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쓰다. 1
시를 쓰다. 1
  • 박동 칼럼니스트
  • 승인 2019.01.03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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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다.

문총련 위원장 및 아트코리아방송 칼럼니스트
문총련 위원장 및 아트코리아방송 칼럼니스트

시를 쓰기로 한 것은 탈고였다. 작가의 칩거를 접고 작품 활동을 시작하거나 집필 마무리를 짓는 옹아리다. 다만 문화운동가 입장에선 왠지 보상심리가 저변에 도사린다. 응당 누려야 할 자기연민의 회상이다.문화학교와 갈레를 연결하는 시세계(世界).

편지라는 형식은 노골적인 읍소이자 은밀한 소통을 요구한다. 에세이의 정수이기도 한 서간문학의 생명성은 특별한 선택지에 대한 염원이 담겼다. 몇 편의 시 습작은 나에게는 오랜 칩거를 접는 시작점이다. 오히려 문화운동 40년을 휘돌아 치는 화두쯤으로 삼고 있다.

손님이 미래다.

오래된 미래.

문화가 답이다.

ART가 부자다.

신화를 찾다. 앞의 개념정립을 위하여 시작될 칩거의 의미는 오히려 지금껏 견지한 사실보다 벅차다. 문화운동 차원의 결이 문화라는 본질의 질문과 대답이 작동하는 현장성 때문이다. 피상의 세계는 현상의 구현을 요구한다. 꿈의 세계와 현실의 현상과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라는 간극에서 만나기 때문이다. 물론 문화는 다층적이며 무기 질적 성질이 농후하다. 계량하기엔 고등체계가 허락지 않음이다. 이 기괴한 모형은 아마 나의 전 인생을 쏟아 부어도 도달치 못할 범주다. 단지 시대의식과 담론에 비추어 나의 한계를 선언하고 정립하는 체계다.

아쉬운 것은 절절하리라 규정지었던 그 모든 개념의 하나하나가 빼어난 형태를 완성하지 못하였거나 작동오일이 충분치 않음을 알고 있다. 유감스럽지만 타이밍 관점에서 오히려 늦은 감이 있기에 칩거의 세월을 접기로 했다.

 

사실, 시를 쓰기로 하였다……. 라는 시성(詩性)의 고착 점은 칩거와 탈고의 아스라한 과정을 관통했다.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헌증하는 꽃다발 같았다. 그럼에도 정립과정은 플라타너스 정령기도를 소망삼아 문화운동가의 일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스스로가 스스로의 세계에 접신처럼 융해되어 있다.

시를 쓰기로 한 것은 알고리즘이다. 문화 분자식이 아닐까싶다.

 

 

쇠똥구리

 

를 쓴다는 것은, 깊은 산골 성성함으로

내리는 폭포줄기를 창조하리라는,

믿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푸른 빛 솔방울 높이를 치켜볼 때 묵언

수행으로 다가선 마주침은 일찍이

만나리라 다짐했던 시의 서장으로

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삭혔음이다.

 

문득 길을 거칠게 거닐다가 몇 쪽짜리

산문정도로 위안을 삼으며 마주한 커피 잔에

애증을 삼을 정도로 아득하게 멀어진

단주의 시절 속에 켜켜이 묻은 과거사의

역경마저도 호주머니 라이타 돌처럼

정겨울지언정, 지평선 너머의

시세계는, 신화처럼 각인되었다.

그것은 손짓과 발짓 따위와는

별개의 우상이었다.

 

를 쓴다는 것은, 가람을 부등켜

지켜 세운 인왕 불()의 호령처럼

시원한 한더위 얼음조각처럼

명쾌한 밤하늘 별쫒기 놀이와 같아서

수줍어 곱던 어리디 어린 조바심의

영혼덩어리에서 꾸며낼 하늘의

엽서로 삼았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애틋한 형제의

이별마당에서 마저 그 많던

사연의 숲속에 어찌 푸른

흐르지 않을까싶어 마음 색안경을

바로 쓰고 창백함을 정중히

맞이하여 각혈처럼 숭고히

정열한, 수고로움의 열정이

꽃피지 않은 것은, 오히려

의 정수가 나보다

가지런한 화분 위에 숨어있는

진실가지 꽃이라고 섬겼기

때문이다.

 

눈발, 빗줄기, 천둥마저 요란한

온몸의 자극 속에서도 광란의 광기가

밀려올 수도 있거니와 한 구절

탐닉한다하여도 그리

쑥스럽지 않았을 것을…….

시의 습작마저도, 없었다.

 

를 쓴다는 것은, 어찌 보면

오늘이기에 당연한 것이다.

 

0.5브랜드, 4차 공간, 0 Mall

마치 암호 같은 기호는 별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워낭소리와 모래시계는 어린왕자

처럼, 유희한 만찬으로

누구에게나 감동을 줄

귀착점도 없다.

그냥 튕겨져 나오는 나의 시다.

 

며칠 전부터 시의 필요성을

직감했을 때 나의 기호와

암호를 나열하기로 하였다.

 

살펴보니 나의 삶은

건조하며 박제된 규칙으로

하루하루를 쇠똥구리처럼

소우주의 탐원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시작하기로 하였다.

0.5브랜드, 4차 공간, 0 Mall

이렇게 보잘것없는 기호가

나의 모든 상징물이었을 때

목줄에서 튕겨져 나오는

전원이 전부다.

 

를 쓴다는 것은, 깊은 산골

성성함 내리는 폭포줄기를

창조하리라는 믿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먼저

 

그럴 것이 분명하다.

지비(紙碑)의 구도의식으로 종이 묶기를

시작할 것이다. 빛과 구원의 길 말이다.

 

만화가 답이다, 라고 먼저

선언할 것이 자명해 보인다.

동화책과 시집이 말을 하겠지.

 

아마, 다섯 연못을 또 설계하고 말 것이

자명해보이지.

먼저 그럴 것이 분명해.

 

그럼에도 모를 것이야.

추사의 먹 맛을 혼자 도취할 것이

분명해 보이지만 수월관음도와

모란 백자와의 완성을 자네는

알지, 해서 아득할 거야.

 

먼저…….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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