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코리아방송 = 김한정 기자] 마포구 토정로에 위치한 갤러리 초이 2018. 10. 5 (금) ~ 2018. 10. 31(수)까지 설휘 展 'Sensibility of another line'이 전시된다.

설휘 展 'Sensibility of another line'

감성(感性)에서 감성(感省)으로 흔한 표현이다. ‘감성(感性)’이라는 말.

하지만, 감성의 과정과 그것의 다양한 변이를 이해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미학적 삶이란 바로 이러한 감성의 메커니즘을 통해 세계를 받아들이는 삶이다. 하나의 진실은 존재할 수 없다. “꽃은 아름답다.”라는 말도 참이 될 수 없다. 꽃은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탑재하고 그것으로 특정되어 피어난 것이 아니다. 단지 자연의 의지로 생겨난 그것을 아름답게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저 꽃이 아름답게 인식된다.” 혹은, “저 꽃이 아름답게 인식되지 않는다.”라고 말해야 참이 될 수 있다. 고정된 진실은 없으며, 바로 이러한 진실의 ‘비고정성’으로 인해 예술가들은 존재할 수 있다.

예술가들은 대상을 인식론적 차원에서 바라본다. 존재론은 ‘절대 자연’이 바라보는 대상의 가치를 규명하려 하지만, 인식론은 임의로 자신을 개입시켜 한 가지 진실로는 어림도 없을 세계의 풍부한 마음을 헤아린다. 자연의 사실이 불분명할 때, 대상의 진실이 한 가지로 통일될 수 없을 때, 그것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은 인식론적 접근이다. 예술가들의 세계 인식은 감성을 매개로 한다. 과학자들이 인식하는 자연의 생태적·학술적 정의와는 그 궤가 다르다. 그들은 자연의 어떤 통일된 정의(定義)를 향해 가고, 예술가들은 통일된 정의를 해체하여 자연을 정의 이전인 원상태로 돌려놓는다.

설휘 展 'Sensibility of another line'

매번 바라보아도 새롭고 놀라운 자연임을 염두에 두고 생각한다면, 예술가들의 행위는 늘 옳을 수밖에 없다. 설휘의 작업도 그렇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선(line)과 빛(light)의 감성’을 화두로 꺼냈다. 작가는 형상을 구축하는 대신, 형상의 원인과 성장 과정을 보여주는 선과 빛의 재능에 주목한다. 이로써 자연의 거대한 원상태를 축소하려는 인간의 자만심을 헛된 것으로 돌리고, 감성(感性)을 인식의 도구로 삼아 삶과 세계를 감성(感省: 깨달아 살핌)하려 한다.

내가 보는 것은 무엇인가?

감성적 지각 혹은 직관(intuition)으로 세계를 보면 우리의 삶은 참으로 다채롭다. 교육받은 정보에 의지하지 않고 순수하게 직관으로 대상을 들여다보면, 세상의 의도치 않은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칸트가 말하는 ‘순수한 미’도 이렇듯 대상을 판단할 때 ‘무(無)목적성’을 전제로 해야 한다. 대상과 나 사이에 끼어드는 목적은 불순하다. 그것은 감성의 자발성을 위협한다. 자발적인 설휘의 풍경들은 그래서 아슬아슬하다. 풍경의 의미 구조가 불안정하고 변덕스럽다.

작가는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지닌 협소한 의미를 해체하고 풍경에 수많은 해석을 가능케 한다. 그의 작품 앞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이라는 순간에 ‘내’가 느끼는 자연이다. 대상이 고정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형태를 빗나가는 수많은 선들(lines)과 색의 파편들은 감상자의 고정관념을 단숨에 무너뜨린다. 작가에게 ‘순수한 미’는 바로 이 지점에서 생겨난다. 감성의 자발성을 위해 그의 그림은 안정과 확신을 과감히 포기한다.

설휘 展 'Sensibility of another line'

설휘가 조명을 회화에 이용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1995년부터 해오던 이 독특한 회화 방식은 천을 가공하여 앞·뒷면에 그림을 그린 후, 투과되는 빛에 의해 화면을 다르게 또는 강조해서 보여준다. 전원을 껐다가 켜기를 되풀이하면서 매번 새로워지는 이미지의 감정을 보여주는 작업이다. 작가는 이것을 ‘이중적인 화면’이라고 부른다. 기술적으로는 이중적이지만, 감상자 입장에서는 다중적이다. 무수히 많은 감상평이 쏟아질 수 있고, 무수히 많은 오해도 만들 수 있다.

그래도 괜찮다. 삶이란 되돌아보면 원래 수많은 오해의 연속 아니었는가. 어릴 적 하늘엔 착한 사람들이 날개를 달고 살고 있을 것이라는 상상, 크리스마스 소원을 빌자 다음 날 아침 머리맡에 놓였던 플라스틱 변신 로봇의 마술 같은 출현, 서울서 우리 반에 전학 온 저 예쁜 여자아이는 분명 나와 같은 사람이 아닐 것이라는 확신, 부모님이 천년만년 영원히 나와 함께할 거라는 순진한 믿음.., 사실 이 아름다운 오해들이 고단한 삶을 그나마 아름답게 지켜 주지 않았는가. 삶의 찰나성(刹那性)과 삶의 지속적인 진실 사이에 우리의 일상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생겨난다. 이미지를 교란하고, 그 자리에 ‘오해의 노스탤지어(nostalgia)’를 채워 내는 작가의 마음도 여기서 생겨난다.

설휘 展 'Sensibility of another line'

선(line)과 빛(light) 미덕

작가의 주된 표현의 방법은 선이다. 굵은 선, 가는 선, 긴 선, 짧은 선, 매끄러운 선, 거친 선 등, 여러 종류의 선들로 가득 메워진 화면은 이질적인 공간감을 만들어 낸다. 이곳은 대상이 아닌 선으로 만들어진 대상들의 공간이며, 여기에 참여한 색과 빛은 대상의 성질을 분해하고 감상자가 다양한 감성 작용을 일으키게 한다. 그래서 작가의 회화는, 작가의 표현에 의하면, ‘복합적 내용 자체’이다. 내용의 이야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용의 다차원적 발생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선·색·빛으로 이루어진 그의 회화가 어떤 특정한 풍경을 지목하는 것처럼 보일 순 있지만, 이는 모두 선·색·빛의 순간적인 조합일 뿐, 우리가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풍경은 아니다.

설휘 展 'Sensibility of another line'

그가 그린 화병도 이 조합을 표현하려는 방법으로 선택하였지, 재현의 목적이 꽃과 병의 외형은 아니다. 작가의 눈은 오히려 외형 안에 숨겨진 생명의 통로(줄기, 뿌리, 물관, 체관 등)가 보여주는 비선형적 구조로 향한다. 그가 그린 꽃들이 생화가 아니라 조화라는 점에서 의미는 더욱 각별해진다. 만들어진 것으로서 모조품(imitation)인 조화에까지 ‘생명 형식’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내가 구축한 공간이 풍경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는 모두 선의 조합이지 풍경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풍경처럼 보이는 선이다.”라는 작가의 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멈춰진 ‘풍경-죽음’을 극복하고 그것에 생명을 입히려는 강렬한 예술적 동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물(事物)과 인간 앞에서 겸허한 태도를 가진 미술가에게 ‘어떤 형상을 그리는가?’는 이미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가 그린 것이 꽃이든 조화든 풍경이든 상관없다. 인간의 감성 작용은 대상이 무엇이든, 대상이 비록 추상적일지라도, 그것에 살아있는 ‘느낌’을 부여하고, 타당한 ‘존재 이유’를 부여한다. <녹색선의 감성(2018)>이나 <돈키호테의 죽음(2018)>에서 볼 수 있듯이 작가는 죽어서 고정된 것들에 한없는 연민을 가지고 있다. 화면에 생동감을 더하는 색의 화려함은 작가가 품은 연민의 크기에 다름 아니다. 물론, 그것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에게 ‘살아 있는 그 무엇’은 될 수 있다.

설휘 展 'Sensibility of another line'

고정된 것에는 노래가 없다. 박자나 리듬, 멜로디는 모두 변화의 산물들이기 때문이다. 자연도 변화의 아름다운 되풀이가 있을 때 노래가 되고 살아있는 것이 된다. 설휘의 그림은 선과 빛으로 살아있는 감성적 실체를 보여준다. 그리하여 그가 대하는 생명과 자연은 미적 신비로움을 더해 그 존재성이 강화된다. <선의 감성> 展에서 우리는 존재의 숭고한 진실은 끝없이 분산되고 펼쳐진 세계 안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재걸

설휘 작가는 추계예술대학교 서양화과 졸업, 홍익대학교 대학원 회화과 졸업 후  다수의 개인전과 단체전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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