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깃발

2019.1.1 새해맞이 글밭

문총련 위원장 및 아트코리아방송 칼럼니스트

두서없이 새맞이 글을 올리지만 오히려 두서없음이 꾸밈없는 글밭임을 고백한다. 가까운 모든 분들이 슬며시 지켜보기를 소망한다.

고려의 깃발

며칠 맹독이 실어증처럼 찾아왔다. 멍하니 머리가 비어있고 뒤죽박죽 소란스러웠다. 물론 맹독은 환희와 비애감이 충돌하면서 자각증상처럼 사고가 반응하는 증좌일 뿐이지만 며칠 끙끙거리는 소리가 결국 몸살로 돋았다. 다행히 몸살은 정화를 요구한다. 몸살을 통하여 몸 기운은 재 세팅되고 사고는 재 부팅된다.

금강경독송마저도 몸 기운을 잔잔하게 하지만 멀미처럼 현기증이 먼저 발작한다. 아득한 연민의 강()이 역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즐겨 쓰는 몸 씻기는 몸 상태를 이완시키며 30~40분 숙면을 통한 치유과정을 갖지만 맹독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렵사리 몇 구절 남긴 프로그램 텍스트를 정리할 수 있었다. 정교수와 임 사장 개념정립 원고다. 그럼에도 보문스님 독대는 맹독 증좌를 돋우고 있다. 암실처럼 흐릿해지는 뇌세포의 깜박거림이 심근의 무거움을 독촉한다.

플라타너스 정령기도는 오히려 강박증처럼 일상의 정원이 되었다. 구차한 기원의 소망꺼리를 넘어 나무와 사람간의 대화다. 이 세상에서 내가 나무 정령을 제일 사랑한다는 마음이 나무대화의 전부요 끝이다. 그럼에도 사람은 소망의 손짓을 내밀게 되었다. 의지처의 고향쯤으로 삼았다. 어찌되었든 며칠 금강경, 나무 정령의 약발은 녹녹치 않았다. 금역의 지대만큼 헉헉 거렸다.

이유는 오히려 나의 환희 심에 있다. 진정 기다렸던 삶의 미학이 주마등 빛처럼 솟구치고 지나가고 있음을 만끽해도 피드백이 오히려 없다. 존재의 가치가 하염없이 넘치고 있어도 그 빛을 공유하는 상대가 없다. 그러기에 비틀거리며 비애감에 타협하고 있다. 그저 고적했던 기다림의 지대를 투덜거림 없이 받아들이고 숨 쉰다. 과연 이방인의 실존주의가 나와 같았을까. 박탈감 같은 자각 아니었을까.

인사동문화학교-명품Mall-보물지도플랫폼-몽유도원도-엔젤탄생, 스케치가 봇물 터지듯 자료화되어야 한다. 금융체계에 걸맞는 프로세스를 완성하는 일이다. 십여 년 쌓아온 퇴적층을 정립하는 즐거움, 마땅히 정독도서관을 찾아 차근히 다듬어야 할 수순이다. 오히려 환희 심에 느끼는 단계임이 분명하지 않은가.

차고도 넘칠 것이 분명해 보인다. 몽유도원도의 여정은 스스로에게도 놀라워할 이야기다. 굳이 북한산성과 한양도성을 연결하고 인사동과 문화학교를 연결하는 40여 년의 얼개도 푸닥거리, 씻김굿처럼 몇 년 가슴앓이의 열매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길은 그냥 하염없이 추수려야 할 순명의 길이다.

오늘,

무덤덤하게 서기 2019.1.1의 좌표로 커피 잔을 맞이했다. 플라타너스 정령 앞 스타박스 커피마중이다. 그래, 맞아, 동지 절기기도를 세차게 하였어도 고구려의 깃발은 없지 않은가. 우리 세상에 말이다. 아흥다흥드리, 24절기, 17명절 텍스트가 맹독의 치유를 덧씌우는 아이디어가 흡연을 즐기며 스쳤다. 설령 피드백이 없다할지라도 넋두리라도 남기자. 그냥 소소한 글밭자락에라도 오늘의 심경을 토로한다. 그냥 말이다. 그러기에 동지 정령의 소망어린 스치움이 왠지,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맹독증은 큰 글밭을 질주하고 있다. 또한 오솔길 정취를 만끽하려는 한 소년의 갈망이 충돌한 질병이다. 자기해소를 연소시키지 못한 순환계질병이다. 따라서 맹독의 증좌는 작가의 독설만이 해소될 수 있다는 망증까지 다다르게 된다. 큰 글밭과 오솔길의 충돌은 오히려 가시성성한 산딸기 밭, 초롱한 붉은 빛을 직시한다. 예수의 가시관만큼이나 뚜렷한 저항의 DNA가 곧 오늘이라는 직시다. 그래, 그렇게 한 삶의 명제는 오히려 소소함으로 귀 기울여지기를 귀착해본다.

삼청전, 소격소, 종친부, 중학당, 기로소까지가 내가 읽는 고려의 하늘, 백악마당의 줄기다. 몽유도원도, 박정희의 길, 인왕산 용골까지의 아스라함이 겸재가 선엄한 인왕제색도의 정의다. 뻐꾸기의 탁란 으로부터 국사당, 성균관의 질곡을 투과하는 일은 짐 보따리 버거운 뚝섬에 이르는 그 아련한 파노라마가 너무도 조용한 한강의 신화를 일깨우려는 소년의 소망일 따름이다. 제 명제를 동화책, 시집, 제안으로 엮어진 소년의 맹독증은 이제, 2019.1.1을 시작하여야 한다.

북한산성과 한양도성의 연결은 우리 문화의 숨결과 같은 것으로서, 누구라 여기 있어 빛의 소리에 죽으리오. 라 되뇌였던 30대 소년의 절규가 가슴 저민 화두다. 또한 인사동문화학교의 절절함을 어찌 한 사람의 서원으로 이루어지겠는가싶어 잠시 나마 아득한 커피 잔 마주하고 독설처럼 피는 악의 꽃처럼 스스럼없다. 와중에, 인사동문화학교, 몽유도원도, 엔젤스토리, Mall 텍스트 개념을 금융패러다임에 정립하려고 하니, 온몸의 에너지가 환희 심과 비애감에 함몰되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일까 싶다.

계룡산 갑사 머리에 올려진 지비(紙碑)의 성성한 감수성에 대하여 늘, 나에게는 질문과 대답 없이 소중한 종이 묶기와 연못작업은 홍패, 청패의 이야기가 닌텐도와 토인비의 직관을 뛰어넘는 나의 강산, 마을이기를 기원하기에, 금강송 독송, 플라타너스 정령은 스스럼없다.

2019년 오늘은 가벼이 볼일이 아니다. 스스럼없이 십여 년을 하루처럼 걸어온 오늘의, 하루다. 그렇다고 오늘의 오늘은 그 모든 오늘의 정점일터. 그놈의 맹독증은 아련히 떠 보내야함이 마땅하다.

201812월 어느 날, 화두삼아 편지형식으로 정립했던 손님이 미래다, 오래된 미래, 문화가 답이다, ART가 부자다, 라는 얼게는 그것으로 족할 뿐이랴. 그 누가 있어 다소곳이 맞이할 것이라 보았는가. 그저 업무중독증으로 진단서를 꾸리는 것이 옳다. 그저 그렇게 갈망했던 족제비소필 마련하여 순지에 써놓을 신화에 너의 그 모든 마음 밭을 옥죄는 것이 맹독 백신이 아니겠는가 싶다.

우리 민족사에 투덜거리지만 비좁고 흐트러져 있어도 스스럼없이 꽃피는 문화학교 씨앗쯤은 부등켜안아 보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 마당에 턱없이 헐벗고 짓밟힌 상흔 퇴적층이 온당한 이유라 할지라도 서로 사고파는 장터는 아닐 터. 명품Mall 하나 설계함이 마땅하지 않은가. 허득이지만 허득일 따름, 온유했던 무거움을 무거움이라 정의하고 부드러움을 부드러움이라 받아들이던 한국의 미() 정원 꾸리는 것이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기에 몽유도원도길 열어 봄이 스스럼없다.

이 모든 것의 귀결이 천사의 동동처럼 아득한 질문과 대답의 소요라면 아트뱅크의 소망은 엔젤 스토리로 꾸려지는 것이 어찌 맹독증을 유발하겠는가. 발주나 맹약의 아스라함이 동지 고구려깃발로 성성하구나.

201911

플라타너스 정령 앞, 스타벅스 커피 맞이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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