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코리아방송 = 최윤영 기자] 인사동 인사아트프라자에 위치한 아트코리아방송 미디어센터에서는 201946일 오후 운봉 이규완 민화작가의 색채여행 17’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운봉 이규완 작가의 색채여행 17

불화가 민화에 끼친 영향

불교그림은 종교화로서 예배의 대상이 되거나 혹은 부처의 세계를 장엄하게 표현하는 용도로 제작되었습니다. 불화는 탱화 외에도 사찰 전각의 벽에 그리는 벽화와 사찰기둥이나 석가래 등 모든 단청까지도 불화 범주에 들어간다고 보겠다.

불교회화의 도상들은 대체로 국가간이나 지역의 제한 없이 공유, 수용되었습니다. 그러나 국가간이나 지역 간은 표현과 기법 등이 유지되며 나름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운봉 이규완 작가의 색채여행 17

불화는 장엄하게 그려진 화려한 예배용 그림이다.

최초의 불교회화 제작과 관련된 기록을 보면 사찰의 각 공간을 법식에 따라 정해진 내용의 그림이 채색기법으로 그려졌으며 이는 현재의 사찰에서도 전승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불교회화는 일정한 내용이 변함없이 그려지며, 그 기법 역시 다채로운 채색으로 정교하게 그려집니다. 불화는 예배용인 동시에 부처가 계신 공간인 전각을 화려하게 꾸며지는 기능과 함께 장식적인 역할도 하였는데, 이러한 기능은 민화와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하겠다.

운봉 이규완 작가의 색채여행 17

불화와 민화는 내용과 표현기법들이 공통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전통회화와 달리 우리나라의 불화와 민화는 서로 다른 장르의 분야이면서도 부분적으로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불화에 민화의 소재와 표현기법들이 차용된 것은 여러 길상적인 소재, 즉 불로장생과 기복, 다산과 풍요의 염원을 그린 민화의 요소들을 불화에 도입함으로써 친근하고 이해하기 쉬운 형상들로 민화적인 소재들이 불화 속에 묘사되어 있어 이와 같은 측면에서 볼 때 불화와 민화는 어느정도 공통적인 측면이 있다고 볼 수 가 있다.

운봉 이규완 작가의 색채여행 17

불화는 순수 감상용이 아니라 장엄한 종교화이다

불화와 민화는 모티브뿐만이 아니라 표현 기법에서도 많은 부분이 유사한 점을 볼 수 가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민화와 불화는 채색을 중심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근대기 이전에는 순수 감상용이나 재산으로서 소유가 목적이 아니었으며, 사찰이나 전각을 새로 짓거나 불화그림이 낡아서 오염되거나 변색, 혹은 여러 가지 이유로 훼손되었을 경우 불화를 새로 제작하였으며, 낡은 불화는 관습에 따라 태워 없앤 후 새로 제작된 불화를 봉안 하였다.

운봉 이규완 작가의 색채여행 17

민화는 유교, 도교의 길상적표현이다.

민화 역시 기복적인 요소와 고대설화가 결합된 내용으로 초복벽사를 기원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 하였으며, 특히 조선의 문예 부흥기였던 영조(1724~1776)와 정조(1776~1800) 이후 급격히 쇠퇴해 지기 시작하는 왕권과 급성장하는 민중의 개혁의식으로 흉흉했던 당시의 사정으로 인해 위기감을 느끼던 지배계층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강화정책에 따라 도교와 유교의 습속인 길상적 민화가 탄생한다.

운봉 이규완 작가의 색채여행 17

민화는 궁중에서부터 사대부, 일반 서민들에게까지 애용된 민족의 미술이다.

민화는 궁정화에서부터 사대부, 일반 서민들에까지 확산 되었으며 궁정소속 기관인 도화서(圖畵署)의 화원(畵員)들에 의해 그려진 반면, 18세기후반~ 19세기에 민간수요가 많아지게 되자, 향사(鄕蒒) 혹은 환쟁이로 불리던 화장(畵匠)들에 의해 제작되었습니다. 이들 민화장들은 민화 수요에 의해 등장 하였으며, 민화 역시 문화재 혹은 미술품 가치를 지니게 되는 근대기 이전에는 감상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필요할 때마다 장식용으로 사용하는 그림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정초의 문배(門排)그림 등은 두고두고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매해 새로 제작하여 사용하였으므로 전통회화로서의 감상용이 아니라 장식성 혹은 일정한 벽사구복(辟邪求福)을 구현하는 그림으로 불화의 내용과 부분적인 측면에서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고 하겠다.

운봉 이규완 작가의 색채여행 17

화승들도 민화 제작에 가담했다.

19세기 민화 수요의 급증에 따라 일정 화승들이 민가로 내려와 민화제작에 가담 하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현전하는 불화와 민화는 대체로 19세기와 20세기 전반에 그려진 것으로 이 시기 그려진 불화들을 살펴보면 민화와 유사한 내용과 표현기법을 공유한 것으로 보이며, 지금까지 전해지는 민화들은 대체로 19세기와 20세기 전반에 그려진 것을 확인할 수 가 있습니다. 또한 민화의 길상적 모티브들은 각 불화의 의미를 강조하는 기능도 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불화 중에서도 치성광여래도는 그러한 점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주제로서 복숭아나, 수복(壽福)과 같은 특정문자들은 수명장수와 의미가 있는 그림으로 십장생과 모란, 다산을 상징하는 석류, 수박, 참외, 가지 등도 표현되어 불화의 성격을 부각시킴과 동시에 일반 서민들의 이해를 도모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고 하겠다.

운봉 이규완 작가의 색채여행 17

19세기 불교미술과 민화

이러한 내용들은 19세기 말 조선의 불교미술에 관심이 지대했던 외국인 선교사가 화승인 문고산(文古山, 1850~1930)과 김보응(金普應, 1867~1954) 등 민화풍 그림에 대한 사진과 기록을 남기지 않았더라면, 현전하는 대부분의 민화와 마찬가지로 화승들의 그림들 역시 제작자를 모른 체, 사진만 남았거나 아예 그 존재 가치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19세기 말부터 1930년 까지 활동한 근대기의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의 화승 문고산이 그린 문자도(文字圖) 1950년대까지 활동한 화승 김보응이 그린 민화풍의 봉황 그림이 흑백의 사진자료로 남아 있다.

운봉 이규완 작가의 색채여행 17

한국 불교미술에 관심이 지대했던 외국인 선교사가 남긴 기록

이 사진 자료는 근대기 한국을 방문했던 외국인 선교사에카르트”(Andreas Eckardt, 1998~1971)가 자신의 저서 <<조선미술사(Geschichte der Koreanischen Kunst, 1929)>>에 개재한 것으로, 문고산은 문자도(文字圖)에 민화의 백수백복도(白壽百福圖)와 같이 다양한 글자체를 사용하여 글씨를 썼는데, 혁필화(革筆畵, 가죽이나 천 조각에 먹이나 물감을 적셔 쓴 글씨)도 보입니다. 또한 김보응이 나무 판벽에 그린 봉황 그림은 오동나무 아래 둥지를 틀고 어미를 기다리는 새끼 봉황들과 둥지로 날아드는 어미 봉황의 모습을 활달한 필치로 그렸습니다. 이 사진 자료는 현재는 남아 있지 않지만 사찰로 생각되는 곳의 벽화 자료로서 매우 귀중하며, 더불어 민화풍으로 벽화를 그린 화승의 이름까지 밝혀져 있어 화승이 민화를 제작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다.

운봉 이규완 작가의 색채여행 17

여러 증언에 의하면 화승들이 곁일 삼아 민화를 그려 생활을 유지했다.

또한 화승들은 불화 이외에도 산수화나 초상화, 그리고 달마도 같은 선묵화까지 다양한 장르의 그림을 그린 사실은 이 사진자료 외에도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고암 이응로”(李應魯, 1904~1989)증언에 의하면 사찰의 화승들이 곁일 삼아 여러 가지 그림을 그렸는데, 그 중에서도 까치호랑이 그림이 가장 많았으며, 19세기후반 20세기초 화승들이 민화들을 그려 생활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역시 사찰에 걸린 불화와 벽화나 단청에 보이는 민화적 요소들에 대한 의문을 풀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고 하겠다.

끝맺음-

대체로 조선시대 회화의 소재들을 살펴보면 16세기의 산수화, 18세기의 풍속화, 19~ 20세기의 민화들은 당시에 유행하던 그림들 이었으며, 19세기후반부터 20세기 초반에 걸쳐 벽화를 비롯한 불화 속에서 민화적 요소들이 대거 등장하는 것은 신도들이 속세에 익숙한 것처럼 사찰속에서도 민화를 보는 것을 원했으며, 당시 화승들은 유행하던 민화를 불화속에 적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불화에 민화 표현이 등장하는 것은 당시에 민화가 어느 정도 유행하였는지를 말해주는 단서가 되겠습니다. 대개 민화의 제작 년대는 19세기부터 20세기 전반, 즉 일제 강점기때 제작된 민화들이 대부분이며 불화 속에 나타난 민화적 표현 역시 19세기말부터 20세기 전반으로 집중된다고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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