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코리아방송 = 김한정 기자] 인사동에 위치한 갤러리 이즈에서는 2019. 6. 12() ~ 2019. 6. 17()까지 소은영 숲속 풍경이 열릴 예정이다.

소은영 展 ‘숲속 풍경’

소은영의 작업
숲에 가다, 숲속에 수런거리는 그리운 것들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언젠가부터 소은영은 자신의 그림을 <숲에 가다>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잠시 <숨결>이라고 부른 적도 있다. 숲을 거닐면서 자연의 숨결을 느낀다는 의미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여기서 숨결은 그 존재방식이 특이하다. 분명 존재하지만 어떤 색깔, 어떤 형태, 어떤 감각적 대상으로 특정할 수는 없다. 그건 어쩜 자연의 본성이며 생명일 수 있다. 그러나 그걸 어떻게 감지할 것이며, 더욱이 그림으로 옮겨 그리기조차 할 것인가. 작가가 자연에 투사한 감정이입이, 자연이 작가에게 불러일으킨 감흥이, 작가와 자연과의 관계며 상호작용이, 그리고 자연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며 입장이 그걸 감지하고 또 그린다. 종래에는 자연과의 상호 긴밀한 교감을 그린다. 교감을 그린다? 그렇다면 교감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교감을 그린다는 것은 정확하게 무슨 의미일까. 작가의 그림은 바로 그 의미를 전제할 때 비로소 그 실체가 분명해진다. 작가의 그림은 바로 그 의미를 감각적으로 해명(혹은 해석)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소은영 展 ‘숲속 풍경’

그렇게 <숲에 가다>의 이면에는 <숨결>이 면면히 흐르고 있고, 비록 숲을 대상화한 것이지만 정작 숲 자체보다는 숲과의 교감을 그린 것이다. 작가의 그림이 자연을 테마로 한 것임에도 자연 그대로의 감각적 닮은꼴을 재현한 것이 아닌 이유가 여기서 해명이 되고, 그 자체가 작가의 그림의 특정성이 된다. 바로 자연의 숨결, 자연의 본성, 자연의 생명, 그러므로 어쩜 자연과의 교감을 그린 것이다. 그러므로 <숲에 가다>에서 숲은 숲 자체라기보다는 숲(그리고 어쩜 자연)에 대한 작가의 관념, 이를테면 자연관과 우주관이 전개되는 풍경이며, 일종의 내면풍경일 수 있다. 숲을 그린다기보다는 사실은 자기 내면을 숲에 빗대어 표현한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숲에 간다는 것은 사실은 자기내면으로의 여행을 의미하고, 숲에 갈 때면 비로소 혹은 어김없이 열리는 자기 내면과의 만남을 의미한다. 다시, 그러므로 때론 꼭 숲이 아니어도(그리고 없어도) 무방할 자기만의 세계를 의미할 수 있다. 숲은 자기 속에 이미 무성할 것이므로.

소은영 展 ‘숲속 풍경’

그렇게 작가는 숲에 간다. 숲에 가서 줍는다. 떨어진 나뭇잎을 줍고, 마른 열매와 풀씨 그리고 이름 모를 들꽃을 채집한다. 그리고 그렇게 주워온 것들을 종이 사이사이에 넣어 압착시켜 평평하게 펴 말린다. 옛날에 책갈피에 넣어 꽃잎을 펴서 말리던 것을 생각하면 되겠다. 작가의 작업실엔 그렇게 미처 그림으로 옮겨가기 전, 마른 꽃잎이며 나뭇잎들이 수북하다. 그러므로 어쩜 작가가 숲에 가서 줍는 것은 그저 나뭇잎만은 아니다. 나뭇잎과 함께 유년시절의 기억을 줍고 학창시절의 추억을 줍는다. 그러므로 그 줍는 행위는 사실은 흩어진 혹은 희미해진 기억의 편린들을 채집해 추억을 복원하는 일일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상실한 시절을 되불러오는 일일 수 있다. 상실한 시절을 되불러온다? 바로 그리움이다. 추억과 기억은 상실한 것, 부재하는 것, 돌이킬 수 없는 것, 그러므로 어쩜 불가능한 것을 되찾는 방법이고, 그렇게 되찾아진 감정이 그리움이다.

어쩜 불가능한 것을 되찾는 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찾아진 것이 그리움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리움 자체는 기억이 그런 것처럼 다시 희미해지고 추억처럼 재차 흩어지고 만다. 그리움은 붙잡을 수는 있어도 붙잡아둘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리움을 붙잡아둘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여기에 작가의 작업이 있다. 작가의 작업의 의미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고, 바로 여기에 방점이 찍힌다. 그리움을 화석으로 만드는 일이고 박제하는 일이다. 그러면 그리움을 곁에 둘 수가 있다. 그 자체로는 실재하는 감각적 대상도 아니거니와, 어떤 색깔 어떤 형태로 특정할 수 없는 그리움의 화석을 만들 수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렇게 하는가. 작가는 어떻게 그리움에 물적 형식을 부여하는가.

소은영 展 ‘숲속 풍경’

그 대략적인 과정을 보면, 우선 한지 위에 바탕칠을 하고 그 위에 마른 나뭇잎이며 풀씨를 놓는다. 그리고 다시 그 위에 칠을 하면, 칠과 칠 사이, 안료와 안료 사이에 나뭇잎이 갇힌다. 그렇게 안료가 일종의 접착제 역할을 해 나뭇잎을 고정시킬 수가 있다. 그리고 사포질로 표면을 갈아 내 화면을 편평하게 유지한다. 그리고 그렇게 칠하고 갈아내고 덧칠하는 과정을 수차례 반복하면서 일정한 질감과 물성을 가진 살(두께)을 만든다. 그 과정에서 사포질에 의한 밑칠이 부분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비정형의 얼룩이 조성되는데, 마치 오랜 벽면이나 부분적으로 박락된 회벽을 보는 것 같다. 그리고 일종의 색깔 층이 조성되는데, 마치 시간의 단층을 보는 것 같다. 그리움은 물론이거니와 추억과 기억, 화석과 박제가 모두 과거지사에 속한 일이고, 과거를 현재 위로 소환하는 일임을 생각하면 이런 감정은 어쩜 자연스럽다. 주제와 형식과 감정이 부합한다는 말이다.

소은영 展 ‘숲속 풍경’

그렇게 작가는 그리움의 화석을 만든다. 그렇게 마무리된 작업이 있고, 여기서 더 나아간 또 다른 작업이 있다. 그 또 다른 작업에서 작가는 지금까지의 식물채집가에서 돌연 곤충채집가로 변신한다. 식물화석그림 위에 따로 그려 오려낸 곤충 그림을 콜라주한 것이다. 이따금씩 여치와 달팽이 같은 예외적인 경우가 없지 않지만, 대개는 온갖 종류의 나비들이다. 꽃과 나비가 하나로 어울려 서로 희롱하는 자연의 원초적 생명력이 발현되는 현장을 보는 것 같고, 이로써 전통적인 화조와 초충도 그림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각색하고 재해석한 것 같다. 작가는 나비 그림을 콜라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단순한 콜라주가 아니다. 따로 그려 오려낸 나비 그림을 마치 나비채집 하듯 철침으로 화면에 고정시켰다. 그렇게 엄밀하게는 나비가 화면 위에 떠 있어서 그림자를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그림과 채집상자, 그림과 오브제, 그림과 그림자, 그러므로 어쩜 이미지와 실재가 하나로 중첩된다.

사실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작가의 그림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었다. 자연에서 채집한 소재 자체가 이미 오브제였다. 이런 오브제로 그림을 만든 것인 만큼(그렸다기보다는) 작가의 그림은 어쩜 일종의 오브제회화로 정의할 수가 있겠다. 그리고 그렇게 회화의 표현영역을 확장시키고 있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렇게 작가는 식물채집에 더해 나비채집이라는, 곤충채집이라는 유년시절의 추억을 되불러온다. 그렇게 작가에게 채집은 어쩜 추억을 부르고 기억을 환기하기 위한 미학적 장치(아님 감성장치?)일지도 모르고,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프루스트효과(어떤 물건, 어떤 사건이 돌연 회상 속에 빠져들게 만드는)를 매개하는 계기일지도 모를 일이다.

소은영 展 ‘숲속 풍경’

채집은 인간적 행위이다. 동물들도 저장을 하지만, 채집과는 다르다. 채집하고, 분류하고, 의미부여하는 행위, 더욱이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해서(작가의 경우에는 그리움을 환기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행위는 인간의 특수성이며 전유물이다.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한 방식이며, 이로부터 박물관과 미술관의 전통이 유래한다. 여기서 박물관이 시간의 흔적을 채집하고 보존하는 공간이라면, 미술관은 감성을 분류하고 전시하는 공간이란 점이 다르다. 작가의 경우에 시간에도 물려있고 감성과도 관련되는 것인 만큼 작가의 작업은 유사박물학의 성격이 없지 않다. 그건 자연과학보다는 감성학(미학)에 가깝다. 그렇게 작가는 유사 식물채집이며 의사 곤충채집을 매개로 그리움의 화석을 만든다. 자기 내면의 숲속에 수런거리는 그리운 것들(어쩜 숨결)이 살을 얻고 몸을 얻게 만든다.

소은영은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 졸업, 중앙대학교 일반대학원 회화과 졸업 후 개인전 16, 많은 단체 기획전을 치렀으며 현재 한국화여성작가회 회원, 은채전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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