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총련 위원장 및 아트코리아방송 칼럼니스트

소극장-

시네마-극장, TV 콘텐츠의 성형은 시네마-극장이 아니라 연극극장에서 시작된다. 희곡대본과 함께 꽃피는 배우의 영혼에서 연마된다. 물론 문학의 혼과 만나고 있음이 분명하다. 연극 소극장무대에서 펼쳐지는 인문학강좌의 멋을 요구하고 있다. 필동, 와룡동, 국악로 거리의 조그마한 소극장에서 문화담론의 생명을 공유하는 시작점은 무엇을 잉태하고 있을까. School의 영혼이 담금질되고 있다.

갤러리-

대한민국 전통문화제1거리 갤러리에서 문을 여는 인문학의 뿌리는 탐스러울 것이 분명해 보인다. 골동과 문화유산 아티스트의 혼이 깃든 아뜨리에, 작업실, 갤러리, , 문화거리의 정취를 온전히 틀어 안고 펼쳐지는 시나리오는 무엇일까. 적어도 대한민국 전통문화제1거리의 혼을 담은 인문학이 될 것이 자명하다. 일월오봉도 붓 봉이 성성한 인사동거리의 갤러리다.

인사동 박물관학교-

역사의 퇴적층은 결코 박물관, 미술관, 규정지어진 다큐, 고상한 책속에 숨죽여 깃들 수 없다. 버려지거나 부서질 수밖에 없는 골동품 흠결을 떠안은 존재로부터 아우성을 부르짖는 구석진 모서리, 어둠속에서 걸음마를 배운다. 마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굴림 같은 소요다. 인사동 경매Story를 담아낸 난장의 복판에 인문학의 길이 살아있다. 여행, 방송, 사진, 고전문학, 명품기획, 다큐, 국악, 연극,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옥션, , 일인미디어, 미술사, 애니메이션, 빈티지한옥 문화담론의 얼게가 꾸려짐은, 문화DNA, 언더그라운드, 가로수의 성찰이다.

연민의 영혼은 늘 위대함으로 귀결된다. 오늘을 연민하고 내일을 안타까워하는 것, 역사를 통렬히 사유하는 즐거움은 오히려 멋진 고요함으로 귀향한다. 어둠은 결코 빛의 그림자보다 어둡지 않거니와 피안의 절망은 오로지 차안의 성성함을 통하여 숨 쉰다. 그윽한 미소와 함께 강의 머리는 강의 꼬리와 같아서, 애국은 결코 그 응답을 요구할 수 없다.

많은 성찰의 지대가 있을지 모르나 온유함, 나약함, 소박함, 이지러지고 헝클어진 상처를 잉태하였을 때마다 이, 소박한 소요의 밭에 만나기를 요구한다. 이 벅찬 울림의 소낙비는 40여년의 절박으로부터 송아지껍질 장구소리에 잦아들었음을 밝힌다. 불현 듯 갑사계곡 각자를 읊던 선사의 미소를 음미하면서도 문학 동우회, 문화동우회와 같은 연민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기에 이지러진 강좌의 화분대를 꿈결에 올리게 되었다. School의 응변이다. 문화DNA, 언더그라운드, 가로수의 TextSchool의 온전한 손짓이다. 오늘 우리가 가야 할 길에서 당신을 맞이하는 차 한 잔과 같다.

문화DNA

1차 산업혁명의 중심에 우리 모두가 함몰되어 있음이 명백해 보인다. 혹자는 경쟁을 위하여 또 다른 부류는 존재성을 위하여 디지털혁명의 패러다임을 읽고 있다. 테두리를 지키거나 책임진 파수꾼을 허블망원경, 전자현미경, 실험을 주시하듯이 경고하고 있다. 4차 혁명의 파고를 타고 유유히 즐기며 승자가 될 것인가. 퇴보의 낙오자로 남기를 원하는가. 라는 섬뜩한 시대담론이 이곳저곳에서 경고음을 생산하고 있다. 이른바 디지털시대의 성장통 진입이자 어느 시대에서나 있을 법한 진화, 진보, 이념의 빵빠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풍의 회오리 중심에 티끌처럼 위태로웠던 존재의 모형은 멀쩡해 보인다. 도시, 산업, 정보, 기술 따위의 얼개들이 휩쓸고 간 자리에 멀쩡히 도사리는 유령은 과연 무엇일까. 1, 2, 3, 4차 산업혁명의 파고 속에서도 투명인간처럼 살아 숨 쉬는 실체가 있다. 다름 아닌 너와 우리이며 자연이고 마을이다. 이러한 징후는 5, 6, 7차 혁명이 지속되어도 유령은 살아 존재할 것이 자명해 보인다.

예컨대 디지털혁명이 가속될수록 아날로그 혁명의 가치가 되살아날 것이 분명하다. 인류의 기술문명이 첨예화 될수록 자연, 환경, 예술적 가치를 담고 있는 문화산업의 가치는 그만큼 높아진다. 도식적 개념의 역설이자 반작용이다. 과연 이러한 등식의 개념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 것일까. 오히려 물질과학의 팽배는 정신과학의 에너지를 응축시킬 뿐이다. 다만 우리는 이러한 현상의 교착 점을 문화현상으로 정립하려 한다. 문화생명력의 DNA.

문화생명력의 DNA는 유령이다. 창덕궁 소극장, 관훈갤러리, 인사동 박물관학교, 몽유도원도, 용비어천, 그곳에 스민 유령임에는 틀림이 없다.

조각난 향기로 부터

삼청동 삼청공원은 으뜸 유락 지이자 명품공원이다. 다만 북촌열풍이 불어도 가회동 한옥거리만큼 사랑받지 못할 뿐이다. 경복궁 뜨락을 중심으로 한류 열풍을 타고 한복산책로가 유행이다. , 청소년을 비롯하여 외국인 관광객도 한복을 대여하여 입고 활보한다. 북촌에서나 만날 수 있는 진풍경이다. 매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스마트 폰 앨범은 파노라마처럼 기록된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 불고 있는 복고열풍의 단면이자 북촌현상이다.

다시, 삼청동 삼청공원으로 자리를 옮겨 본다. 어찌하여 5, 60년 전만 해도 이곳을 서울의 제1경이라고 칭송하며 사랑을 하였을까. 조선 5백년 일제 강점기와 근대화 1백년의 시절동안 삼청동계곡을 탄미하였을까. 오롯이 꽃피는 늙은 벚나무 가로수 길이 장관이긴 하여도 설득력이 없다. 금강송 몇 그루 용트림하듯 듬성듬성 마주쳐도 큰 감명을 얻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삼청동 후미진 무허가촌 영운곡 계곡을 살펴보아도 금수강산 어느 곳에서나 마주칠 산하 계곡의 멋에 머무르고 있다.

조계종 본산 선학원의 반석을 세운 칠보사의 연혁 속에서도 아스라한 일제 우리 얼 말살의 잔재주만 나뒹굴 뿐 북소리 저미듯 밀려오는 그 무엇은 역시 오리무중이다. 여하튼 북촌 한류열풍의 온도계는 가회동 산마루, 즉 병풍바위 언저리에서 멈추고 있다. 삼청공원 영운곡 계곡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국무총리공관 앞 병풍바위에 아로 새겨진 삼청동문의 휘호는 신축건물 상가에 가려져 있을 뿐이다.

어찌되었든 선학원 본산 칠보사에 주석하신 강석주 스님의 원력은 오늘날 한국불교의 맥을 고추 세웠음이 분명하다. 그분과 선맥의 교류를 하셨던 야석 박희선 선사님의 선돌은 칠보사 앞뜰에 도도함에도 불구하고 느티나무 범종소리는 오늘도 요요함이다. 그 느티나무의 아버지 격은 앞뜰 주차장 옛 무당집 느티나무인데 아직도 성성하다. 영운곡 계곡을 넘어 느릅나무와 계수나무가 홀연히 버팅기고 있다. 삼청동 솔밭은 옛정취의 으뜸이었다. 그 뜨락을 삼삼히 돌이키면 경복궁 뜨락까지 도도하였음이 분명하다.

이 몇 가지 이야기를 들고 인사동 회화나무 골 뜨락을 읽다보면 어느덧 조계종 본산 조계사 회화나무와 청와대 서쪽 켠에 버팅 기는 회화나무의 울림을 읽게 된다. 조각난 삼청공원의 향기다. 삼청동에서 태어나 삼청공원을 뜨락으로 유, 청소년기를 보낸 나로서는 이와 같은 조각난 향기의 원형을 알려야 한다는 소망에 이르게 되었다. 물론 디지털혁명의 반발력을 충분히 사유한 뜨락에서 부터다. 문화학교의 정수를 논거 하는 실타래다. 유령의 세계를 읽는 문화의 DNA.

언더그라운드

문화현상은 오히려 언더그라운드의 소산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 모든 장르의 완성은 거침없이 언더그라운드의 늪을 관통한다. 오락의 뿌리는 도박이다. 이념의 뿌리는 분노와 이탈자에서부터 시작된다. 현대 산업문명의 도가니에서는 오히려 언더그라운드, 아웃사이더, 레프트, 따위의 얼게로 부터 고고한 아트 명제의 정의가 꽃피고 있다. 단 문화현상의 넓이와 증폭은 승화 점을 기반으로 한 패러다임이다. 히피니즘의 해학은 오히려 인류평화의 상징 기호처럼 통용되듯이…….

미식축구의 근원은 땅따먹기 식 정글세계 희화였음에도 불구하고 스포츠 문화장르를 뛰어넘어 미국문화의 거대한 축제요 산업장르로 자리 잡고 있다. 금을 찾아 떠난 이들의 본성은 약탈자와 모험가의 외줄타기였다. 그럼에도 LA, 라스베이거스의 불빛은 결코 약탈자나 모험가의 모습이 아니다. 멋진 문화의 향기가 뿜어져 나온다.

사람을 즐겁게 하는 마을이자 아메리킨 드림의 아이콘이다. 이른바 도박 유흥문화의 성자로 불려진다. 리그와 소더비, 크리스트 경매의 뿌리는 오히려 소소할 뿐이다. 월가의 금융시장의 열기만큼 뜨거운 유럽의 리그산업은 소더비, 크리스트 경매의 생명 성을 읽는 관점이 요구된다. 문화생태계의 진화 본질이다. 자가발전을 계속하여 문화 순련의 과정을 거듭하는 유럽문명의 체계다. 문화에 대한 개념이 우리의 관점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성찰의 지대가 작동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관점과 개념으로부터 인사동 500만원 박물관학교, 커리큘럼을 Text로 완성하였다. 켜켜이 묻어나는 학문 얼게들 또는 빛나는 문화체계의 난해함을 일거에 허물어 버리는 퍼포먼스가 옥션(Auction)이다. 하잘것없는 오브제로부터 유리관 속에 고이 모셔져야할, 금고 속에 꼭꼭 숨어 있을, 그 무엇도 경매 패러다임의 소요다. 문화유산의 광장이자, 소통이다. 다만 이와 같은 현상을 현상으로 방류할 것인가! 문화사적 순련의 과정을 음미할 것인가는, 시대 담론의 몫으로 규정했다. 대한민국 문화광장에 필수적인 과목으로 자리매김한다. 커리큘럼이라는 틀 거리 속에 제도화하지 않아도 살아 숨 쉬는 과목으로 숨 쉬게 한다.

역사(歷史)의 퇴적층으로부터 화석화된 유물, 즉 골동의 정의가 아닌 살아 숨 쉬고 향기가 나는 오늘날의 동반자로 유물, 골동품을 환원시키는 문화산업이다. 인사동보물찾기-박물관 커리큘럼의 생명은 명쾌한 정의다. 문화는 살아 숨 쉬며 결코 역사의 퇴적층으로 규정되기를 거부한다.

고고학 또는 박물관학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 비해 뿌리가 깊지 않다. 다만 역사라는 이념 위에 꽃핀 문화의 정수다. 고고학, 박물관학은 근대 아트산업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또한 오늘날의 명품생명과도 소통하고 있다. 명품은 계속적으로 옥션을 통하여 생명 성을 부여받고 환원된다. 메이저 경매인 소더비, 크리스트는 오히려 문화척도의 온도계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과연 그 자체일 뿐인가? 우리가 안방에서 목도하고 있는 진품 명품 TV오락물의 얼게 속에는 이와 같은 현상이 작동하고 있다. 관점은 명백하다. 퇴적층, 퇴물, 버려지거나 도태되어버린 모든 것이 박물관 프로그램에 서는 주요한 텍스트로 환원된다. 물론 문화생태계의 건강 지수에 따라 설정된다. 관점의 정의다.

언더그라운드의 미학은 늘 유효하다. 그 자취가 순명 적으로 존재하는 곳이 인사동 경매이자 오래된 미래다. DNA의 유령은 오래된 미래의 동반자다. 인사동 박물관학교의 수제쯤으로 환원하기로 하였다.

가로수

성찰의 인문학이 요구된다. 마치 종로 가로수의 나이가 오십 여년을 거듭해도 1960년대 사유로 만나고 있다. 거듭되는 욕구이긴 하여도 나무에 이름을 규정하여 이모작삼모작 꾸리듯 포장하려하지만 가로수는 그 이름이 없다. 가로수일 뿐이며 우리와 함께 어느덧 환갑을 바라보는 성체다. 종로의 가로수는 우리 모두가 탐탐치 않아하는 외래종 플라타너스다. 가난한 대통령이 유럽 방문길에 설레듯 가져온 씨앗이 어느덧 오늘에 이르렀다. 씨앗날림이 알레르기 눈병에 좋지 않다는 언론보도를 타고 플라타너스의 낭만은 휴지조각처럼 사라졌다. 그 누구도 그를 찾지 않고 있다. 잊혀진 것뿐만 아니라 버려진 가로수다.

플라타너스의 나뭇결은 용트림이자 이국적이다. 백송을 칭송하듯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나뭇결의 빛은 무지갯빛처럼 영롱할 뿐인데. 창덕궁 앞뜨락 플라타너스 가로수는 명품임에 틀림이 없다. 물론 대학로, 종로, 인사로의 하나하나마다 절묘함이 돋보인다. 그들이 아로새겨놓은 수도 서울 중심 가로수를 읽는 마음이 우리가 인문학을 보는 경계다. 멋진 소나무, 가로수 설정도 요구된다. 그러나 어찌 60여년의 풍파를 온전히 떠안은 플라타너스의 나뭇결에 비할 수 있을까. 가로수는 그 자체가 존재다.

시대담론은 치열함, 냉철함, 광의적 사유, , 철학적 배태 위에 선 순명이 존재한다. 허영의 인문학의 설파만큼 중대한 오류는 없다. 오히려 지극히 온전함을 온전함이라하고, 부족함을 채우기 위하여 온갖 지혜의 노력을 경주하기 위한 텃밭으로 경계함이 옳다. 그 증좌의 가로수 경계다. 난무함이 넘쳐 오히려 버겁기까지 한 진보논리의 나팔수들의 현란함은 가시처럼 솟구쳐있을 뿐, 장대함과 온유함을 상실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성찰의 인문학이 절실한 이유다.

의류 패션사업은 백화점산업의 뿌리와 만나고 있다. 명품 전통샵 철학과 치열한 경쟁구도를 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미국, 이태리, 프랑스, 일본의 백화점, 명품 전통샵, 카르텔은 유효하다. 일종의 문명패권주의 노획물이자 권력구도다. 그럼에도 하청, OEM, 구도에서 허덕이던 아웃사이더의 반격은 치열해 보인다. 중국, 일본, 한국 주도의 문명패권전쟁은 예견된 것이다. 의류 패션사업은 그 영역이 광대하다. 문화산업 전반의 패러다임과 깊은 상관성을 유지한다. 이른바 문화생태계의 정의다. 1,2차 대전, 냉전, 탈냉전, 글로벌시대를 넘어서며 직면한 디지털혁명과 4차 산업 혁명의 도가니는 우리에게 보다 명확한 개념을 도출하고 있다. 명품생태계 관찰과 실험실 운영이다.

가로수담론의 이야기는 허기진 우리의 초상이다. 또다시 허영에 가득한 가로수종을 심어 서울거리를 도배하려는 어리석음은 큰 차와 큰 아파트, 큰 명예를 꿈꾸는 탕자의 문화를 쫓는 사유다. 버겁지만 온전히 걸어온 오늘의 인문학은 매우 정교한 관점정립을 요구한다. 백화점의 생태계다. 우리의 직구문화의 열정을 돌이켜보는 자리, 즉 본질로의 회귀를 요구함이 마땅하다. , , 일의 명품생태계의 게놈 지도를 읽는 인문학강좌다.

가로수의 경계는 문화 DNA의 유령을 만나는 성찰의 담론이다. 세상의 이야기를 온유하게 읽는 힘이다. School의 깃발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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