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코리아방송 = 김한정 기자] 종로구 평창 36길에 위치한 금보성 아트센터 1관에서는 2018. 12. 1(토) ~ 2018. 12. 17(월)까지 이흥덕 展이 열리고 있다.

이흥덕 展

불안의 진술, 그 저항의 에티카

감각. 인식하기 이전에 보고·냄새 맡고·피부로 느끼고·듣는 행위로, 쾌·불쾌·상쾌함·두려움 등을 느끼면서 세계를 직관적으로 입수하는 본능. 그때 사람의 몸과 신경은 경직이나 이완 등으로 자동 반응한다. 그리곤 왜 자신이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를 생각하고 분석한다. 즉 감(感)이후에 지(知)로 그 감을 확인한다는 것. 불안은 그런 분석과 판단(知)의 결과가 불명료할 때, 혹은 명료하되 거기로부터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했을 때 지속되는 고통스런 심리현상이다.   예술가는 대체적으로 예민하다. 주변과 환경, 그리고 자신 내부의 심리현상에 대해서 민감하다. 이흥덕 그림은 그가 체험한 삶의 현장에서의 사람들에 대한 날 것의 감각과, 그 감각을 분석한 결과와의 일치/어긋남으로부터 기인하는 불안을 기록한 다큐이자, 그 불안의 기저를 탐험하는 심리도해다. 기민한 감수성으로 입수한 자신의 현실과 사회적 제 문제들에 부대끼면서 작성한 보고서이기도 하고. 그래서 그의 그림은 작업의 동기도·소재도·서 도 불안에 관한 것이며, 또 그런 불안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현실을 연역하고, 그 불안을 타파하려는 실존적·사회문화적 행위이기도 한 그런 것이다. 즉 바깥으로부터 입수(감각)되어 자신에게 내재된 불안(심리)의 자연주의적 관찰 및 서술의 진료기록(분석)과, 궁극적으로는 그 불안을 정면으로 마주보고 대응하는 행위로서의 자기해방을 지향하는 그림그리기(표현)가 합쳐진 그의 존재론적 태도이자 실천으로서의 작업인 것이다.  

이흥덕 展

이흥덕의 불안은 오래되었다. 1980년대 초기 개에게 쫒기는 사람의 불안을 통해서, 동시대적 폭력과 야만을 형상화한 지 35년이 되었다. 물론 그가 그림으로 자신의 내부를 공개하기 훨씬 이전부터, 그의 무의식에 또 어떤 원형적 불안이 자리하고 있을 수도 있다. 다만 여기서는 그가 외부로 발설하고 물화시킨 그의 작업만을 기준으로 삼자. 그 기준점은 1985년 그의 첫 개인전을 통해서 보였던 불안에 관한 일기와 같은 회화의, 개에게 쫒기는 사람이나 옆 눈으로 눈치 보는 사람 등의 소시민성으로 상정할 수 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불편했고 불안했고, 그런 자신을 기록/표현함으로 그 불안에 대응 내지는 저항해 왔다. 그의 내밀한 심리작용과, 그런 심리작용의 원인이 되는 외부세계와의 물리적 정신적 폭력의 길항관계를 포착한 ‘형상성’으로 말이다. 그 형상성은 그의 외부세계에 대한 감각적 대면과, 그 대면현상에 대한 통찰, 그로인해서 그의 내면에서 작용하는 성찰이 버무려진 결과로 생성된 관계론적 이미지다.

이흥덕 展

그 서술적 형상들은 지시적 ‘기호’가 아니다. 화면에 묻어있는 그의 작업궤적과 흔적은 ‘불안’의 알레고리이자, ‘폭력’의 상징이다. 기호가 아닌 상징이므로 그것은 모호하다. 다만 그 상징에도 일종의 단서들이 여기저기 붙어서 그의 상징에 해석의 코드를 제공해 준다. 은유·비유·환유·풍유에 의한 이 풍자적 레토릭들은 한결 그의 그림을 풍부하게 만든다. 상황설정·색채·형태 등의 회화적 양식과 자유로운 붓질의 구사에 덧붙여진 비정형의 표현적 형식언어들과 함께 한층 더 중층적으로 작용하면서, 그의 내면의 불안과 사회적 억압을 증명하는 발언으로 확장된다. “뻔”하지 않은 회화, 이흥덕 특유의 언술과 회화적 어법이 결합된 프로세스가 제공하는 미적 쾌감이 거기에서 발생한다.

이흥덕 展

그리고 불안과, 그 불안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저항으로써의 언표행위인 회화적 형식의 실험과 변주를 지속적으로 진행해 온 지 30년이 훨씬 지난 근작들에서, 이흥덕은 충분할 만큼의 형상미학적 성과를 거두고 있는 듯하다. 이번 전시의 주축이 되는 흑백목탄 그림과 초록의 유화 모노크롬 회화 대작들은 ‘그리기방식’과 ‘말하기방식’ 모두에서 그 미적 성과를 충분히 증명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럴 때 그의 작업동기이자 출발점이 된 불안은 그 불안에의 저항을 야기하는 작가적 태도로 연결되고, 그 태도는 사회적 실천이라는 일종의 작가적 윤리에 도달한다. 이흥덕에게 있어서 작업은, 곧 그가 그답게 살아가기 위한 실천이자 그 실천의 토대인 일종의 윤리학이라 하겠다. 꿈이 꿈이다. 현실과 어떤 관계도 맺지 못한다. 그런 꿈은 대개 잊혀 진다. 기억에서 자동으로 소멸하는 그야말로 ‘꿈’이니까. 그러나 꿈이 꿈만이 아닌 현실과 불가분의 관계맺음이 될 때가 있다.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분위기이되 분명하게 감지되고 인지되고 각인되는 팩트, 이른바 ‘꿈같은 현실’일 때가 그때다. 이럴 때 그 모호한 이미지는 요동치며 현실성을 증폭하고 현실에 더 강하게 개입하고, 그 혼란과 두려움은 일상에도 영향을 끼친다.

이흥덕 展

시대는 정치·자본·권력의 현실적 기표들이 온통 욕망과 뒤섞이는 유기적 생물체로, 이념과 이성을 뒤집는 카오스로, 마침내는 요지경(瑤池鏡)이나 만화경(萬華鏡)속의 몽환적 드라마로 우리들의 실재 삶에 등장한다. 범죄드라마나 컬트무비처럼 네가티브하게 현시화(現視化)되는 것이다. 드라마와 일상의 중층적 레이어가 합성된 팩트는 그야말로 흉몽을 복제한 듯 그로데스크한 이미지로 우리들의 정서를 공략한다.

이흥덕 展

고대 ‘신화’와 중세적 ‘이데아’와 근대적 자연과학의 ‘법칙’이 소멸하고, ‘수치(數値)’의 장악이 권력이 된 디지털 세상. 계좌에 찍힌 십진법과 이진법 알고리즘의 픽셀로 변주된 디지털 암호화폐의 숫자가 소위 ‘인문과 상식‘인 현 세상을 조롱하는 물적 토대인 실재 권력이다. 디지털 ’수치‘와 ’법칙‘이 ’신화적 권력‘이 된 세상. 강력한 이 알고리즘 숫자들의 질주는 우리들의 인식과 감성의 숨통을 조인다. 제어하기 어려운 자기증식성으로 그들의 주인인 우리를 배반하고 공격한다. 물론 이는 인간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다. 욕망 A를 취하면 욕망B가 부족하고, B를 획득하면 C가 부족하고, C를 채우면 다시 A가 부족한 결핍의 순환과 반복. 그 밑 빠진 결핍의 욕망 채우기에서 가진 자들의 권력이 그 부족함을 채울 때마다 빼앗긴 자들의 핍진한 시신은 여기저기 우수수 쌓인다. 이흥덕의 들판은 바로 그런 시신들이 쌓이고 묻히고 마침내는 썩어가는 현장에서의 피와 살점과 뼈, 그리고 숱한 질병들이 창궐하는 현장, 즉 폭력과 불안의 디스토피아에서 쓴 일기의 실존적 무대다.

이흥덕 展

그 무대에 등장하는 수많은 광경들은 마치 꿈속에서의 그것처럼 몽환적이되 역설적으로 너무나 지독한 현실을 가리킨다. 카페(1980년대)에서 나와 신도시(1990년대)를 향해 지하철(2000년대)을 타고 마침내 다다른 들판(근작의 무대)엔, 사대강을 준설하며 쌓아놓은 모래더미처럼 첩첩이 쌓인 인골의 피라미드와, 기껏 정도로 마실 작은 연못과, 구제역으로 매몰되고 있는 구덩이와, 메마른 잡초와 앙상한 나무 등걸만이 황량하다. 혼돈이 팽배한 아비규환의 들판이다. 구제역으로 살처분되는 돼지들이 구덩이에 매립되고, 다가올 A.I도 모른 채 돼지 사체를 호시탐탐 노리는 까마귀 떼, 그 들판의 우아한(?) 식탁에 올릴 잘린 상어나 고래 호랑이 사체, 그것을 몰래 뜯어 먹는 표범과 하이에나 떼, 물고기 두상 에 소 몸통의 기괴한 동물, 예수의 등을 주무르는 사탄과 춤추는 살로메, 멀리 자그마하게 십자가를 메고 가는 무력한 예수,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화폭에 담고 있는 화가 자신. 그 땅에 고이거나 스며드는 액체는 바로 그런 껄쭉한 피와 지방의 욕망들의 부패현상에 다름 아니다.

이흥덕 展

그곳은 또한 질량과 부피와 위치와 정체조차 종잡을 수가 없이, 소유·권력·명예·섹스·여가에 이르기까지 무한대의 크기와 속도로 그 탐욕을 독점하려는 욕망들의 무한 착취가 횡행하는 땅이기도 하다. 서류에 사인을 부추기는 사기꾼 해골과 속는 소시민, 돈키호테처럼 홀로 목마를 타고 돌진하는 짚단 인형의 저돌성, 요염한 원피스와 선글래스의 묘령의 여인, 준마를 타고서 천하무적 번개아톰의 가이드로 우아함을 뽐내는 여성 승마선수(와 그 뒤를 따르는 눈먼 자들의 행렬), 인공수영장의 벌거벗은 남녀, 그리고 해골무덤 주위에서의 탱고를 추는 신사 숙녀,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 목발을 짚거나 바닥을 기어서 어디론가 향하는 맹인과 사지 절단된 부랑인들, 지옥의 나찰에 의해 튀겨지는 사람고기, 그리고 맛있는 식사를 위해 기다리는 여러분이 그 들판에 함께 있다. 그런 요지경 들판의 배경으로 멀리 인골 피라미드, 바다, 세월호, 군사진지, 철조망, 미사일 발사, 핵폭발, 어찌 요지경 속의 세상이 아니겠는가.  그 도저한 불안의 서술과 표현은 이흥덕의 몸에 붙어있는 생래적인 정서의 기표일수도, 후천적인 경험에의 반응으로써의 기술(記述)이자 기의일수도 있겠다. 우리는 이흥덕이 제공한 그 많은 사건과 형상의 이미지들을 통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그의 감각과 함께 체험해 들어갈 수밖에 없다. 폭력적 자본주의가 횡행하는 분단국의 서사들이 상징적 형식으로 컨버팅된 형상성. 그 환유와 풍유를 통한 이야기와 회화적 갈무리는, 온전히 이흥덕의 일상적 직접체험과 미디어를 톨한 간접체험들 모두를 두루 엮어낼 수 있는 그리기의 공력 덕분이다. 이흥덕의 그림엔 직접 말하기가 없다. 대부분이 비유다. 그러면서도 그의 주제를 모호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고전적 서사문학의 풍부함과 모던한 형상으로 치환한 조형적 감수성이 가능케 한 그런 시각적 서술의 능력 말이다.

이흥덕 展

이 지옥도의 패러디는 인류의 등장 이래 지금까지 같은 구조와 패턴으로 존재해온 선/악의 문제를 근원적인 텍스트로 삼으며 고찰한 것이다. 지옥도가 불경의 삽화로 그려진 오래전부터, 또는 단테의 신곡이나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회화 이후 지금까지도 건축물과 의복과 소도구만 바뀌었을 뿐, 인간세계는 여전히 그와같은 불안의 세트장에 머물러 있다. 그 ‘지옥서사’의 구조에 우리들의 현실을 대입하면 리얼리티는 감소하지 않고 서사는 갈무리 된다. 바로 욕망이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기제라서 이 폭력성의 유지와 서술은 간단히 가능했다.  그런 욕망들이 횡행하는 우리시대를 이흥덕은 빠르고 긴박한 일상에서의 관찰을 통해 자신의 그림에 옮긴다. 그 요지경의 현장을 정교하게 보고·느끼고·관찰하고·기록하고·보고한다는 게 맞겠다. 마주한 사건과 현상 하나하나 그의 망막에서 뇌로 연결되는 감수성의 촉수에 걸린 순간부터 숨 가쁘게 회화적 장치로 인용된다. 아메바의 본능처럼 굳이 관찰을 전제로 한 응시를 하지 않더라도, 끈적거리는 그의 감성의 더듬이와 거미줄로 제 현실들을 직관적으로 포착하고 체포하는 것이다. 숱한 사건과 정보와 경험들이 복마전처럼 얽혀서 도대체 어떤 명료한 주제와 인식의 단서조차 제공하지 않을 듯한 복잡함을 재구성하면서. 그 연기(演技) 아닌 날 것의 표현방식은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신체 잘린 육체들의 고통처럼 생생하고 리얼하다.

이흥덕 展

근대미술의 시조격인 고야의 동판화집 <카프리치오스> 43번 작품제목으로 이런 게 있다. “이성이 잠들면 요괴가 눈 뜬다.” 중세의 온갖 비(불)합리적이며 폭력적인 세계를 겪으면서, 도대체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작가의 태도가 주제화된 연작 모음이다. 잠과 꿈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구분한 근대는 어떻게든 이 “요괴가 눈 뜬” 비이성적인 중세적 부조리를 단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성적이다. 이흥덕의 그림도 거기에 맞닿아 있다. 요괴를 부정하는 근대도 지나고 그 근대의 유산으로 ‘찬란한 문명(?)’을 성취한 현대도 100년 이상이나 지났건만 여전히 요괴가 눈 뜨고 횡행하는 세계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내면의 불안을 임상보고의 형태로 타자에게 공개하고 또 연대를 시도하는 작업행위로 말이다. 이는 보편적인 이웃과 더불어 인간욕망과, 욕망이 야기한 폭력과, 그로인한 불안을 바로보고 거기에 맞서는 ‘저항적 에티카(Ethica)’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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