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코리아방송 = 김한정 기자] 인사동길에 위치한 갤러리라메르에서는 2018. 09. 05 ~ 2018. 09. 11까지  흔적의 기억 memory of trace_시간 - 이수빈展이 열린다.

흔적의 기억 memory of trace_시간 - 이수빈展

구조적 풍경의
조은정(미술평론가)

현대 한국화에서 수묵(水墨)은 전통 기법이라는 의미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백의민족의 개념을 담아 민족적 미술의 가능성을 담은 도구이자 일본적 채색을 넘어설 대안이었다. 그런 점에서 습윤한 먹빛으로 살려낸 백자 형상에 거칠게 질주하는 일필휘지의 선을 결합하여 서사적 구조를 만들어내던 젊은 작가 이수빈의 화면은 농익은 먹색과 함께 한국 현대수묵화의 전통 계승이라는 측면에서도 의미를 새길 만한 것이었다. 헌데 최근 그의 작업실에서 만난 화면은 먹의 스며듦보다는 종이 이면에서 드러나지 않음을, 한국화 종이의 부드러운 포용력보다는 거친 마티에르를 드러내는 물성들은 전통과 수묵이라는 언어에서 오는 선입견에 대한 혁명적 거부를 의도하고 있었다.

흔적의 기억 memory of trace_시간 - 이수빈展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흔적의 기억’이라 지칭하고 있었는데 이 명칭은 또한 작업 방식을 설명하기 위한 언어이기도 했다. 흔적은 심인에서조차 물질적, 물리적인 행위를 전제로 한다. ‘흔적’을 만들어내는 이유는 기억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고, 그 모든 표현의 궁극적인 지점은 시간의 고정과 형상화이다. 흔적은 시간의 층위를 가지며 각인의 과정을 통하여 기억으로 존재한다. 기억이나 경험이라는 관념을 물질로 고정시키는 과정에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한국화가 이수빈의 금번 작업은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현현이라 일컬어도 좋을 것이다. 반복적이며 지난한 육체적 노동의 과정, 즉 신체적 에너지를 투사한 전장터가 된 화면을 고요하고 빛나는 순간으로 고정시키는 연금술적 과정을 거친 때문이다.

작가는 흔적을 구현하는 방식에 전통적이지 않은 한국화의 표현법을 도입하였다. 비전통성을 견지하기 위하여 화판이 아닌 캔버스의 나무틀을 이용한다. 그 틀 위에 장지를 올려 판을 마련하고 전통 수묵화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안료용 금을 올린다. 이렇게 금을 펴서 올린 화면 위에 다시 닥지나 한지를 ‘쳐서’ 올린다. 팔의 무한반복의 노동을 통해 올려진 종이가 밀리고 얇아져서 밑에 들어 있는 금이 드러나면 다시 앞서와 같은 방법을 반복하여 화면을 만들어나간다.

흔적의 기억 memory of trace_시간 - 이수빈展

표면의 마티에르가 금박과 한지로 구성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뒤에 비치는 금은 짙은 황토색처럼 언덕을 만들기도 하고, 푸른빛을 띤 강물을 만들기도 한다. 사이사이에 슬쩍 집어넣는 채색들은 의도된 밑그림 없이 즉흥성을 띠고 형태를 찾아나간다. 이 과정은 마치 돌 안에서 형태를 끄집어내는 미켈란젤로나 로댕과 같은 조각가의 방식을 연상시킨다. 때때로 ‘한국화 화면의 배채법이 전면의 발색을 조화롭게 하는 것처럼 그는 화면의 뒤인 배면에서 치는’ 행위를 한다. 이것은 물감의 섞임이 아닌 전면과 후면에서 오는 외부의 충격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이쯤에 이르러서는 인지하지 못하는 고통의 근원과 그 자유스런 표현에의 욕구라는 상징의 위치에 행위의 정당성이 부여된다.

수묵에서 승하였던 작가가 종이에 과다할 정도로 금박을 사용한 것은 의외였다. 금의 용도는 회화에서는 눈을 끄는 장식이 목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가타 고린의 <제비꽃 병풍>이나 클림트의 <아델 블로흐 바우어 초상>에서 우리 눈을 사로잡는 것은 사실 화면 전면을 덮고 있는 빛, 황금의 위용일 것이다. 장식적인 화면을 만들어내는데 가장 유효한 금박을 이용하되 그것을 종이로 덮어서 드러내는 의미는 무엇일까. 과시의 수단이 되기도 하는 금을 덮는다는 것은 은폐, 그리고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드러낸다는 것은 숨겨져 있는 빛을 드러나게 하는 종교적인 기원이나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 나서는 구도의 행위와 같은 은유를 떠올리게 된다. 우리는 분명 ‘연금술’이란 단어를 잊지 않고 있다. 단지 금을 붙이고 덮고 두드려서 금의 성격을 얇은 막에서 두툼한 무게를 가진 바위와 같은 물질처럼 보이게 만든다는 사실만으로도 물질을 변화시키는 작가의 행위에 집중하게 된다. 막에서 덩어리로 변화하는 금을 바라보면서 에너지의 변환을 통해 이룩되는 완벽히 다른 물질이 된다는 것, 인간의 정신에 에너지를 투사하여 완전한 인성을 소유하게 된다는 아찔한 열망 같은 것이 또한 저 가슴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음을 본다.

흔적의 기억 memory of trace_시간 - 이수빈展

금을 사용한 이유에 대해 작가는 ‘가치’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치’는 금전으로 호환된다. 금은 세계적으로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점이다. 그런데 금전적 가치는 결코 절대적인 가치를 유지하지 못한다. 심지어 금 스스로도 변화하는 가격의 이동선 안에 있으니 금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가치는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 그 시간은 결국 변화할 수밖에 없는 조건의 결과로 인지된다.


헌데 작가에게 있어 물질로서의 금은 약혼반지로나 만나는 젊은이의 금이 갖는 의미와는 달리 매우 구체성을 띤 영역의 대상이다. 하수도로 물이 빠져들 듯이 많은 이들의 꿈을 끌어들이는 블랙홀 같은 금광에 대해 작가는 알고 있다. 이 젊은 작가에게는 번쩍이는 돌멩이들이 잠들어 있는 금광이 소설 속의 테마이거나 인간 욕망의 상징이 아닌 실재하는 세계였다. 아버지의 금광찾기를 보며 자란 작가에게 금은 보석가게 유리진열장 안의 번쩍이는 반지들이 의미하는 것과는 달랐다. 그것은 물질이었으며 가족들의 시간이었으며 아버지의 청춘이었고 일상으로 지칭되는 하루하루였다. 금박과 종이 그리고 물감들이 작가의 손에 의해 두들겨져 동일한 하나의 물체가 된 덩어리들은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 존재는 사라졌으나 지워지지 않는 잔영과 같은 흔적이 된다.

흔적의 기억 memory of trace_시간 - 이수빈展

그의 작품 안에는 가치를 상징하는 척도로서의 금과 먹이나 호분으로 그어지거나 방울로 떨어뜨려져 얼룩과 같아 보이는 인간 군상이 있다. 수평으로 퍼지는 안개를 담은 물과 허리를 펴는 나무들도 함께 어우러져 있다. 에너지를 투사한 두드림으로 인해 나타난 금과 우툴두툴한 물체들은 다소 관념적이다. 그런데 투명한 백자 사발 하나의 등장으로 이 카오스적인 세계는 구조적 풍경이 된다. 그렇게 가치라는 관념은 인간 역사와 함께 일상으로 귀환한다.

그의 화면은 전면성을 지니고 있지만 관람자는 결국 작가와 동일산 시선에 이르는 지점을 찾아낸다. 작품 안에 들어가 거니는 고사인물과 같은 마음이 되는 전통 한국화의 어법을 연상시키는 이러한 시각은 놀랍게도 우리 자신이 물상에 인격성을 부여하고 있음으로 인해 이루어진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금빛 마티에르가 상단에 위치해서 황금빛으로 흔들리는 나무 잎새에 퍼져나가는 햇빛의 일렁거림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 있다. 이 황금빛 얼룩 아래에 희미한 수직선들은 나무의 둥치와 가지로서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 그 아래는 짙은 먹과 밝은 호분이 엉켜 있어서 한겨울 어느 시골길에서 만나는 대지의 일부를 연상시킨다. 그런데 그 얼룩 위로 아이 손을 잡고 다니라는 표지판이 또렷하다. 불명료한 형태들 속에서 이제는 용도 폐기된 표지판이 오히려 강한 존재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아이들을 돌보는 어른을 위한 표지판이 필요없는 노인만 가득한 농촌에서 이 표지판은 그들이 한때는 아이들을 키워내고 돌보았던 존재였다는 기억을 확인시키는 지표로 작동한다. 화면 우측에 덩그러니 놓인 금박을 머금은 투명한 유리잔이 이 표지판을 바라보는 작가이자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이다.

흔적의 기억 memory of trace_시간 - 이수빈展

이수빈의 작업에서 물과 나무, 산과 같은 자연의 존재들은 표면에 노골적으로 부각되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것들의 모습을 하고 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드러난 것과 가려진 것이 공존하는 화면은 권력적인 관계의 은유와는 다른 구조이다. 그것은 분명히 있었던 사건이나 물건이지만 이제는 희미해진 옛일들과 여전히 건재한 건물이나 표지판이지만 곧 사라질 것들이 시간 안에 존재하는 방식이다.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이 언젠가 작가가 경험한 일상의 기록이다. 담벼락에 그늘을 드리우던 늘상 지나던 곳의 나무는 도로확장으로 사라져갈 것이고 투명한 유리잔은 생뚱맞게 화면 안에서 그 장소를 서성인다. 분명 존재하지만 사물을 가리지 않는 이 유리잔의 투명함으로 인해 관람자는 어느 한 부분조차 완벽히 가려지지 않는 세상을 만날 수 있다.

흔적의 기억 memory of trace_시간 - 이수빈展

사실 투명성은 그의 작품에서 이율배반적인 것이다. 표면에서 약간 흩어진 푸른색이나 붉은 색은 어린 시절 색칠을 겹겹이 올려 긁어내어 드러내 보여주던 색들의 층을 만들었던 것처럼 그렇게 화면에 올려진 것들이다. 하나의 점은 실은 한 주먹의 뭉텅이이고 넓게 퍼진 금박은 쌓아올려진 물질들의 외면이다. 그리하여 정연한 듯 하나 혼란스럽고, 단순하여 보이지만 다양한 색으로 구성된 화면이 전개되는 것이다. 유리잔에서 튀어오르고 넘쳐 흐르는 현란한 금빛조차 종이 뒷면에서부터 솟아오른 폭포에서 튀어오르는 포말과 같은 부분이다. 존재하지만 부분적으로만 드러나는 것, 우리가 알고 있고 기억하는 것 모든 것들의 은유적 풍경은 그렇게 조직화된 것이다.

먹으로만, 채색으로만에서부터 다른 재료와 개념의 사용으로 매체적 진화를 거듭하는 한국화의 현재에서 이수빈이 보여주는 이 몽롱하면서 장식적인 명료함의 개념적 세계는 새로운 것들 중 하나이다. 이 젊은 작가의 신체성을 담은 물질의 화면은 채색과 먹, 어느 하나 과하지 않다. 그런데 이 중용의 화면이 현란한 금 덕분이라니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가치의 규준을 제시하는 그 의도의 결과일 터이다. 금빛이 튀어다니고 호분이 넘쳐나는 화면에서 수묵이나 세밀 등 어느 부분만을 전통으로 삼은 한국화의 역사가 시정되는 한 걸음을 그가 내딛어 주고 있다. 우리 모두 숨죽이며 그의 걸음을 주시하는 지금이다.

흔적의 기억 memory of trace_시간 - 이수빈展

작가노트 | 일상에서 | 빛을 보면서, 담장 뒤를 상상하면서, 대상을 보고 결정하고 생각하며 판단한다. 이런 모습은 기억 또는 발견하는 모습, 가치를 찾거나 광산에서 금을 발견하는 모습과 닮아있다. 여러 상황 속 관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단지 대립이 아니라 상호적인 인과 관계를 만들어 낸다. 작품 속에서 ‘비움’(用)의 의미가 상통하고 있음을 인지하며 무엇을 채울 것인지의 결정 하였다면 그 흔적은 누군가에게 자연스러운 것, 혹은 반대의 모습 이다.

흔적의 기억 memory of trace_시간 - 이수빈展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 가치를 따라서 표현 되는 흔적들은 우리가 기억하고 남는 모습과 닮아 있다. 자신을 일인칭 삼인칭의 눈으로 보는 사고는 일상 가운데 어는 곳까지 선택해야만 하는 갈림 길, 선택되는 이 길이 지금 내 앞에 반복 되고 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멈춰서 보고 있다. 가끔은 가볍게 그렇지 뭐, 라는 표현으로 넘어가진다. 자연스러운 것처럼,

흔적의 기억 memory of trace_시간 - 이수빈展

흔적의 기억

담고 닮아가는 행복

기억 속 흔적은 나의 선택이다.
흔적 속 기억은 나의 결과이다.

기억 속 흔적은 나를 선택한다.
흔적 속 기억은 나를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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