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코리아방송 = 최윤영 기자] 광화문에 위치한 아트코리아방송 미디어센터에서는 2018721일 오후 소윤하 선생의 인터뷰 6강화 마리산 혈침편 토크쇼가 진행됐다.

소윤하 선생 인터뷰 6편 ‘강화 마리산 혈침’

일제 침략시기에 우리나라의 명산 곳곳에 우리나라의 생기를 차단하기 위해 심장에 꽂았다는 혈침(쇠말뚝)에 대한 이야기 소윤하 선생 인터뷰 6편 ‘강화 마리산 혈침’에 대한 소윤하(민족정기선양위원회)선생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날 인터뷰에는 문총련 박동위원장이 아트코리아방송 리포터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아래 내용은 소윤하 선생이 제공한 원본을 그대로 올린다.

소윤하 선생 인터뷰 6편 ‘강화 마리산 혈침’

박 힌 곳 :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상방리 마리산 북쪽 8부 능선

제 보 자 : 신 상윤(아시아풍수지리연구소) 011-760-5099

제보일시 : 20031227

종류개수 : 쇠마뚝(당초 제보 1. <작업 중 발견 총 4개 제거>)

제보내용 : 제보자 신 상윤 씨는 현재 박힌 곳이 풍수지리학적으로 볼 때 節穴이므로 일본 사람들이 박은 것은 틀림없으나 이것을 뽑지 말고 교육용으로 사용하는 것이 좋 을 것 같다고 의견을 밝혔다.

소윤하 선생 인터뷰 6편 ‘강화 마리산 혈침’

탐 사 일 : 200411

참여인사 : 한 재규(명지대 교수) 백 정혜(김포시 보건소장) 정 기복(한배달 감사)

황 득(G.M.A.부사장) 소 윤하(민족정기선양위원장)

 

1차 확인탐사

 

200411일 오전 10시에 사당동에서 일행이 합류하여 황 득 씨가 운전하여 출발했다. 김포시를 경유하면서 백 정혜 김포보건소장과 동승하여 마리산 국민관광지관리사무소에 도착하니 1150.

관리사무소에 들려 우리가 찾아온 까닭을 설명하니 장명훈사장과 이기원이사장이 친절하게 대하면서 마리산에 일본사람들이 혈침을 박았다는 말은 많이 들어 왔었지만 지금까지 그 쇠말뚝을 발견은 못 했습니다.고 했다. 그리고 엉뚱한 일본 황실이야기가 나왔다.

지난 해 봄에 일본 황실 황족이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참성단 안에 있는 우물을 청소하겠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뭔가 의심스러워서 승낙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 그 사람 명함이 있습니다.하고 장 명훈 사장이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명함에는 <梨本宮(舊 皇族) 家 六代目祭祀 繼承 梨本隆夫>라 쓰여 있었다.

일행은 모두 놀란 표정이다. 우리는 참성단 안에 샘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몰랐었다. 그런데 일본 황족이 어떻게 참성단 안에 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또 그 우물청소를 왜 자신들이 하겠다고 왔었단 말인가 하고 충격과 함께 큰 의문을 가졌다.

장 명훈 관리사무소 사장에게 그 명함을 복사하여 달라고 해서 챙기고 오늘의 목적인 쇠말뚝을 찾아 마리산을 올랐다.

소윤하 선생 인터뷰 6편 ‘강화 마리산 혈침’

오늘은 200411일이라서 참성단에서 하늘에 참배하고 일출을 보기위해 올랐었던 사람들이 봇물처럼 쏟아 져 내려 왔다. 모두 어젯밤과 새벽에 올라갔었던 사람들이다. 이 가운데에는 7~8세 정도 되는 어린 아이들이 부모들의 손을 잡고 즐거운 표정으로 깡충거리며 내려오고 있었다.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이르듯 많은 사람들이 밤을 새우며 참성단에서 하나님께 참배하고 한 해를 시작하려고 노력하는 이들을 볼 때 우리민족이 이제 본래의 모습을 찾아 가는 것 같아서 가슴이 울렁이고 눈시울이 달아올랐다. 어린아이에서부터 젊은이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얼굴이 상기되어 힘차 보였다.

차량 두 대가 교차 할 수 있을 만큼 넓은 길이다. 그러나 어깨와 어깨가 부디 쳤다. 올라갔었던 사람들이 희망을 한 아름씩 안고 힘차게 내려오는 그들을 마음속으로 축복하며 그들의 앞을 피하여 갓길로 올랐다.

소윤하 선생 인터뷰 6편 ‘강화 마리산 혈침’

넓은 길은 감리교회 앞 샘터까지다. 샘터를 지나서부터는 돌로 만든 층계가가 시작된다. 이 층계는 참성단까지 이어지고 973층계라고 한다.

층계를 오를 무렵부터는 내려오는 사람들이 한 줄이 됐다. 올랐던 사람들이 거의 다 내려 온 모양이다. 우리 뒤를 이어 오르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신 상윤 씨로부터 들었었던 위치를 감으로 잡아 주변을 살피면서 올랐다.

몇 번이고 가파른 층계를 반복하여 오르다가 800층계를 넘어서 왼 편에 펑퍼짐한 바위에 쇠말뚝 한 개가 박힌 것이 발견 됐다.

 

그러나 신 상윤 씨로부터 받은 사진과 비교하니 위치는 틀림없는데 높이가 다르다. 바위에 박힌 쇠말뚝은 약 15cm정도 올라 와 있다. 사진 속의 쇠말뚝은 5~60cm는 됨직한데 현재 바위에 박힌 것은 너무 짧다. 누군가가 뽑으려고 하다가 뽑지 못하고 쇠톱으로 자른 것 같았다. 사진에 나타난 빈 구멍도 있다. 이 빈 구멍이 일곱 개다. 사진에는 다섯 개의 구멍이 보였다. 사진을 찍을 때 위치에서 보니 그렇게 나타 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정황으로 볼 때 사진 속의 쇠말뚝이 틀림없는데 문제는 사진 속의 쇠말뚝보다는 많이 짧아 졌다는 것이다. 사진에는 20031027일이 찍혀있다.

사진과 쇠말뚝이 박힌 위치는 동일했지만 길이가 많이 짧아 졌다. 굵기는 직경 3cm. 재질은 무쇠다. 일행은 여러 가지로 추정하는 말들이 나왔다. 누군가가 쇠톱으로 잘랐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지만 잘린 부분이 톱으로 잘랐다고 보기에도 의문이 남았다.

자국이 톱으로 자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톱으로 안 잘랐다면 길었던 쇠말뚝이 저절로 밑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렇다면 앞으로 계속해서 쇠말뚝이 저절로 바위 속 깊이 파고들고 있단 말인가?

그 사이에 50cm정도가 파고들었었다면 이것은 일제가 박은 쇠말뚝이라고 볼 수 없다.

그래서 결론은 쇠말뚝이 저절로 바위를 뚫고 파고 든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뽑으려다가 안 뽑히니 톱으로 자른 것이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딴은 엉터리 결론이지만 달리 어떤 추리도 상상이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쇠말뚝이 저절로 바위를 뚫으면서 파고든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소윤하 선생 인터뷰 6편 ‘강화 마리산 혈침’

일행은 이 쇠말뚝 주변에 뚫어 놓은 일곱 개의 빈 구멍에 흥미를 갖고 각기 해석했다.

결론은 칠성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의견일치가 됐다.

따라서 이 쇠말뚝은 일제가 박은 혈침으로 볼 수 있다는 것에 동의했다.

왜냐하면 이 쇠말뚝을 박은 자들은 자연을 이용한 주술로써 이 땅을 농락한 행위로 보기 때문이다. 우리 백성들은 자연을 섬긴다. 하늘에 별을 섬기고 산을 섬기고 산의 바위를 섬기고 심지어는 바다나 강 개울의 용이나 호랑이까지도 섬긴다. 이와 같은 순수한 믿음을 파괴하려고 일제는 자신들이 섬기는 천조대신과 그 밑에 잡신을 섬기라고 강력히 주문했었다.

신사를 차려놓고 신사참배를 강요했었던 저들이 아니던가?

신사참배를 시켰는데 불응하다가 모진 고통을 당했었던 어른들의 옛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일행은 준비 해 간 주. . 포를 진설하고 간단한 예를 마치고 이것은 일제가 설치한 혈침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데 공감하고 후일 다시 정밀 탐사를 할 것을 다짐하고 참성단에 올라 하늘에 예배하고 하산 했다.

이것이 제 1차 마리산 혈침 탐사였었다.

소윤하 선생 인터뷰 6편 ‘강화 마리산 혈침’

2차 확인 탐사

 

탐사일시: 200417

참여인원: 정해원(단단학회)

이상섭(마리산관리사무소 직원)2

이상로(단단학회)

소윤하(민족정기선양위원회 위원장)

 

현지 탐사 경위

200417일 오전 1040분 신촌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강화 화도 행 버스를 타고 출발, 화도면 종점에 도착하니 1215분이었다.

마리산 입구 주차장 옆에 있는 길목식당에서 산채비빔밥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관리사무실로 올라갔다. 때마침 20년 넘게 관리사무실에 근무했다는 이 상섭 씨를 만났다.

이씨는 1차 탐사 왔었을 때 장사장이 오래 근무하던 사람이라고 말 했었던 바로 그 사람이다. 이 씨에게 가지고 갔었던 사진을 보이면서 이 쇠말뚝을 아느냐고 물었다. 사진을 본 이 씨는 엉뚱한 대답이다.

이것은 1978년도에 계단공사를 할 때 케이블카를 설치했었는데 경운기 등 엔진을 고정시키기 위해서 박아서 쓰던 것으로 아는데요.한다.

그 때 이것을 박는 것을 직접 보셨습니까?

아니요. 직접 박는 것은 못 봤습니다만 그 때 케이블카를 설치해서 계단 돌을 달아 올렸거든요. 그 때 쇠말뚝을 박아서 장비를 고정시키는 데 쓰고 일부는 뽑고 나머지 안 뽑힌 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 전에 박혀 있었던 것을 사용했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글쎄요. 그것까지는 저도 모르지요.

당시 작업을 했었던 분을 만날 수는 없을까요?

없을 껄 요. 지금 원체 오랜 세월이 흘러서 아무튼 같이 가보시지요. 현장을 보시면서 말씀하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해 주실 수 있으면 저로서는 고마울 뿐입니다.

이 씨와 함께 현장에 도착했다.

쇠말뚝이 박힌 북쪽 바위 언저리에 홈이 파여 있었다.

이 씨는 그것을 케이블카 선이 지난 자국이라고 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러나 잠시 후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케이블카 선에 의해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케이블카의 선이 그곳에 닿아서 바위에 홈이 파이려면 쇠말뚝이 없어야 한다. 뒤쪽에서 케이블선이 지나려면 그 쇠말뚝을 통과해야 된다. 얕은 쇠말뚝이나 높은 쇠말뚝이나 간에 케이블 선이 지나려면 쇠말뚝이 없어야 바위에 케이블 선이 문질러져서 홈이 생길 수 있다. 나의 설명을 들은 이 씨도 동의했다. 누군가가 정교하게 고의적으로 홈을 팠다고 보인다. 홈의 표피가 매끄럽다. 이것은 케이블선이 지나가면서 문질러져서 만들어 진 홈이라고 보면 옳다. 그러나 이 쇠말뚝이 박혀있는 이상 케이블선이 통과하기란 불가능한 위치다. 쇠말뚝이 막고 있기 때문이다.

쇠말뚝이 안 박혔다면 케이블 선이 지나다니면서 만들어진 홈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씨 말대로 그곳에 경운기 엔진을 고정시키고 케이블 카 선이 바위에 닿을 수 없다.

이 홈은 케이블 카 선이 지나다니면서 만들어 진 게 아니라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정교하게 판 것으로 추정이 된다. 그 목적은 현재로써는 설명 할 수 없다.

이 씨는 이 말뚝을 자신이 처음 보았을 때는 높이 솟아 있었는데 군청에서 이 쇠말뚝을 뽑으라고 해서 뽑으려고 애를 썼었지만 뽑을 수가 없어서 해머로 아래로 박으니 쑥 들어가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모양이라고 한다.

소윤하 선생 인터뷰 6편 ‘강화 마리산 혈침’

신 상윤 씨는 이곳이 節穴이라서 일본 사람들이 박은 혈침이 분명하다고 했다. 그리고 일곱 개의 구멍을 뚫어 놓은 것이나 케이블카의 선에 의해서 파인 것 같은 홈 등을 종합 해 볼 때 주술적인 용도에 의해서 박혔을 가능성은 있지만 객관성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나와 이 씨는 의문을 안은 체 참성단으로 올라갔다.

참성단에 오르자 이 씨가 말했다.

이곳에 무궁화를 심어서 제법 잘 컸었는데 얼마 전에 누군가가 톱으로 자르고 소금을 뿌려놨었어요.하고 손가락으로 가르쳤다.

살펴보니 참성단을 오르는 층계 왼 편에 아직도 캐낸 흔적이 남아 있다.

마음속이 답답해 졌다. 어떤 사람이 이 성스러운 곳에 심었었던 무궁화를 잘라 내고 소금을 뿌렸단 말인가?

그런데 일본 황족이 이곳에 있는 샘을 청소하겠다고 왔었다면서요? 그 샘이 어떤 것입니까?

! 그 샘이요? 그 샘은 바로 저곳입니다. 지금은 저렇게 나무뚜껑으로 막아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본 황족이라는 사람들은 몇 년 전부터 찾아와서 우물 청소를 하겠다고 했었지만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상해요.

그러면 금년에도 오겠네요?

그건 모르겠어요. 매년 왔었어도 못 했으니 포기 했는지도 모르지요.

우리는 겨울의 석양을 바라보면서 참성단에서 내려왔다.

소윤하 선생 인터뷰 6편 ‘강화 마리산 혈침’

18

어제 밤은 단단학회에서 잤다. 이곳에서 정 해원 씨와 이 인로 씨를 만났다.

이 인로 씨가 일제혈침제거에 관심을 보였었기에 동행하여 단군 등 길과 참성단을 거쳐 함허동천으로 넘어가는 능선을 살펴보기로 하고 아침일직부터 샅샅이 살펴보았다. 현재 발견 된 쇠말뚝이 일제가 박은 것이라고 단정 지을 단서가 부족하기 때문에 일단 마리산 전체를 살펴보기로 작정했다. 마리산 뿐만 아니라 강화도의 모든 산에 일제가 박았을지 모를 모든 말뚝을 찾아내어 모두 제거하겠다는 각오로 시작했다.

1월이라서 날씨는 매우 차가웠다.

참성단에서 북서쪽으로 뻗은 능선 양지바른 곳에서 개산제를 올리던 무명산악회원들을 만났다. 산신제를 올렸던 제수를 논아 주면서 대화 가운데 <충북 단양군 대강면 올산 산부인과바위에 쇠말뚝이 한 개가 박혀있는데 틀림없이 일본 사람들이 박은 혈침이니 뽑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 씨와 나는 온종일토록 마리산의 능선들을 살폈다. 그러나 쇠말뚝은 발견하지 못했다. 해질 무렵에 단단학회로 돌아와서 주인 신 매녀 여사에게 하룻밤을 지내게 해 준데 대하여 고맙다고 사례한 후 단단학회를 떠났다.

관리사무소에 도착하여 이 상섭 씨를 만났더니 오늘 쇠말뚝 한 개를 새로 발견했다고 한다. 위치는 문제의 쇠말뚝이 박힌 그 곳에서 위로 약 10여 미터 더 올라가서 왼 쪽 암벽의 뿌리에 박혀있다고 한다. 관리 사무소 직원들은 관광객들이 버린 휴지를 줍는 작업도 중요한 작업 중에 하나인데 휴지를 줍다가 절벽의 아래에 박힌 쇠말뚝을 보았다는 것이다.

새로 발견 된 쇠말뚝은 내일 날이 밝으면 확인하기로 하고 오늘 저녁에는 강화도에 대한 역사를 잘 아는 친구가 있으니 가서 만나보자.고 제의한다.

그의 제의에 동의하고 이 씨의 차에 동승했다.

도착한 곳은 강화대교 옆에 있는 강화휴게소다.

이 휴게소의 주인인 안 형섭 씨를 만났다. 안 씨가 강화도에 있었던 옛날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다. 그런데 이 안 씨도 수 년 전에 마리산 관리사무소에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일본 황족이라면서 참성단 우물을 청소하겠다고 했었지만 불허했었다고 한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마니숭조회 박종간 여사의 소식이 궁금해서 전화했더니 <차를 보낼 테니 이리로 오세요.>한다.

옛날에 황우연씨와 함께 마니숭조회를 만들어 단군과 단군의 부인을 모시고 신행하는 신앙단체 대표로서 호는 坤母라 한다.

잠시 후 곤모가 보낸 차를 타고 마니숭조회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차려주는 저녁을 먹고 난 후 마리산에서 발견된 쇠말뚝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참성단 우물이야기가 또 나왔다.

몇 년 전에 일본 승려가 찾아와서 마리산 참성단 우물을 청소하게 해 주면 단군성전을 지어 주겠다고 해서 그 사람 말이 진짜인지 알기 위해서 그러면 나를 일본으로 초청해 보라고 했더니 얼마 후 진짜 초청이 와서 일본을 다녀왔어요. 그 때 일본에서 내 신력을 떠보려고 일본 신또 꾼을 불러와서 시험을 봤는데 그 때 그 신도 꾼이 곧 죽게 생겼더라구요. 그래서 <당신은 곧 죽는다.>라고 했었는데 그 다음 날 죽었다고 합디다. 그리고 그 일본 승려가 참성단에 우물을 청소해서 우물이 다시 나게 만들면 우리나라도 잘되고 일본도 잘 된다고 말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청소해서 물이 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우물 속에 못 된 짓을 했었던 것을 확인 하려고 했었던 같이 느꼈어요. 그리고 이 방자여사 양아들이라고 하기도 하고 이승만 대통령 양아들이라고도 하는데 믿을 사람은 아니더라고요. 그 사람 앞에 조계사 다니는 신도가 있는데 이 사람들도 별로 건전한 사람들이 아닌 것 같았어요. 나중에 보니 자기네들끼리 서로 싸우고 야단들입디다.

이상도 한 일이다. 왜 참성단 우물을 청소해야 한다고 일본 사람들이 나서서 야단들일까? 필유곡절이리라 이를 어떻게 확인 할 수 있을까?

이 숭조회가 있는 산이 穴口山이다. 이 혈구산에도 日帝 장난의 쇠말뚝이 박힐 수가 있다고 생각하고 찾아보기로 생각하면서 꿈속으로 들어갔다.

소윤하 선생 인터뷰 6편 ‘강화 마리산 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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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서둘러서 마리산 관리사무소에 도착했다.

이 상섭 씨가 어제 새로 발견했다는 쇠말뚝을 보기 위해서다.

이 쇠말뚝이 혈침으로 확인이 되면 먼저 발견 된 것도 혈침이 된다.

새로 발견된 것이 먼저 것과 십여 미터 거리라고 하니 서로의 상관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느꼈다. 관리사무소에 도착하니 이 씨와 그의 동료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과 함께 발걸음을 재촉하여 쇠말뚝이 박힌 곳으로 올라갔다.

새로 발견 된 곳은 먼저 발견 된 쇠말뚝 박힌 곳에서 참성단 방향으로 십 여 미터 더 올라 갔다. 그곳은 높게 솟은 바위 봉오리가 있다. 이 봉오리의 동쪽 암벽 뿌리지점에 박혀있다고 한다. 암벽 위에서는 내려 갈수도 보이지도 않았다.

먼저 발견 된 쇠말뚝이 있는 곳에서 한 다섯 발 정도 바위위로 올라 왼편 나무 가지 밑으로 조심스럽게 내려가서 다시 오른 쪽 암벽 아래로 나무 밑으로 살살 기어서 올라가니 암벽의 밑뿌리에 쇠말뚝이 박혀있었다. 암벽의 밑 뿌리지점에 수평으로 질러 박았다.

굵기는 직경 3cm정도이고 암벽에서 노출 된 부분은 약 50cm정도다.

끝 부분에는 약 15cm 정도 되는 쇠똥가리를 용접으로 부쳤다. 용접으로 붙인 곳이 정교하다. 용접한 흔적이 거의 없다. 매끈하고 정교하다.

붙어있는 쇠똥가리가 한 쪽은 가늘고 한 쪽은 약간 굵다. 정교하게 만든 쇠똥가리다. 마치 T자와 흡사하다. 우리는 박혀있는 위치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했을 용도부터 따져봤다. 이리저리 생각 해 봤지만 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쇠말뚝이 바위의 뿌리, 즉 땅에 바짝 붙여서 박혔기 때문에 우선 밑에서 뭔가를 달아 멘 용도로는 아니고 또 바위 꼭대기에서 뭔가를 고정시키기 위하여 사용했었을 가능성에 대하여 따져 봐도 맞지 않는다. 바위의 꼭대기는 튀어나와서 현재의 정황으로는 뭘 안치시켜 사용했을 가능성이 전연 없다.

아무튼 상하좌우 모든 위치에서 일반적인 용도로는 상상이 안 된다.

그야말로 쓸데없이 박아 놓은 쇠말뚝이다.

단 한 가지 용도가 있다면 혈침일 뿐이다.

이 씨나 동행한 동료직원이나 용도가 없다는 데는 공감했다.

이 걸 한 번 뽑아 봅시다. 뽑아서 때려서 소리를 들어 보면 일본사람들이 박은 혈침인지 아닌지를 가늠 할 수가 있으니 말입니다.

아니 이걸 어떻게 뽑아요? 맨 손으로?

맨 손이 아닙니다. 망치와 정은 내가 가지고 다니는 필수품입니다.

배낭에서 망치와 정을 꺼내서 쇠말뚝을 두드려보니 약간 움직이는 감이 있었다. T자 모양으로 생겼기에 붙어있는 쇠똥가리를 망치로 치니 쇠말뚝이 약간씩 돌아가는 듯했다. 반복해서 계속 때리니 말뚝이 움직이더니 끝내는 뱅글뱅글 돌았다. 그리고 손으로 잡고 쭉 댕기니 힘없이 쑥 빠졌다.

참 쉽게 뽑았다. 시간은 약 20분 정도 걸렸을까 말까다.

지금까지 뽑은 것 가운데 가장 힘 안들이고 빨리 뽑은 쇠말뚝이다.

참 쉽게 뽑히네요. 허허허

옆에서 지켜보던 두 사람이 감탄했다.

뽑아보니 길이는 약 80cm정도다. 무게가 묵직했다. 끈으로 묶어서 망치로 때려보니 쇠 소리가 마치 종소리와 같다. 여느 다른 곳에서 뽑았었던 혈침과 동일한 쇠 소리가 난다. 소리가 맑다. 여운이 길다. 일반적으로 보통 쇠는 이와 같이 소리가 맑지도, 여운이 길지도 않다. 그리고 한 가지 이 쇠말뚝이 박혔던 구멍이 특이하다.

너무나 쉽게 뽑혔기 때문에 원상태를 두고 사진을 찍기 위하여 다시 구멍 속으로 밀어 넣으니 아예 쑥~들어갔다. 쇠말뚝이 꼭지만 두고 다 들어간다.

원래 발견당시는 약 50cm이상이 밖으로 빠져나와 있었다. 그 구멍에 쇠말뚝을 다시 끼우니 쇠말뚝 길이대로 다 들어간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이 쇠말뚝을 박을 때 구멍은 이 쇠말뚝 길이대로 뚫고 박기는 약 30cm정도만 박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왜 그랬을까?

아니면 이 쇠말뚝을 정상적으로 길이대로 박았었는데 뒤에 저절로 쇠말뚝이 빠져나왔다는 말인가? 처음 발견된 것도 이상하다.

이 상섭씨의 말에 따르면 원래는 높이 솟아 나와 있었기 때문에 보기가 흉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강화군청에서 뽑으라고 해서 뽑으려고 애를 쓰다가 못 뽑고 해머로 박으니 쑥 들어가더라고 했었다.

그렇다면 이 두 개의 쇠말뚝을 누가 왜 박았으며 또 왜 이렇게 구멍은 깊게 뚫어 놓고 박기는 얕게 박았는지 강한 의문이 생긴다.

이런 말뚝은 참성단 바로 아래에서도 봤습니다.

어디쯤에서 봤습니까? 지금 찾을 수 있습니까?

찾아 봐야죠. 오늘...

그건 어떻게 보셨습니까?

우리가 하는 일이란 관광객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를 줍는 것이 큰일이거든요. 그 쓰레기를 줍기 위해서 낭떠러지 밑으로 헤매야 하니까 쓰레기 청소를 하다가 본 기억이 납니다. 저 위로 한 두어 개는 본 것 같아요.

이 상섭 씨의 말에 따라서 참성단으로 오르는 층계의 동쪽 벼랑을 훑으면서 찾아보았다. 그러나 오늘은 발견을 못했다.

 

결 론

참성단은 우리민족의 얼과 넋이 뭉쳐져 있는 곳이다.

단군왕검께서 하늘에 제사를 올린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온 겨레의 정신이 모인 곳이다.

불멸의 성소다.

다른 일반의 산과는 특별히 다른 산이다.

이 산에 일제가 박은 쇠말뚝으로 의심이 되는 것을 그냥 방치 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빠른 시일 안에 이 상섭 씨가 말 한 참성단 부근의 쇠말뚝을 모두 찾아 제거하고 원상복구를 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 확신한다.

그리고 문제의 참성단 안에 있는 우물도 우리 손으로 청소를 하고 물길을 복원할 수 있으면 복원해야 한다고 다짐하면서 결론을 맺는다.

2004111일 단단학회에서

민족정기선양위원회 위원장 소 윤 하

 

화해와 상생을 위한

강화도 마리산 혈침제거 고유제

 

天 誥 禮

일 시 : 2004320正午 (토요일)

장 소 : 마리산 참성단 천단 위

주 최 : ()한배달 민족정기선양위원회

협력단체 : 자연보호중앙회, 한국여성향토문화연구원

후 원 : 테헤란 밸리

 

1天 誥 禮 (12시 정오)

 

告 天 禮塹聖壇 위에서 올렸다.

남녀 5쌍이 짝을 지어 한 번 잔 올리고 한 자리씩 옮겨 마지막에 첫 잔을 올렸던 사람이 원래 제 자리로 돌아 왔다. 원형이다. 나와 짝은 監禮.

남자 : 소 윤하. 김 정권. 유 명준. 김 영기. 송 부웅.

여자 : 김 혜영. 이 나연. 이 귀선. 차 옥덕. 양 지희.

제관은 남녀가 짝을 찾기 위하여 심지를 뽑아서 같은 번호와 짝을 이룸.

여성들은 화관무 복을 입고 남자는 각자가 준비한 제복을 착복 함.

 

상차림

5: . 보리. . 수수. .

祭酒는 강화도에서 생산하는 막걸리를 썼다.

 

天 誥 禮 執 禮 소 윤 하

1. 제관 위치를 정하여<. . . .> 잠시 부복 함.

2. 각자 소지할 종이를 단에 올림<제관>

3. 자리바꿈<손잡고 둥글게>

4. 첫 잔 올림<다 함께>

5. 세 번 절함<다 함께>

6. 자리바꿈<손잡고 둥글게>

7. 두 번째 잔 올림<다 함께>

8. 부복<제관 및 모든 참례자>

9. 고천문 봉독<감례관 : 소윤하>

10. 세 번 절함<다 함께>

11. 자리바꿈<손잡고 둥글게>

12. 세 번째 잔 올림<다 함께>

13. 세 번 절함<다 함께>

14. 자리바꿈<손잡고 둥글게>

15. 네 번째 잔 올림<다 함께>

16. 세 번 절함<다 함께>

17. 각자 소지한 소지종이에 소원을 써서 소지 함.

18. 만세 삼창.

19. 음복례.

20. 철상.

 

#이런 형식의 天誥禮는 우리가 처음 시행 함.

이날 천고례를 올리고 난 뒤 북쪽 하늘에 푸른 서기가 비쳤다.

음복례가 끝나자 바로 고유제 행사장인 마리산 입구 상설무대로 내려갔다.

 

天 誥 文

하느님, 한울님, 하나님이시여!

이곳에 왜인들이 기맥을 훼손할 목적으로 쇠말뚝을 박았었기에

오늘부터 그 상처를 치유하여 원상을 회복시키려 합니다.

 

누리를 맑게 해 주소서.

누리를 밝게 해 주소서.

겨레의 혼란한 의식이 바로 서게 해 주소서.

겨레의 뒤엉킨 역사를 바로 잡게 해 주소서.

모든 지역의 갈등이 해소되게 해 주소서.

남과 북이 화해로 하나 되게 해 주소서.

4. 15 총선이 올바르게 치러지게 해 주소서.

4. 15총선에서 참된 사람이 선택되도록 해 주소서.

이를 고하오니 흠향하시옵고 굽어 살펴 주옵소서.

단기 4337230

서기 2004320

민족정기선양위원회 위원장 소 윤 하 봉고

 

2부 고유제 (오후 2)

 

1. 국민의례

2. 제 례

 

告 由 祭

국민의례

-국기에 대한 경례

-순국선열과 호국전몰장병에 대한 묵념(1)

-경과보고 소 윤하 위원장

-만세삼창 (대한민국. 겨레화합. 세계평화)

 

제례

=강신례 한배달 감사 정 기복.

=초헌례 화도면 노인회장 이 인호.

=고유문 봉독 한국여성향토문화연구원장 차 옥덕 박사

=아헌례 상방2리 노인회장 유 흥열.

=종헌례 내 3리 노인회장 박 희옥.

=내빈헌작 화도면장 외 다수

=음복례

=헌무

=검무

=철상

 

告 由 文

천지신명이시여! 마리산 산신과 토지신이시여!

삼라만상이 소생하는 갑신년 음력 2월 그믐 날 春分 節을 맞이하여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소찬이나마 정성껏 차려놓고 아룁니다.

뿌리 깊은 우리 배달겨레의 찬란한 靑史日帝로 인해 잠시 먹구름이 가렸을 적에, 日帝는 배달겨레의 正氣의 맥을 끊고, 이 땅에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생명들에게 마저 저주하고자 금수강산 要處에 쇠말뚝을 박아 이 땅에서 피 흘리게 하고 민족의 숨통인 氣道를 훼손시켰습니다.

전범자로 체포된 일본 남방군 총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끼(山下奉文)가 전범자로 처형되기 전에 다음과 같이 실토했었습니다.

1894년에 일본 정부가 가또마루(加藤丸)小將에게 지시하여 무인고도인 백도에다 쇠말뚝을 박게 하고 다음해인 1895년에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은, 쇠말뚝박기와 암살이 직결된 사건이라고 증언했었습니다. 이후 수시로 몰래 잠입해서 전 국토 곳곳에 쇠말뚝을 박음으로써 급기야 에는 경술국치를 만들어 냈었습니다. 식민강점 36년이란 모진 질곡의 세월이 지나 해방을 맞긴 했지만 부모형제가족이 생이별의 고통을 받아야 하는 6. 25 동란이라는 것이 터져 同族相殺戰으로 200만 명이라는 아까운 목숨이 산화되었고 국토는 초토화가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크고 작은 이 땅의 불행들이 이 일제가 박은 쇠말뚝과 무관하다 할 수 있습니까?

다행히 뜻있는 선비들의 노력과 정성으로 민족의 성산인 이 마리산에 박힌 저주의 혈침을 찾아 빼 내고 져 합니다.

세계 유례없이 크고 뿌리 깊은 배달겨레의 정기를 다시 회복시켜 잃어버린 역사와 그 웅지의 철학을 되찾아 복된 통일의 숙원을 이루고 우리민족의 영광을 이룰 때까지 올곧게 설 수 있도록 진실로 보우하소서.

소찬이나마 흠향 하시옵고 응감하옵소서.

단기 4337년 음력 230

사단법인 한 배 달 및 참가민족단체 제관 일동 (차 옥덕 여사 봉독)

 

경과보고(정안제)

20031229일 신 상윤 씨로부터 제보 받음.

200411일 제 1차 현장탐사.

200417일 제 2차 현장탐사. 이 상섭씨로부터 증언청취.

200419일 제 3차 탐사. T자형 발견 발취. 재질과 소리울림확인.

2004228-29일 제 4차 탐사. sbs방송 팀과 3개 부락 노인정 방문, 노인들로부터 일제가 큰 인물이나 인재가 나지 못하게 할 목적으로 마니산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구전을 확인하는 증언청취.

200432012시 정오.

춘분절을 맞이하여 고천례 및 고유제를 모심.

고천례는 참성단 위에서 남녀 5명씩 원형으로 짝을 지어 오곡과 오과와 제주를 차려 놓고 하늘에 한 번 절하고 한 번씩 위치를 바꿔서 원형으로 돌아 마지막에는 처음 섰던 제자리로 돌아오는 형식으로 하늘에 제 올렸다.

이 형식의 제사는 현재까지는 초유의 방식이었다. 원융을 구하는 마음이다.

2004320일 오후 2.

고유제는 마리산 입구에 있는 상설무대에서 어울림의 모습으로 행사를 치렀었다. 이 자리에는 마을 노인들과 한배달 회원들이 제관이 됐다.

2004321일 이 상섭 씨의 조력을 받아 제 1혈침 제거 완료.

2004418-21일 곡우절을 맞아서 참성단 바로 밑에서 이런 모양의 혈침을 제거하고 참성단 안에 있는 우물(단군의 샘)을 청소.

이 때 샘물이 솟아 날 수 있는 미세한 틈에 백회가루가 끼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칼끝으로 긁어내고 물 두 말을 부어서 물이 잦아지는 것을 확인 했다.

어쩌면 이 우물이 다시 나도록 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었다.

2004425-30일 상봉산. 만경봉. 절터골. 함박산등에서 쇠말뚝이 박혀있었던 것을 보았다고 제보한 오명섭 씨와 박희길 씨를 대동하여 확인하였으나 누군가에 의하여 제거되어 흔적만 확인했다.

2004515-21일 일제가 용도불명으로 뚫어 놓은(이 빈 구멍은 땅 속의 기가 공중으로 분사시킬 목적으로 뚫은 것으로 추정.)구멍. 49개의 구멍 속을 청소하고 같은 질의 돌을 빻아서 되 메우기를 하였다. 깊이 평균 60cm.

<이 때 그 구멍 속에서 찐득거리는 흰 물체를 발견. 이것이 구멍을 채우며 올라오는 것을 확인.>

 

2004614kaist 정명균 박사로부터 함허동천에 쇠말뚝이 박힌 것을 보았다면서 제보해 왔다.

2004615일 정명균 박사와 함허동천에 가서 쇠말뚝 확인.

2004621일 권 순정 씨와 함께 함허동천의 쇠말뚝 제거, 원상복구를 완료를 했다.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 마리산의 쇠말뚝은 모두 네 개이고, 탐사와 작업기간은 총 6개월 22일 이며 경비는 약 800만원이 소요되었습니다.

이상으로 경과보고를 마칩니다.

2004622

민족정기선양위원회 위원장 소 윤 하

 

정 안 기 원 제

장 소: 경기도 강화군 화도면 문산리 마리산 단단학회

일 시: 단기 4337(2004)년 음력 55天中節 (622)

 

국민의례

1. 개식선언

2. 국기에 대한 경례

3.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4. 경과보고

5. 만세 삼창

 

제 례 집례자 권 순 정

제 관

1. 강신례 신 매녀 . 박 정학 . 전 유선.

2. 초헌례 박 희길 . 이 귀선 . 권 태흥.

3. 기원문 봉독관 소 윤 하

4. 아헌례 신 기용 . 이 일봉 . 고 상진.

5. 종헌례 박 종일 . 김 정택 . 임 준형.

6. 래빈헌작

7. 음복례 좌. 우 집사: 오 민석 정 해원

 

後記

산과 강을 보면 아름답다. 산에서 흐르는 물줄기가 산자락과 어울리며 흐르는 그 모습이 아름답다. 그런데 속으로 들어가면 겉과 다르다. 겉으로 보기는 아름다워 보이지만 숲속으로 들어가서 구석구석을 살펴보면 아름다운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구석구석에서 생명을 건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썩고 문드러진 냄새가 코를 찌르는 곳이 함께 한다. 그러나 참다운 아름다움이란 바로 이 아름답게만 볼 수 없는 속에 있다.

겉으로만 보고 미추를 판단하는 것은 一方的 상식이다.

속을 드려다 보면서 어떤 것이 아름다움이며 어떤 것이 추한 것인가를 느껴봐야 한다. 아름답다는 것은 눈으로만이 만족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속으로 느낄 때 참 아름다움을 발견 할 수 있다. 내면의 세계가 있으니 그 내면의 세계를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제가 이 강산 곳곳에 쇠말뚝을 박은 것도 바로 내면의 세계를 유린 한 것이다. 산과 강과 바다, 그리고 어디이건 표피에 나타나지 않는 속살을 파고 들어서 상처를 만들었다. 눈에 보이는 세계는 유한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는 무한하게 존재한다. 그 보이지 않는 세계를 한 바퀴 돌면 바로 나의 가슴에 있는 심장에 닿는다. 머리에 닿는다. 온 몸에 닿는다. 바로 내 심장과 나의 뇌와 나의 온 몸통에 쇠말뚝을 박은 것이다.

강화도 마니산에 쇠말뚝이 박힌 것을 확인 한 11일부터 6개월 22일 만에 정안기원제를 올리므로 써 모든 것이 원상으로 환원시켰다고 자위한다.

하지만 완벽하게 상흔을 치료하고 원상을 회복시켰다고는 장담 할 수 없다.

강화도에는 제일 남쪽의 마리산(469m)으로부터 북쪽으로 오르면서 진강산(443m), 덕정산(236m), 퇴모산(338m), 혈구산(466m), 고려산(436m), 봉천산(291m)등으로 거의 일직선상에 있다. 길상산(336m)과 정족산(113m)과 봉천산 옆에 별립산(399m)兩邊에 솟아 있다.

마리나 마니는 머리라는 표현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마니라는 말은 불교에서 여자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하지만 이 또한 산스크리트어로는 으뜸이라는 뜻의 말이다. 머리나 으뜸이나 같은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더 문제는 왜 머리라고 부르지 않고 마리라고 했을까?

강화 본섬에는 정족산을 합쳐 모두 10 개의 산이 있는데 마니산에서 봉천산까지 강화도의 중심선을 긋듯이 약간 지그재그 모양이지만 거의 일직선상에 솟아있다. 유명준(전국자연보호중앙회 총재)씨는 강화도가 태중에 있는 아기 모양이고 마리산은 바로 이 아기의 머리에 해당 된다고 말한다. 지도를 놓고 보면 아기가 태중에서 두 손을 모으고 웅크린 자세와 비슷하다. 그 아기의 머리가 마리산이라고 주장한다. 그럴 듯 해 보인다. 황우연(숭조회 도전)씨는 이 강화도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한다. 백두산과 한라산의 정 가운데가 강화도라고도 주장한다. 강화도에는 다른 섬과 달리 국방 유적지가 많다.

진이 5 곳이며 보가 7 , 돈대가 무려 53 개소가 있다.

상고시대에는 갑비고차라 했었고 고구려시대에는 혈구라 칭하다가 신라 경덕왕 때는 해구로 개칭. 고려시대에 와서 강화로 칭했다.

참성단은 단군왕검께서 부루태자에게 명하여 하늘에 제사지내는 제단을 축조케 하시어 단군 왕검께서 직접 이 단에 오르셔서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고 전해지는 일종의 聖所이다.

마리나, 머리나, 마니산이라고는 언제부터 불렀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아무튼 이 강화도에는 남쪽 마리산으로부터 북쪽 봉천산까지 북두칠성 별자리와 비슷한 모양으로 일곱의 산이 있다. 퇴모산을 빼고 정족산을 넣으면 영락없는 북두칠성 별자리다. 황우연씨가 주장하는 세계의 중심지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전체의 구성은 심상치 않다고 본다.

몇 달 동안 이 강화도의 산들을 어지간히도 오르내렸다. 일제가 박은 쇠말뚝이 다른 산에도 박혔었다는 口傳을 따라서 헤맸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하나도 발견하지 못하고 마니산에서만 함허동천을 포함하여 네 개를 뽑았다. 이로써 강화도 전역에 일제가 배양했었던 악의 씨앗을 다 제거 했다고 안위했다.

왜냐하면 옛날에 보았다는 사람은 많은데 현장을 뒤져봐도 찾지를 못했었으니 말이다.

이는 누군가가 이 쇠말뚝을 찾아 뽑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口傳 蒐集

2004228일부터 29일 이틀 간 sbs 제작 팀들과 4 개 부락 노인정을 찾아 가서 구전을 수집했다.

1. 강화군 화도면 문산리 박 진수(80)

<왜놈들이 마리산 허리에 쇠말뚝을 박았고, 함허동천 뒤 봉오리에도 박았다는 소리를 들었다.>

 

2. 화도면 덕포리 덕달부락 노 천우(78)

<마리산에 왜놈들이 혈침을 박았다는 소리는 옛날부터 들어 왔으나 찾아보거나 발견 된 것은 없었다. 참성단 우물은 해방 후에 안 나온다.>

 

3. 화도면 상방리 고창촌 주 은종(66=032-937-1360)

<옛날부터 어른들께서 왜놈들이 마리산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다.>

 

4. 양도면 도장리 한 강희(77)

<왜정 때 왜놈들이 큰 인물 못나도록 마리산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참성단 안에 있는 샘에 옛날에는 물이 났었지만 어떤 여자가 그 물에 귀저기를 빨아서 부정을 타 그 때부터 물이 안 나온다. >

 

5. 양도면 도장리 황 인범(80=032-937-2146)

<마리산에 왜놈들이 혈침을 박았었다는 말을 이 종팔 씨로부터 들었다.

이 종팔 씨는 학덕과 인품이 고매한 분이었다. 지금 살아 계셨으면 100세 정도 됐을 것이다. 그분은 강도지를 번역하기도 한 학자다. 그분은 말을 지어서 거짓말을 하실 분이 아니다. 그분이 여러 번 말씀을 하셨고 다른 어른들도 그런 말씀을 하셨다.

옛날에는 참성단 우물에 쪽박을 띄우고 떠먹기도 했었다.>

 

6. 화도면 상방리 고창촌 신 석하(68=032-937-1359)

<마리산 뿐만 아니라 만경산에도 박았다고 들었다.>

7. 화도면 상방리 한 응석(56=032-935-1215)

<망경산에는 쇳물을 끓여서 부었다는 말을 우리 할아버지로부터 들었다.>

이 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증언 했다.

 

이 모든 사람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일제가 마리산에 혈침을 박은 것이 확실하다는 심증이 간다. 다만 정확한 위치를 아는 사람들이 없다. 현재 발견 된 위치 말고도 여러 곳을 이야기 하지만 찾기란 어려울 것 같다.

 

2004412일부터 414일까지

화도면 상방리 사는 오 명석(67=032-937-1560, 017-331-1560))씨와 박 희길(64=032-937-1062)씨에게 얼마의 경비를 주는 조건으로 옛날에 쇠말뚝을 보았다는 깃대봉, 함박산, 만경봉, 절토골 등을 헤맸으나 빈 구멍만 두 군데서 보았을 뿐 쇠말뚝은 찾지 못했다. 이것들이 모두 참성단에서 서북쪽으로 뻗은 자락의 이름이었다. 동남쪽 자락은 함허동천으로 달린다. 이 두 자락과 북쪽 자락의 중심에 참성단이 있다.

세 자락 꼭대기에 참성단이 있다.

 

200453

오후 8시 이화여대 후문에 있는 石蘭이라는 日食 집에서 梨本隆夫<나시모도>李 久씨를 만났다.

이들을 만나게 된 것은 신동식씨의 주선이었다. 이 나시모도(梨本)가 수년 전부터 마리산 참성단 안에 있는 우물을 청소하겠다고 했었던 바로 그 일본 황족이다. 이 사람을 만나 왜 참성단 우물을 청소해야 했었는지 까닭과 옛날에 일본사람들이 이 쇠말뚝을 왜 박았는지에 대하여 물어 볼 좋은 기회였었는데 이 자리에 공교롭게도 李 久씨가 나타나는 바람에 좋은 기회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나시모도씨는 이 쇠말뚝을 일본 사람들이 박은 것이 사실이라고 신동식 씨에게 실토를 했었다고 한다. 이날 마음속으로 단단히 준비하고 갔었다가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손이 나타나는 바람에 무위가 됐다.

그리고 마리산 참성단의 우물문제는 두고두고 생각 할 문제다.
일단 421일 본인이 직접 단군의 샘을 청소는 했다.
샘의 바닥 암반의 틈에서 백회를 긁어내고 물을 부어서 빠지는 것 까지는 확인했었다.
이 물길을 다시 틔울 수 있는 방법을 연구 할 것이다.

2004629일 씀.

 

민족정기선양위원회 위원장 소 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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