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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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동 칼럼니스트
  • 승인 2018.12.03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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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고흐라는 사유를 읽다보면 오히려 격정적이었던 예술 혼의 등불 밑에 온전한 지성의 밭이 부럽다. 인상주의에서 내달은 팝아트의 개념 꽃 봉우리가 우리 삶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원대함이다. 고흐 그 자체가 아니라 그가 담고 있는 생명력이다. 몽마르트 언덕의 신화일 따름이다. 고흐와 함께 한 아티스트가 갈망했던 예술 혼은 온전히 우리 삶속에 녹아 있다. 마치 프랑스혁명, 산업혁명이 이룬 인류 문화의 진보처럼 스며있다. 과연 혁신이라는 화두는 무엇일까. 단지 기업 생명을 창조하기 위하여 시장살아남기뿐일까.

우리는 스타벅스-블루보틀의 제3의 물결을 목도하고 있다. 고흐라는 명제는 그들과 겨룰 아트철학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영혼이 있는, 커피철학이 있는 커피는 제3의 물결을 이끌고 잇다. 마치 몽마르트의 언덕에서 빚어진 인류문화의 진보를 위한 역정 같은 도전이다. 몽마르트신화는 그저 아티스트의 도전에서 머문 예술행위가 아님을 직감하는 기획자가 요구되었다. 마치 일단의 혁명에 동참할 그룹이다. 이를테면 여행, 박물관, 민화, 문화, 뷰티, 그리고 커피를 찾는 구도자 같은 참여다. 오래된 미래의 명제에 걸맞은 행보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늘 유행처럼 잦아드는 것처럼 온통 커피숍이 거리를 점령했다. 도시마다 공간을 내주고 있다. 과연 그럴까, 그뿐일까. 누군가는 이 현상을 문화사적으로 읽고 돌이켜 봄직한데 그와 같은 담론의 장이 마련되어 있을까. 예컨대 구멍가게, 슈퍼마켓의 존재를 일거에 밀어낸 편의점 현상은 오히려 우리의 유통 소비문화를 변모시켰을 뿐만 아니라 유의미한 시대의식을 진화시켰다. 효율적 소비패턴의 정착이다. 청소년 알바창구로 역할을 하는가 하면 소량다품종 상품 패턴도 살아남는 유통생산 패턴상품 사이클이 작동된다.

오락실, 치킨, 피자 프렌차이즈 열풍처럼 숨 막히는 유행상품의 패턴과 커피는 무엇이 다른가. 고흐라는 이 엉뚱한 예술가의 퇴적층을 들추어 봄즉한 꺼리가 될까. 온통 미디어 오락물은 먹고, 마시고, 놀고장식처럼 꾸려지고 있다. 그저 레시피 타령처럼 흘러간다. 적당한 유행병처럼 그렇다. 도시의 풍경도 그저 그런 것 아닐까. 우리 도시의 풍경 속에 커피숍또한 그렇지 않을까.

몇 가지 분명한 사실은 모방의 천재였던 일본의 굴기를 살펴보면 그 답이 명백해 보인다. 모방-창조의 궤적을 남달리 독보적으로 왕성하게 배태시키는 일본 문화의 영속은 오히려 그 자체가 독보적인 개성을 답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타벅스- 블루 보틀과 같은 궤적을 내재한 명품커피숍은 아직 시장에 내놓지 못하고 있다. 전자, 만화왕국의 전성시대가 저물고 그 여정의 끝은 아직 모르지만 우리가 차는 테제는 없다. 오래된 미래의 얼개는 커피문화이야기다.

우리는 테제를 인사동 골목에서 출발하고 있다. 고흐, 몽마르트 언덕의 신화를 위한 헌증이다. 일명, 박물관이야기를 다독거리고, 아우르는 감성 대를 연마하면서 커피의 향을 북돋는 촉매제로 삼았다.

온통 사라지거나 사라질 것을 운명처럼 떠안고 있는 골동, 문화유산, 쓰레기 사이의 마당에서 커피문화의 담론을 감히 이 세상에 헌증한다. 물론 이야기는 여기에서 함몰되지 않음을 우리 모두는 공유했다. 고흐가 일찍이 관통한 인상주의의 궤적은 우리 일상의 시대의식의 색감, 즉 팝아트의 유기체를 떠안기로 하였다. 극도의 시대의식을 장착하는 기획담론이다. 모두에게 다가갈 ART의 옷을 마련했다. 박물관이야기와 커피다. 물론 우리는 서울거리의 유용성과 책임감에 주목했다. 여행 산업의 국제화다. 이미 서울의 모든 숍은 국제적 관광 문화산업의 일원이 되었다. 마땅히 커피숍은 관광산업의 공동유기체다. 관광 산업의 동반자이자 영역이다. 여행카페의 역할에 주목했다. 바리스타-트러블 플래너와 같은 시스템을 창조적으로 설계했다. 이른바 여행숍 설계다. 커피숍, 여행, 박물관의 융합 설계는 가능한 경쟁력을 답보할 것인가는 우리 의도의 성공열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대의식의 담론에 방점을 찍었다. 온통 커피숍으로 도배되고 있는 거리문화의 정화다.

오래된 미래의 타당함은 오히려 커피역사의 장구함에 비추어 결코 엉뚱한 제안이 될 수 없다. 600여년의 커피역사는 가히 생활문화의 혁명서와 같다. 진보, 진화의 얼개로 규명하기엔 그 가치가 심대해 보인다. 다만 고흐의 생명 성을 융합시킴이 있어 우리 모두가 유의하여야 할 과제는 진정성이다. , 철학임에는 틀림이 없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고흐이기를 소망한다. 적어도 커피문화의 열정이 그렇다는 것이다.

오래된 미래의 시작점은 궁의 박석에서 차용되었다. 600년 전 조선개국의 터전은 궁의 박석 정신이 아니었을까 하는 명제가 커피문화의 담론으로 환원되었다. 우리의 궁 박석은 투박하고 자연석에 가깝다. 봉건 궁 유산에서는 볼 수 없는 모형이다. 기층민의 노역을 덜어주기 위한 봉건주도세력의 배려로 탄생한 형태다. 조선 궁의 박석문화다.

조선 궁의 침탈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함몰 기를 맞이한다. 또한 근현대화를 거치며 극심한 망각지대를 관통하게 되는데, 주사위 바닥처럼 궁의 박석을 복원하는 슬픈 테제가 존재한다. 그것을 치유하기 위한 명제로 삼은 오래된 미래였다. 인문학담론의 차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흐-몽마르트 언덕의 얼개에는 커피, 여행, 뷰티, 문화, 박물관친구들이 함께 동행한다. 수도 서울의 원대한 담론이다. 커피가 아니라 커피문화를 창조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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