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이여,
우리가 지금 건너는 강이 어떤 강인지 알고 있겠지. 강물이 자네 발목을 적시면 오히려 창공의 새소리를 맞이하겠지만 자네 배낭에 담겨진 걸쭉한 막걸리가 그립지. 그런 소탈한 시상(詩像)이 어떤가! 이 강을 건너면 오도송의 만남을 읊조릴 것인가! 피안차안의 둑을 넘는 화두 같은 것인가!
아닐세. 자네의 발목은 차디찬 겨울이네! 계곡의 큰 뿔 사슴마저도 올빼미의 동공을 서글퍼할 만큼 세찬 바람결이 자네 겨드랑이를 팔 것이네! 왜 그런고 하면 우리는 이 길목의 차가움을 받아들이고서야 산골의 할매와 할배들이 처들던 굴뚝의 연기구름을 읽을 수 있거든. 가을 풍경, 빨간 고추잠자리와 고추된장 같은 풍경 말일세.
간곡히 말하더군. 시인의 탈을 쓴 고백이라고나 할까! 어둠은 결코 빛의 그림자보다 어둡지 않음을 늘 말하려하지 않았는가! 불꽃처럼 산화한 글장이다운 매듭 같아서 강을 건너봄즉 함을 토로하네!
늘 그러하듯이 징검다리와 여울목의 멋스러움은 지혜와 만나는 사람의 마음 결 같아서 정겹지! 하지만 요즘 볼 수가 없지 않은가! 우리가 하는 일이 물 한 방울에 지나지 않으나 물 한 방울이 없다면 바다는 그 만큼 작아질 것이라는 결정론적 온정주의를 설파한 마더 테레사 수녀의 직시도 어찌 보면 이 가엾은 징검다리와 여울목에 지나지 않을 걸세.
그럼에도 벗이여. 이 망측한 논리의 모든 것은 결처럼 소소한 것이어서 살결처럼 물결처럼 마음결로 파고들다가 시인의 일성으로 마주하지. 바람에도 결이 있어서라는 화두를 접하는 것이지. 아마 우리 발목을 족히 적시고도 남을 물결은 차안의 관통 아니겠는가!
늘 염두에 두고 있으나, 아는가. 산을 끼고 넘어야할 이 가난한 나라의 땅, 겨레의 숨결을 위하여 「화두」 삼아 오르고 잦아들기로 하세. 시인이 천대받는 사회는 병든 사회라는 시성 타고르의 외침은 결코 잊지 않아야할 발목의 서성임 아닌가.
문화를 잃은 가난함은
오히려 이 징검다리의 발목 차가움을 느끼는 것이라고 적네.
벗이여,
오늘 동방의 등불, 한줌 새겨봄이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