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택 아트코리아방송 논설고문칭찬합시다 운동본부 총재

여름철엔 오전 11시 넘어부터 줄이 늘어섰다. 흐르는 땀을 훔치면서도 차가운 냉면 한 대접 받을 생각해 20~30분을 서서 기다렸다. 서울 을지로 삼가 지하철역 공구상 거리의 을지로 면옥이다.

희끗한 머리의 이북 실향민도 많았지만 평양 냉면 좋아하는 젊은 회사원도 적지 않았다. 육수와 동치미 섞은 국물에 담긴 메밀국수의 심심한 맛은 중독성이 강했다. 성수기엔 일주일에 서너 번씩 다니는 동료도 봤다. 편육 한 접시에 냉면 한 그릇을 눈치 보며 얼른 해치워야 하는 여름보다 손님 뜸한 겨울에 찾는 게 단골 대접받는 비결이기도 했다.

이 식당은 혼자 오는 어르신도 달갑게 대했다. 소주 반병, 편육 한 접시를 시켜놓고 앉은 손님도 눈에 띄었다. 1985년 개업한 을지면옥이 재개발로 철거될지 모르는 신세라고 한다. 이 자리엔 지하 7층 지상 20층 규모의 오피스빌딩과 상가가 들어설 예정이다.

서울시는 세운상가 주변을 재개발해 주상복합 아파트를 짓는다는 계획이다. 안성집 양미옥 노가리 골목 같은 을지로의 대표적 노점과 맛집 이 사진 위기에 놓였다. 평양냉면은 몇 년 새 신세계 인기 메뉴로 급상승했다. 냉면 맛을 모르면 구식 취급을 받을 정도다. 소셜미디어에 있는 성지순례 하듯 냉면집 사진이 올라왔다.

냉면 마니아라는 젊은 연예인도 잇따랐다. 가수 존박은 평양냉면의 심심한 맛처럼 내 인생도 그렇게 살고 싶다. 자극 없이 수준이 싱거운 맛처럼 살고 싶다는 냉면 예찬자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을지로 청계천 일대 재개발로 을지면옥 등 오래된 맛집이 철거된다는 보도가 나오자 보존되는 방향으로 재설계하는 방안을 요청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을지로 청계천 일대 노점을 보전하기 위해 이미 시행 중인 재개발 정책을 재검토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사업 인가까지 내준 재개발을 어떻게 바꾼다는 건지 알 수 없다. 근처 고층 빌딩으로 식당을 옮기면 그만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하지만 광화문 피맛골 식당들처럼 재개발로 고층 빌딩에 들어가는 노점들이 예전 맛과 분위기를 못 살린 채 무너지는 경우도 꽤 있었다.

천만 서울 시민의 애완이 서린 노포를 살리려는 노력을 폄훼할 이유는 없다. 다만 수도 서울의 도시계획이 갖는 무게도 고려해야 한다. 을지로 청계천 재개발은 2006년부터 시작된 세운 재정비 촉진 사업에 따라 추진돼 왔다. 10개 정비 구역 중 일부 구역은 철거가 진행되고 있다. 2011년부터 9년째 시정을 총괄하고 있는 박 시장은 누구보다 이 사업의 내용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동안 사업 추진에 문제가 있다고 했다가 박 시장의 한마디로 10년 넘게 인력과 자금이 투입된 사업이 갑자기 바뀐다면 그 뒷감당은 어떻게 할 것인가? 평소 도시 재생에 관심을 보여온 박 시장이 재개발 사업이 본격화되기 전에 요즘 살리기 문제를 충분이 검토하지 못했는지 궁금할 뿐이다.

박 시장은 간편 결제 서비스 제로 페이 사업과 관련해서도 제가 해서 안 되는 일이 거의 없다제로 페이 성공 여부에 대해 내기를 해도 좋다고 말했다. 제로 페이는 가맹률이 10프로도 넘지 못해 실효성 논란이 제기되고 있으며 박시장이 추진한 정책 가운데 실패했거나 후퇴한 것도 적지 않다.

지난해 보류된 서울 용산과 여의도 통개발 정책도 그렇다. 박시장의 발언으로 이 지역 아파트값이 급등했다. 국토교통부가 제동을 걸었고 박 시장은 그 정책을 사실상 철회했다. 서울은 중앙 정부의 축소판으로 불린다. 시정을 펼치려면 그만큼 능숙한 종합 행정 기술을 발휘해야 해야 한다.

서울시 정책은 장기적으로 대한민국의 먼 미래까지 내다보는 백년대계가 돼야 한다. 그러나 박 시장의 최근 행보는 즉흥적이고 사려 깊지 못한 모습이다. 차기 대선을 너무 의식한 행보 아니냐는 지적을 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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