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코리아방송 = 김한정 기자] 인사동에 위치한 토포하우스에서는 2019220~35일까지 이태길 초대전이 열린다.

이태길 초대전

나의 작업은 축제에서 시작된다.

옛 조상들이 이 땅에 농사를 지으면서부터 하늘을 경외 시 했고 그로 인한 축원과 함께 서로의 단합으로부터 손에 손을 잡고, 결국에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와 관계들로 얽히고 섞여가며 싸우기도 하고 협력과 화합하면서 살아왔다. 축제란 무엇인가? 기쁨과 슬픔이다. 韓國人의 축제는 우리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성정의 발로다. 우리 민족은 흥이 많고 가무가 뛰어난 민족이다.

축제는 공동체의 삶을 더욱 결속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공동체의 삶이 평안을 기도하며 조상 또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종의 의식, 집단적인 카타르시스를 위해 기능하기도 한다. 보다 많은 사람의 군무 관중으로 부터의 뜨거운 호응, 즉 춤추는 자와 거기에 참여하는 자가 일체가 되는 축제의 열기야말로 공동체적인 삶의 한 표상임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나의 작업은 인다라망이다.

인다라망은 인드라의 그물이다. 그물과 그물 사이에 투명한 수천의 구슬들이 서로서로 비추며 너와 나 없이 나의 행동이 너의 행위로 서로 인과 법칙에 의해 작용하고 서로 비춘다. 우리는 이렇게 각자 나뉠 수 없는 존재의 서로 비추는 수만 수천의 비춤이 작용하고 반응하며 살고 있다. 이러한 것들을 그림 속에 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조형적인 형태로 변환하는 신명이 아닐까? 근작에서 나는 감축과 축쇄를 통한 기하학적인 선과 면으로 예리한 구성의 반복으로 좀 더 평면화되고 추상화의 길을 가고 있다. 기존의 작업에서는 구상적 윤곽으로 알 수 있었던 것이 맥과 맥을 연결하는 근본 태만이 남고 그 형태는 무한한 평면으로 사라져 버리고 공의 세계에 태극으로 돌아간다. 오직 맥과 맥만이 서로서로 연결된 인다라망이자 우리 투르크인들이 서로서로 연방국들을 일러 케레이(계례)라 부르듯 작업의 평면성은 결속된 거대 연방 국가였던 계례를 상징한다.

또한, 내 작업의 근본 본태는 古朝鮮 건국 신화에 나오는 '弘益人間과 세상으로 나아가 도리로 교화한다.''在世理化'의 인본주의적이고 현세주의적인 윤리의식과 철학사상의 특질을 본질로 삼고 있다. 그래서 상생과 평화가 기원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20192월 이 태 길

이태길 초대전

'상생''화합'을 기원하는 해원(解冤)의 이미지

서 영 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이태길 화백은 지난 2000년대부터 '축제'라는 화합의 주제로, 한민족의 통합을 염원하는 회화작품들을 선보였다. 그리고 이 '축제'의 주제는 그의 최근작들에까지 연이어지고 있다. 다만 작품의 중심에 있던 구체적 인간 형상들 혹은 민족성을 상징하는 십장생, 달항아리, 백두산 천지, 같은 형상들이 이제는 추상적 기호로 바뀌어 있다. 그런데 그림 앞으로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화면에 등장한 추상적 기호 하나하나가 모두 서로 손과 발을 맞잡고 있는 인간들임을 알게 된다. 잭슨 폴록의 전면균질의 회화(all over painting)에서처럼, 상하좌우 가리지 않고 천지사방으로 이어지는 인간 모습의 군상은 그야말로 시야의 한계를 넘어서 유기체적 기호들의 집합체로 다가온다. 이들의 무수한 반복 덕분에, 전체 화면이 프레임 바깥으로 확장되는 듯하고, 심지어 무한대로 펼쳐진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과거의축제연작에서 등장 인원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면-많아봤자 20여명 정도였다-, 최근작에서는 한 화면 안에 수백 명의 군중의 움직임이 등장하여, 관객의 시선을 한껏 포화시킨다.

이태길 초대전

필자는 인송 화백의 최근작에서 관객의 시선을 화면 중심으로 집중시키기보다, 인물상들의 끝없는 반복과 연결을 통해, 시선을 확산시키는 표현법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로서 작가는 그간의 안으로 접힘의 미학에서 마침내 펼침의 미학에로 전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메시지의 접힘에는 분석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방법이 따르겠지만, 펼침의 메시지에 대해서는 서로에 대한 융통성 있는 이해와 소통의 해석이 필요하다. 필자의 이런 생각을 떠받쳐주듯, 화면 위에 펼쳐진 군상의 장관spectacle은 그야말로 우주적 상생의 기운으로 진동한다. 비단 우리 한민족에로 국한되어야 할까? 단언하건대 전 세계의 인류가 이 상생의 장엄한 공간 안에서 서로 연결된 채 위, 아래 없는 관계의 네트웍을 보여준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모두가 서로 통합된 장 field 안에서 생명의 기운을 교환하며, 서로 화합하는 마음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전개해나간 작가의 막힘없는 실험정신에 찬사를 보낸다.

그런데 인송 화백의 그간의 작업 여정을 살펴보면, 사람과 만물이 모두 함께 어우려져 살아가는 화합의 축제를 일관되게 표현해왔다. 그런 사실에 비추어 필자는 우리 전통 문화의식의 근원인주역의 상생 사상을 더 천착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같이 살아간다'는 뜻은 윤리적 차원에서도 당위성이 있으나, 한민족의 근대사와 분단의 역사적 사실에서 더 큰 의미를 지니는 개념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주역의 음양오행설을 통해 우주 순환에서 대립적 상극이 아닌 상생을 더 강조했던 내용을 참조하면서, 반목과 불평등, 차별, 원망과 원한을 해소하는 상생의 '해원'(解冤)적 차원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하는 편이 효율적이리라고 본다. 사실 인송 화백의 최근작은 일체 현상의 대립과 반목을 완전히 해소하는 보편적 추상 이미지로 자리 잡고 있다. 민족의 내외적 모순과 갈등에서 벗어나 서로를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상생의 모습은 필연적으로 '해원'의 단계를 -실천하도록 요청한다. 그리고 이런 과정의 실천이야말로 새로운 세계를 펼치게 하는 원리가 된다.

따라서 인송 화백의 최근작은 진정한 평화가 이룩되길 기원하는 상생과 화합의 이미지들이며, 묵은 원망을 푸는 해원의 소망을 담은 그래서 더불어 순연하게 살아가는 한민족 군중의 이미지들로 해석이 된다. 각각의 개별자가 주체이면서, 개별자들이 한 덩어리로 모인 집단에서는 내가 아닌 상대방 타자를 위하는, 그리고 내가 존재하기 위해 타자가 반드시 존재해야만 하는 공동체,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의미로 해석해도 되지 않을까? 화백이 묘사한 최근의 축제연작은 이런 점에서 해원상생(解寃相生)을 표상하는 연작으로서 조형성의 개별화를 이루어 냈다. 찬사와 함께 확장성이 펼쳐지길 확신한다.

이태길 초대전

이태길 작가는 조선대학교 문리대 미술과 졸업,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서양화 전공 후 27회의 개인전과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으며, 현재 신작전회 회장, 목우회, 한국미술협회 고문, 종로미술협회 고문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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