풍경으로 ‘생태 이상향’(hetero-ecotopia)3)이라 칭하지만, 감성을 자극하는 이지적인 풍경이라는 점도 기억할만한 키워드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생태 이상향’은 최은정이 일상에서, 소설에서, 직업적 경험을 바탕으로 생성된 풍경에 대한 자신만의 시각을 담은 단어의 조합이라는 사실이다. 경험적 사고 없이는 존재하지 않을 이상향인 셈이다.

Virtual Facade - 최은정展
Virtual Facade - 최은정展

풍경에 대한 탐구와 생태 이상향

그의 작업은 결과적으로 현실의 감각보다 현실을 넘어서는 감각에 가까우며, 현실감이 결여된 감각적인 작업임에도 허구의 이미지와는 다르다. 그렇기에 결국 작가에게 ‘익명의 풍경’은 허구냐 아니냐가 아니라, 또한 기록으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닌, 자아와 기억 등을 밑동으로 한 경험과 사고로 ‘현실을 새롭게 보는 방법’에 관한 문제라 해도 무리는 없다.

재미있게도 현실을 새롭게 보는 방법은 배치의 방식에 따라 상이해진다. “어떠한 풍경을 마주한 주체에 따라 그 풍경을 느끼고 해석하는 이미지가 다르듯이 어떤 장소에서 느끼는 감정은 한 단어로 표현하기 힘들다.”는 작가의 말처럼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그 대상을 읽어내는 차원도 달라진다. 하나, “표현하기 힘들다”가 곧 혼돈스러운 표상이 되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Virtual Facade - 최은정展
Virtual Facade - 최은정展

실제로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그의 비현실적이고 환영적이며 이질적이지만 조화로운 혼돈스러움은 여러 회화와 설치작업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이는 “풍경에 대한 접근 방식과 표현하는 방식에 대하여 탐구하며 풍경을 이루고 있는 주변 상황의 것들, 풍경을 뒷받침 해주는 구조들에 관심을 갖으며 작업해 왔다.”는 작가의 발언을 명징하게 뒷받침하나, 플랫할 수밖에 없는 타블로에 멈춰있던 오랜 회화 형식에 균열을 내는 조형어법으로써 환상을 더욱 활성화시키는 장치이기도 하다.

물론 어떤 면에선 최은정의 문법은 격렬한 동적 구도와 색채표현 등 비현실적인 상상의 세계에 빠져들었던 낭만주의적 여운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작가의 ‘생태이상향’의 세계는 지근거리에 놓인 ‘삶의 풍경’에서 건져 올린 것이다.

삶의 풍경, 그것은 작품자체로부터 확인 가능하다. 일례로 수없이 가로지르는 색선(色線)들은 흡사 사회적 관계 속에서 거주하는 인간의 양태를 포박하듯 비춰지고, 폐허 속 우뚝 솟은 건축물은 도달하지 못한 아르카디아의 세계인 냥 존재의 불안을 내포한다. 특히 평면의 프레임에서 탈선한 기하학적 전개는 그 생태 이상향의 세계가 결코 박제된 그림 속 이미지만은 아님을 우회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게와 부피를 가지지 않으며 애매하거나 난해하다. 때문에 무언가를 정의하거나 기준을 제공하지도 않고, 이것이 진실이라는 주장 역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럴수록 오히려 지금 여기 내던져져 있는 우리의 실존의 풍경은 보다 적나라해진다.

Virtual Facade - 최은정展
Virtual Facade - 최은정展

독해의 방식과 틈, 경계

세상을 독해하는 방식과 의도의 명징함을 투사한 틈, 그리고 확장일로의 경계는 개념상 분리된 지형적인 요소의 파편 혹은 부수적인 오브제에서 탈선하여, 새로운 풍경을 창조하고 사회적 관계성을 변증법적으로 섞는데 효과적이다. 그런데 작가는 이미 회화로부터의 고정성을 탈피하며 위와 같은 실험을 시도해 왔다. 대표적인 작업이 회화설치작품인 <Oblique garden>(2014)이다. 이 작업은 마름모 형태의 공간과 직사각형의 공간이 보다 거대한 공간에 펼쳐짐으로써 단일 회화의 제한성을 이탈한다. 이런 흐름은 2016년도 제작된 <Segmented Scenery>를 포함한 여러 작품에서 보다 명료해진다. 원과 사각형, 뾰족한 기하학적 형태들이 고르게 분포되어 있고, 네온이라는 오브제마저 등장한다. 이 작업들을 접한 관람자들은 작가가 제시한 지형적 장소에서의 남다른 이미지, ‘낯섦’을 체감할 수 있다.

‘낯섦’은 동시대미술의 정의에 부합한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선 틈과 경계 역시 동일한 선상으로 읽는다. 그것은 때로 관념적일 수 있으나 그 틈과 경계로 인해 실제와 가상의 세계가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캔버스 내외가 안팎으로 구분, 제지, 차단 없이 확장되는 공간과 시간의 단위를 엿볼 수 있다.4)

예를 들면 물리적 공간이면서 비물리적 공간으로서의 관점이 투사된 회화설치나, 비물리적 공간 내에 들어 있는 생태 이상향의 세계, 그리고 나무와 식물을 소재로 활용하게 된 기억과 추억까지, 이와 관련된 표상의 온전함은 틈과 경계에 진입 했을 때 혹은 거침없이 왕래할 때 가능한 조건이다. 즉, 작가의 작업을 효과적으로 독해할 수 있는 개폐의5)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어떤 개입으로써의 목적성이 뚜렷한 틈과 달리 경계는 보다 열린 개념으로, 이 또한 다분히 동시대적이다. 왜냐하면 선을 넘나드는 탈경계화 과정에서 연속적 맺음은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예술의 의사소통 방식과 내용, 형식을 담보하는 탓이다. 특히 탈경계가 생성한 반작용이 그 자체로 이전과 전혀 다른 미적 경험을 유도하고 관객들로 하여금 새로운 예술적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판단은 앞서 거론한 분야의 넘나듦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작가는 회면 속 이미지처럼 예술분야를 단정적으로 구분하지 않은 채 작품의 안팎에서 복합적으로 끊임없이 그리드(Grid) 시키거나 침범하고 결합되며 시각과 감정의 융합 및 혼종을 호출한다. 가시적인 영역과 비가시적 영역이 단절되지 않은 구축과 해체는 기존 틀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순환을 보장하며, 공간과 시간을 함의하는 이동을 통한 새로운 창조, 새로운 영역확장, 새로운 가능성 모색 등과 같은 정신적, 물리적, 관념적 여정과 맞물린 모든 상태를 지정한다.

이는 최은정 작업이 지닌 변별력으로 아쉬움이 없다.6) 이유는 각자의 영역에서 독립적이되, 긴장과 이완작용을 수시로 이끌어내면서 새로운 예술형식을 도모하는 상태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한편 경계는 동시대 인간의 유목성을 담보한다. 유목이란 꼭 공간적 이동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듯, 관계 속 다름을 부유 속에서 깨닫거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과 갈음된다. 때문에 ‘틈’과 ‘경계’는 달리 말해 ‘유동하다’와 ‘이동하다’라는 동사와 같다.

Virtual Facade - 최은정展
Virtual Facade - 최은정展

생성의 철학, 욕망이라는 이상향

우린 누구나 꿈을 꾼다. 꿈은 다른 말로 욕망의 발로이며, 현실계에서 실현 가능성이 있다면 더욱 경주하는 게 인간의 본능이다. 하지만 최은정에게 욕망은 미학적으로 노마드적 욕망에 준한다. 이는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과정을 수반하는 ‘생성의 철학’(the philosophy of becoming)과 결이 같다.7) ‘욕구의 형이상학’인 노마돌로지(Nomadology)를 들뢰즈(Gilles Deleuze)의 시각에서 풀이한 『노자와 들뢰즈의 노마돌로지』에 따르면 노마드적 욕망의 미학은 내재성과 외재성의 결합으로 발생하는 ‘초월’에 의미가 있다. 현실을 모태로 함에도 전혀 현실적이지 않고, 경계를 통해 왕래하고 틈을 통해 고찰 가능한 세계를 만들고 있는 최은정의 유동적 회화설치는 분명 이 지점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니 욕망의 미학은 (당연하게도)근대미학의 잔재인 인식주의와 거리를 둔다.

그러나 근작에 이르러 그의 작업은 폐허가 된 낡고 오래된 건축물에 집중되어 있다. 작가에 따르면 모티브는 카프카(Franz Kafka)가 1922년 집필한 미완성 장편소설 ‘성’이다. 권위와 지배체제, 인간 권력, 부조리, 불합리함을 카프카 특유의 허무와 소외, 고독과 인간 존재에 관한 성찰로 묶어낸 이 소설은 ‘성’을 찾아가는 주인공의 여정을 통해 고단한 우리네 삶을 엿보게 한다. 끝내 ‘성’에는 당도하지 못하지만 그 사이마다 녹아 있는 존재의 본질이란 무엇인지 깨닫는 건 ‘성’을 손에 쥐었을 때 얻을 수 있는 커다란 수확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불가해하며 이러한 세계의 이방인인 우리는 어쩌면 자신이 만든 성인 미로 속을 끊임없이 걷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문을 가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Tropical city No2’(2018)을 비롯한 ‘Stone Forest’(2018), ‘Monumental Landscapes No2’(2017), ‘Blue room theatre’(2014) 등을 포함한 몇몇 작품에는 그 의문 부호들이 소실점의 고의적 파기와 세상의 단면을 투영한 듯 자리한다. 어지럽고 더욱 복잡해진 화면, 출구와 입구를 구별할 수 없는 혼돈의 무대 아래 불안의 종착지인 냥 가득 각인되어 있다. 그건 바로 내가 살아가는 세상의 축소판이다.

다른 각도에서의 최은정의 작품들은 관계와 실존의 문제에 깊이 천착하는 양상이 두드러지고, (앞서도 거론한 것처럼) 회화의 제한성을 탈피하려는 움직임이 환상과 초월적 이미지로 변환된 근작들은 예술가의 미적 태도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며,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회화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 그 틈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의가 있다. 특히 동시대 매체의 다양성을 외면하진 않으면서도 회화성을 유지하려는 자세와 세상의 한 부분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화두로 하되, 결국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한 삶의 층위를 자기만의 조형으로 번역하고 있다는 점 역시 눈여겨볼 지점이다.

더구나 세밀하고 꼼꼼함으로 인한 물리적 소요가 필요한 노동력, 사전작업의 치밀함과 집요함, 조형요소에 관한 해박함, 예술적 완성도에 있어 수반되어야할 학제 간 장르 간 고민의 유효성을 자각하고 있다는 것도 그의 작업과 예술가로써의 위치를 생각하는데 있어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이다.

사는 것8)은 행복한 것이지만, 근원인 자연을 정복하고 사회와 인간 정신을 개조함으로써 무한한 진보 발전을 기대하고 지상천국을 꿈꾸던 근대인이, 도리어 기계로 대변되는 문명과 대중 속에서 그 본래적인 자아를 소외, 상실한 점에서 가장 근원적인 현대문명의 위기와 갈등이 숨어 있다. 그래서일까,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비판을 내포하고 있는 하이데거(Heidegger)의 ‘일상인’(das Mann)이나, ‘구토’, ‘부조리’로 대변되는 사르트르(Sartre), 카뮈(Camus)의 소설에서 드러나듯 최은정의 작업 역시 어쩌면 의문이 해답으로 가는 길을 제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노트 | Virtual Facade | 18c 영국의 귀족들은 당시 고전의 사회, 정치적 이상이 투영된 풍경식 정원(Landscape Garden)을 만들었다. 자연과 인공이 역설적으로 만나는 장소가 픽쳐레스크 이듯이 나의 작업에서 풍경은 인공적인 환경에 존재하는 식물들의 모습으로 구현되는 픽쳐레스크라 할 수 있다. 나는 풍경에 대한 접근 방식과 표현하는 방식에 대하여 탐구하며 풍경을 이루고 있는 주변 상황의 것들, 풍경을 뒷받침 해주는 구조들에 관심을 갖고 작업하고 있다.

내가 화면에 구성하는 공간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도, 멀리서 바라보는 풍경도 아닌 지극히 혼란스럽고 모호한 인공적인 그 무엇이다. 작품에서 표현되어진 나무들은 주어진 환경에서 자유롭게 자라는 모습이 아니라, 반짝이는 플라스틱 조각처럼 인공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나무들은 인위적인 구조나 틀에 의해 잘 가꾸어진 분재의 모습도 아닌 어딘가 어색하고 조야하며 규정하기 힘든 모호함을 지니고 있으며, 추상성 가득한 화면 속에 어떤 나무인지 애매한 이름 없는 존재이다.

작품들은 캔버스라는 사각의 틀에서 벗어나 잘리고 붙이고 기울어지고 앞으로 튀어나온다. 화면 속에는 박제된 모습의 나무들과 짓고 있는 중 혹은 철거하는 중인 건축물 골조들이 보이며 기하학적 선의 요소들이 맥락 없이 아우성치고 있다. 캔버스 속 이미지들, 혹은 캔버스 밖에 놓인 여러 가지 것들은 우리가 화면 속으로 들어가는, 혹은 화면 속 여러 가지 것들이 우리의 공간 속으로 튀어나오는 ‘문’과 ‘틈’의 역할을 한다. 선들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사각형 사이의 여백과 문, 커튼, 그물, 아치형의 도형이나 무지개, 폭포나 분수 같아 보이는 분출적 이미지 같은 것들은 잘라내고 붙인 캔버스의 틈처럼 화면 속 틈을 이루어내어 우리의 실공간과 화면의 허구적 공간 사이에 끊임없는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림 속의 여러 가지 조형적 요소들을 밖으로 꺼내 배치한 다양한 오브제들은 조형적 요소를 강조함과 동시에 그림 속 세상과 그림 밖의 공간에 애매하게 걸쳐져 있음으로써 우리를 그림 속 다른 세계로 들어가게 이끄는 문이자, 화면 속 허구들이 밖으로 나가는 틈의 역할을 한다.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마르코 폴로는 황제 쿠빌라이 칸과 정원에 마주앉아 그가 돌아다닌 수많은 도시들의 이야기를 나눈다. 그 도시들은 상징과 은유와 현실이 혼재하는 도시들이다. 공중에 매달린 도시, 쓰레기를 밀어내며 커져가는 도시, 불행으로 가득 찬 도시, 죽은자와 산자가 함께 하는 도시, 시간이 멈춰버린 도시, 욕망으로 넘쳐나는 도시 등 안개 속을 헤매는 듯 시를 읽는 듯 모호한 환상이 펼쳐지는 도시들은 분명 존재하지 않는 도시에다 이해되지 않는 설명들이었음에도 아름답다고 느껴진다. 내가 화면에 구성하는 공간도 현실 세계에 있을 법하나 동시에 어디에도 없는, 설명 될듯하나 동시에 규정할 수 없는 어질러진 난장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자연과 인간, 사물과 관념이 조화를 이루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여러 가지가 뒤섞여 알 수 없고 규정할 수 없는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s)’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