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코리아방송 = 김한정 기자] 종로구 삼청로에 위치한 갤러리 도스에서는 2019. 04. 17 ~ 2019. 04. 23까지 오이코스_다섯번째 계절 Oikos_5th Season 성민우이 열릴 예정이다.

오이코스_다섯번째 계절 Oikos_5th Season – 성민우展

작가 성민우의 근작을 중심으로
오이코스_다섯 번째 계절과 코우로스, 그리고 코레

홍경한(미술평론가)

작가 성민우의 근작은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재현하고 기록하는 차원을 이탈한다. 그의 근작은 자연에 대한 미메시스(Mimesis)라기 보단 오히려 사실성이 사라지고 난 후의 존재의 실체를 탐구해 가는 과정에 가깝고, 내용적으론 소멸의 재생에 관한 서사까지 함유한다.1)

오이코스_다섯번째 계절 Oikos_5th Season – 성민우展

그의 신작 중 일부는 평범한 풍경(식물 혹은 숲)이 아니라 오이코스(Oikos)라는 사적 영역에서의 시간에 대한 시선이며, 이 시선은 중첩과 누적이라는 조형방식 아래 드러나는 존재의식에 관한 서술에 무게를 두고 있다.


중첩과 누적을 통해 빚어지는 시간은 성민우에게 있어 조형의 절대적 알고리즘이다. 이것은 일종의 시간의 레이어로 이뤄지는데, 시간을 포갠 결과에 따라 작품에 부여된 기존 인식은 해체되고 새로운 무형의 이미지가 탄생된다. 그리고 그 새로운 이미지 속에 다시 주름을 편 공간이 자리를 잡는다. 지난 16년 간 이어온 그의 거의 모든 작업이 이러한 맥락을 지닌다.2)

오이코스_다섯번째 계절 Oikos_5th Season – 성민우展

대표적인 작품은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오이코스_다섯 번째 계절>(2018)이다. 120호 정도의 평면 6개를 이어붙인 이 대형 작업은 사계를 지나 새롭게 태어난 다섯 번째 계절, 그 순환-연속성에 있으나, 무엇보다 엄청난 노동력을 가늠하게 한다. 8미터에 달하는 크기도 그렇지만, (작가의 말에 의하면) ‘흔한 풀로 빈틈없이 메워진 화면자체가 짙은 물리적 공력의 투입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오이코스_다섯번째 계절 Oikos_5th Season – 성민우展

하지만 이 작업의 실체는 (앞서도 언급했듯)‘와 근접한 일상 속 사물들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천첩(臶疊)해 중층을 이루거나 순차적으로 미끄러지듯 놓이는 가운데 나타나는 존재의 의식에 방점을 둔다. 다시 말해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항상 흔한 풀들의 곁을 지나고 있다.”는 작가의 말처럼 애초 가장 지근거리에 있는 흔한 풀부정할 수 없는 인간의 시간과 자연의 시간이며, 즉자존재의 당위를 이끈다는 것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자기관계가 아닌 존재는 그것 자체로 존재하며, 단적으로 긍정성으로 그 자체인 것이라는 사르트르(Jean Paul Sartre)의 존재론에 부합한다. 여기엔 긍정도 부정도, 능동과 수동도 없다.

오이코스_다섯번째 계절 Oikos_5th Season – 성민우展

성민우의 작업에 흔한 풀이 자주 언급되는 까닭에 오해의 소지가 충분하지만, 사실상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건 흔한 풀이 아니다. 그 보단 이미 존재해왔고 존재해가고 있는 존재인 흔한 풀에 대한 성민우의 시선, ‘존재의 의식시간의 중첩으로 전이하는 작가의 미적 태도3), 어쩌면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는 미물과 관계 맺고 소통하며, 그것에서 영감 받으며 어떤 의미를 재구성하는 작가의 의지작용이 핵심이다.4)

콕 집어 거론하진 않고 있으나 성민우의 작가노트를 보면 그 역시 같은 흐름에서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는 흔한 풀에 대해 우리 인간과 자연이 함께 하는 시간과 공간은 계절의 색깔로 설명될 수 있다.”고 말한다. 계절의 색깔은 시공의 대치어이며, 자연의 부분인 흔한 풀은 작가에게 이르러 특정될 수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여기서 또한 주어는 매개’5)흔한 풀이 아니라 시공과 존재이다.6)

<오이코스_다섯 번째 계절>의 경우 시각적 측면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시간과 공간의 순환으로부터 시작되어 비결과적인 풍경으로 남는다는 점이다. 내적으론 기록의 병첩(竝疊)을 거쳐 리얼리티를 상정하고 (결과론적으로)상상력을 자극하는 수순을 밟는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에서 확인 가능하듯)어찌 보면 지상적인 우연성(혹은 미필적 필연성)과의 결합 속에서 위치를 결정하는 방식7)을 지닌다 해도 무리는 없다. 이와 같은 현상을 따로 떼어 해석하자면, 반복되는 시간을 과정의 집합아래 복원하는 것이자, 너무나 익숙해 발견되지 못한 것의 발견을 통해 작가 자신의 삶의 지층을 덮고 있는 현재를 파악하기 위한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8) 또 다른 관점에서 과정의 집합은 전달해야 할 것과 전달되지 못한 것들에 대한 것들의 지속이기도 하다.9) 그것은 생태이고 자연과의 공생이며 시공이 전부일 수도 있다. 이처럼 <오이코스_다섯 번째 계절>은 눈으로 보이는 것에서 규정되는 작품이라 하기 어렵다.

오이코스_다섯번째 계절 Oikos_5th Season – 성민우展

<오이코스_다섯 번째 계절>과 함께 갤러리도스 초대전에 선보이는 또 다른 작품 <오이코스_코우로스(kouros)>(2018)<오이코스_코레(kore)>(2018)10)는 단순하고 묘한 형상과 복잡한 배경, 배경과 인체를 구분하는 붉은 선11)으로 인한 이질감이 눈에 띈다. 금박의 강렬함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모를 을씨년스러움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하지만 강렬한 인상(필자는 어쩐 일인지 죽음을 연상하기도 했다) 면에선 되레 기존 작품들을 앞선다.

이 작품들의 특징은 일단 묘사의 단계에서 벗어나 감각적인 표현으로의 전이를 가늠하게 한다는 점에 있다. 나아가 물리적 상황을 응집해 새로운 공간성과 시간성을 합치시키는 조형어법이 상당히 세련되었다는 점도 눈여겨봐야 할 이유가 된다. 그렇다면 이 작품들 배경에 놓인 이미지의 정체는 무엇일까. 작가에 따르면 <오이코스_코우로스><오이코스_코레>의 여백을 차지하고 있는 흔한 풀은 겨울의 과 한해살이 풀 도깨비바늘이다.

삐죽삐죽 가시 털을 한 도깨비바늘과 냉랭한 느낌의 겨울 ’, 직립의 황금빛 인물들은 상당히 이색적이면서 부조화롭다. 더구나 이 작품은 금빛 비단 위 수묵드로잉(정확히는 전통적인 이금(泥金)기법을 변용한 채색화)으로, 한낱 풀에게는 과분할 만큼의 공을 들였다. 그런데 이들의 역할이 숲의 전령이거나 메신저 혹은 생장과 번식을 관장하는 자연의 수호자 및 경외자라면 그 의미는 달라진다.

오이코스_다섯번째 계절 Oikos_5th Season – 성민우展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하찮고 흔한 존재로 여겨지는 풀에게 금빛 존재감을 부여하려한 처음의 의도처럼 순금박의 금속성 표면과 그 사이를 흐르는 선명하고 붉은 선을 가진 인간형상을 통해 보다 직접적으로 풀과 인간의 관계성을 보여주고자 한다.”아주 오래전 과거 인간들이 신전 앞에 인간의 형상을 세워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풀숲 앞에 금빛으로 빛나는 인간의 형상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지는 많은 부분 닮아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과 같은 것이다.”라고 덧붙인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부분은 풀과 인간의 관계성, 확대할 경우 인간과 자연의 관계성이다. 때문에 이 작품들에는 인공성이 두드러지는 현실에서 자연성과 인간의 상호성을 되묻고, 생명의 본질, 자연생태와 인공생태, 환경윤리와 생태윤리라는 명제가 이입되어 있다. 생물이거나 무생물이거나, 물질이거나 비물질이거나,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독립적이거나 종합적이거나, 형식이거나 본연에 관한 것이거나 어쨌든 그 모든 것은 관계 맺고 영향을 주고받음을 외면하지 않는다.

이는 인간 삶의 형식을 규정하는 명사들이요, 뿌리칠 수 없는 인간 삶의 조건들이다. 작가의 의도가 배어 있던 그렇지 않던, <오이코스_코우로스><오이코스_코레>는 인간 삶의 형식과 조건이 투영되어 있는 셈이다. 어쩌면 보잘 것 없는 겨울 풀로 인간과 자연의 상생을, 영원불멸한 순금으로 지속-지켜가야 할 순환과 생명의 가치를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12)

하나, 이들 작품은 무언가로의 본질과 회귀, 포용의 미학을 예술언어로 끌어내어 서술한다. 그 서술엔 문명 속에서 자가발전을 거듭해온 인위적 환경을 뒤로 물린 채 타자 간 거리감을 상쇄하고 갈등과 대립보단 치유와 화합의 단어들이 녹아있다. 이를 삶의 방식에 관한 작가만의 소고라 해도 무리는 없어 보인다.

오이코스_다섯번째 계절 Oikos_5th Season – 성민우展

그렇게 성민우의 근작들은 인간과 자연, 인간과 환경, 인간중심주의와 생태주의를 쉼 없이 오가며 우리에게 하찮고 별 것 아닌 것과의 교감을 통한 관계와 존재의 의식이라는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진다. 물론 종교적 이상을 표현하던 금빛의 사용이 풀이라는 하찮은 존재에 가치를 부여하게 되고 불화나 불상에 사용되던 순금박을 고대서양의 조각상 형태를 빌어 표현함으로서 시대적 시간적 간극의 초월까지 담고 있다.”

우리는 자연과 인간을 특정함으로 인식하나 실은 광범위한 연계(連繫) 위에 존재한다. 멀리 보면 작가 성민우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도 동일하다. 시공의 중첩과 결에 의해 만들어진 시공의 콜라주를 통해 다차원적인 시간성, 시간성으로 인해 희석되어버린 자연과 인간의 존재방식을 되뇐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리고 현재의 작업을 보면 그 방식의 결을 잘 살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과거 일부 작업에서 엿보이던 신체와 풀의 부조화이다. 비교적 옛 작품에 포함되지만 어떤 경우엔 다소 설명적이라 작금의 작업과 구분되는 탓이다. 예를 들어 2005<풀의 초상> <금빛 풍경> 연작은 지금 작업의 밑동이 되었고, 2008<보살과 나한>10년 뒤 그려진 <오이코스_코우로스><오이코스_코레>의 단계를 보여준다. 특히 2016년 그림손갤러리 기획 초대전에 출품된 대형 작품 <오이코스><오이코스_()>, <오이코스_()> 연작은 현재의 작업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다만 2013<초상>2015<에콜로지> 전에 선보인 작품 가운데 하나인 <>, <메꽃>, <고들빼기>, <환상과 망초> 등의 작품은 풀을 통해 사람을 보고, 생명의 존재에 대한 질문과 해답으로 여기기엔 오늘의 작업 대비 직접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연민, 사회적 관계, 욕망 등을 담았다고는 해도 표현 또한 작위적이고, 일종의 직관작용에 앞서 계산적, 의도적인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 듯한 여운을 떨치기 힘든 부분도 없지 않다. 빈약한 텍스트에 불필요한 주석이 주렁주렁 달려있는 형국이다. 아마도 어느 정도는 익명의 취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의 적당한 조율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일 것이다.

그럼에도 다행인건 지난 2003년 첫 개인전 이후 과거의 작업에서 필요한 부분만 발췌한 듯, 적절하고 효과적인 형식을 도려낸 작업들이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이번 전시에 출품된 <오이코스_다섯 번째 계절><오이코스_코우로스>, <오이코스_코레>처럼 설명은 함축으로 변화했고, 표현은 꽤나 자유로워졌다. 적어도 <오이코스_코우로스><오이코스_코레>는 보는 것에서 읽는 것으로, 시각에서 사유로 전환되고 있음을 파악하게 한다.

향후 어떻게 이어갈지 그 선택의 지혜로움이 요구되지만 적어도 이들 작업은 작가가 새롭게 도약하는 계기이자, 실질적 도약의 결과물이라 해도 무리는 없다. 그만큼 가치도 유효하다. 이것이 그의 여타 출품작인 <오이코스_부케>(2019) 시리즈 및 <오이코스_>(2019) 작품에 대한 해석을 억누른 채 <오이코스_다섯 번째 계절><오이코스_코우로스>, <오이코스_코레>에 집중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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