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코리아방송 = 김한정 기자] 인사동에 위치한 인사아트프라자(박복신 회장)갤러리에서는 2018. 10. 10 ~ 2018. 10. 16까지 유묵필담 - 이승연展이 열린다.

유묵필담 - 이승연展

수묵화(水墨畵) 확장의 지평을 열다
허기진(동길, 전 향암 미술관 학예연구 실장)


붓으로 무엇인가를 그린다는 것이 어디까지인지? 묵(墨)의 깊이가 어디까지 와 닿는지 참으로 놀랍고 경이로워, 정문일침(頂門一針)이 가해지는 전시가 열렸다. 소재주의에 빠지지 않고 자기 방법론으로 내면성 탐구의 절정에서, 마치 요즘 화단의 수묵 결핍을 항변이라도 하듯 10m가 넘는 대작 15여 점과, 문인화, 기치화, 우리산하, 중국 풍경, 일상의 일기 같은 수묵화, 도자화 등 150여 점이 출품되었다.

화의지성(畫意至性)으로 탄생된 작품의 예술의경(藝術意景)을 가까이에서 목도(目睹)할 수 있어 개인적으로는 의미 있는 시간, 특별한 시간, 최고의 시간을 뜻하는 “카이로스(kairos)”라는 단어를 붙여보아도 될 듯한 서정(瑞丁) 이승연 작가의 작품전이다. 환력(還曆)에 걸 맞는 화업(畫業) 40여 년을 통해 “화가는 작은 조물주” 라는 말을 가히 실감케하였다.

유묵필담 - 이승연展

작가는 평소 오감(五感)을 조화롭게 하는 시간들을 붓끝으로 쏟아내며 유순한 순명(順命)의 실천철학을 강조하면서도 유유(愉愉)한 멋을 보여준다. 또한 전통적인 산수화의 준법(皴法)과 시점(부감(俯瞰), 앙감(仰瞰), 수지법의 구사를 넘어, 다른 현대적인 실경에 적합한 묘법(描法)과 용필(用筆)로 성어내 필어외(誠於內 筆於外: 마음에 성실함이 있으면 저절로 붓으로 드러난다)를 수미일관(首尾一貫) 실천해왔다. 그로 인해 그는 우리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글로벌이즘과 로컬이즘의 이중적 요구와 맞물려서, 화단에서 수묵화의 사회적 역할과 위치가 채색화와 상대적으로 차별화되어 수묵원본(水墨原本)의 지위가 흔들리고, 전통화법(畫法)의 지식에 사유개념 정도를 덧씌우는 수묵의 단편화 내지 표피화에 대한 추론적 연결망 정도의 사회적 인식에 대해 일배(一杯)의 자리에서 개탄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하여 그는 수묵에 대해서만큼은 우리 스스로 주체적 보급자여야 하며 나아가 커다란 명료성을 획득해가는 운동으로까지 발전시켜 수묵에 담긴 철학과 사유의 잠재력을 재발견하고 재탄생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이를 통해 분야의 궤(軌)를 같이 하는 미술인으로써, 치열한 성찰의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이번 전시는 수묵의 양적감, 질적감을 가감(加減) 없이 보여주면서 수묵의 진지한 연구와 깊이를 가늠하기 좋은 기회이다. 더불어 작가가 지닌 화법과 지금껏 다져온 함축능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개념으로의 수묵화의 세계를 확연히 증명해 보여주고 있다.

유묵필담 - 이승연展

<심상유곡>, <산음>, <아미산>등의 대작(大作)에서는 부감(俯瞰), 앙감(仰瞰), 또 다른 조감(鳥瞰)을 넘나드는 가변적 시점을 통해서 해천일색 (海天一色: 온 우주가 한 흐름)의 광활한 자연 풍경이 무아관찰(無我觀察)과 무심감응(無心感應)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발묵과 발산, 습윤을 통한 밀도 높은 묵(墨)의 쓰임새는 사물의 정신과 현상을 모두 표현해도 된다는 당위성과 표현의 한계를 긋지 않는 무한 상징의 먹빛으로 수묵화의 경직된 편견을 일시에 무너뜨리고 있다.

그리고 농묵준찰(濃墨濬察)에서 보여지 듯, 묵(墨) 육채(건습(乾濕), 농담(濃淡), 흑백(黑白)와 운필(運筆)의 삼요소(필압(筆壓), 필속(筆速), 필묵(筆墨)의 생경한 묵기(墨氣)가 충만으로 넘쳐 더 할 수 없는 응집된 중량감이 느껴진다. 아울러 세월을 품고, 사람을 품고, 역사를 품고, 온기와 위로를 갖고 누군가가 오갔을 길들이 수묵의 화면 속에서 오히려 선(線)이 되어 흰 획으로 찬연히 빛나는 것이, 마치 필단의연(筆斷意連: 획은 끊어졌으나 뜻은 이어진다)을 돌아보게 한다. 현실경(現實景)과 상상경(想像景)을 날줄과 씨줄처럼 심중(心中)에서 직조하여 현실경이 된 상상경과 체득된 현실경이 합해져 유동적인 기운의 흐름에 따라 도원도(桃源圖) 같은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것은 거침없는 구도에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내공이다. 이는 작가 자신만의 풍경을 축적해 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능력이다.

유묵필담 - 이승연展

<사계> 작품에서는 기억의 창고에서 풍경을 끄집어내듯 독립 된 계절에 연속성을 부여하였다. 이를 통해 일년이 공존하는 시간적 관계 변화를 한 눈에 볼 수 있고, 마치 그곳에서 예전부터 정주(定住)했던 것 같은 서정성이 시공간을 넘어 자유롭게 표현되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인다. 이는 한편의 장중한 서사시(敍事詩)를 감상하는 느낌을 준다. 작가가 이처럼 하나의 통일된 시선으로 보는 일은 시간균형과 거기에 존재하는 자연의 변화를 자기 자신의 심중(心中)으로 끌어들이는 강력한 조형의지가 작동되지 않으면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작업이다. 다채로운 발상에서 시작된 즉흥적인 공간 구성에서 자연과의 열린 대화를 과감하게 시도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귀로>작품의 경우 몇 백 년 자연의 지혜와 연륜을 담고 있는 듯 한 고목(古木)들 사이에서 인고(忍苦)의 세월을 침묵으로 나타냈다. 인생연륜을 고스란히 보듬어 안고 인물과 고목을 잘 대비시켜 표현해 내고 있으며, 나무의 선(線)적 요소와 바위의 면(面)적 요소까지 혼합병치(混合倂置)를 염두에 둔 과감하고 세련된 조형적 표치(布置)는 필묵심미(筆墨審美)의 정수를 유감없이 발휘해 내고 있다. 가행(加行: 가고 싶고), 가망(加望: 보고 싶고), 가유(可遊: 즐기고 싶은)의 마음이 이는 <황산에서>, <태항산>, <고행산길>, <고산일교>, <안탕산>, <귀향>, <황산서해>작품들에서는 근경(近景)을 크게 부각 시켜서 오히려 공간의 깊이를 아득하게 해주어 화면에서 핵심이나 주재를 더욱 선명하게 유도해 내고 있다. 이는 시원스레 펼쳐진 여백에서 조차 일정한 구체성과 설명적 요소를 묵시적으로 내포하면서도 번잡스러움을 벗어나 담백한 조형세계로의 수렴(收斂)을 보여준다. 그로 인해 오히려 풍부하고 융통성 있는 자연관조의 상상여지를 제공하여 필하무일점진(筆下無一點塵: 붓 아래 세속의 티끌 한 점 없는)의 유심청원(遊心淸源)한 심미(審美)정취를 느끼게 한다.

유묵필담 - 이승연展

또한, <황토길①, ②>, <산자락 물자락>, <흐르는 물처럼> 작품은 남도의 황토 빛 대지에서 하늘, 땅과 그리고 우리와의 관계성으로부터 소통과 질서를 엿 볼 수 있다. 향토시심(鄕土詩心)을 시각화하는 질박하지만 고즈넉한 우리네 색채로, 언덕, 고향이라는 보편적 회상과 거기에서 오는 안온함 마저 느껴진다. 하여, “원산(遠山)은 암암(暗暗), 근산(近山)은 중중(重重), 기암(奇巖)은 층층(層層), 매산은 울어 천리”, 라는 수궁가의 “고고천변(皐皐天邊)”이 흥얼거려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형상(形象)을 곡진(曲盡)하게 묘사하기보다 심상(心相)에 따라 대담하게 변형하고 단순화시킨 <전원일기>, <순담계곡>, <무이산 계곡의 유람>작품의 화면에서는, 물빛이 하늘빛이고 하늘빛이 물빛인 변화의 새로운 질서 속에서 채움과 비움을 적절하게 걸러내는 성균(成均)의 균형감각이 돋보인다. 혼용된 수직과 수평구도가 갖는 단조로움을 과감하게 파괴하는 수직구도로 그 시선 확장의 변주를 과감하게 확대시도하고 있다.

동양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서양의 풍경은 고정된 시점에서 애매한 풍경내지 정지된 풍경이다. 하지만 동양의 산수(山水)는 산과 물 사이 공기의 흐름은 물론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까지도 포함하는 포괄적의미의 유어예(遊於藝: 시, 공간에서 아름답고 여유 있게 노니는 것)의 조형언어를 과감하게 제시하고 있다.

<겨울풍경>, <동행>, <겨울산행①, ②>의 설경 작품은 항상 우리에게 자연의 순리와 봄을 향한 방향성을 제시하는 계절답게 설원으로 뒤덮힌 수평적 구도의 평온함이 너그러운 시각을 유도해 주고 있다. 그 속에서 동화(同化)되어 있는 점경인물은 각각의 스토리를 구성하며 자족적인 분위기를 전달해 주면서 화면과 잘 어우러진다. 더불어 청량함과 시원함까지 느껴져 무더운 복기(伏期)에 옆에 두고 감상하고 싶은 작품이다.

끝으로 10여점 출품된 문인화의 경우, 심간(深簡: 군더더기 없이 간소화함)을 행하고 속체(速體)를 통해 일필(一筆)이라도 지나치지 않고 일필(一筆)이라도 부족함이 없는 일품 일격으로 최초의 일필에 최후로 일필로 결정되는 심의(心意) 있는 작품들이 보여 지고 있다. 특히 <장학>, <고양이의 일상>, <풍요>등의 작품에서는 사색(思索)에 의탁하지 않으면 도저히 표현될 수 없는 미적 안목으로부터 시작된 기치화의 절정(絶頂)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일상과 주변을 결합시킨 다양하고 풍부한 작품영역을 통해 “그림을 그렸다기보다 그림 속에서 유희(遊戲)하는 작가”, “보편적 수묵의 깊이를 제대로 섭렵(涉獵)한 작가”, “본질의 주제에 폭넓은 성찰을 할 줄 아는 작가”, “수묵의 본령(本領)을 현(玄)이라 표현할 줄 아는 작가” 라는 수식어를 떠나, 우리는 이 작가의 그 유한성(有限性)이 어디까지인지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하여, “동산에 오르니, 노나라가 작게 보이고, 태산에 오르는 천하가 작다.” 라는 공자(孔子)의 현답이치(賢答理致)를 인용하여 더 큰 수묵의 산을 오르기 위한 오늘, 지금의 수묵표현은 “수묵 확장을 위한 찰라(札剌)의 시간이다”라는 기대와 덕담(德談)을 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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