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코리아방송 = 이칠용 기자] 마이크를 잡은 원로 예술가는 기자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로 말문을 열었다. “인간은 지구를 이끌어가는 존재다. 그런데 지구를 위해 과연 잘 해왔는가, 같은 ‘주민’인 동물과 식물과 광물의 생존권을 지나치게 박탈하지는 않았나, 오로지 인간만 위해 죄다 써버리고, 다른 존재의 생존을 위협하고 파괴하지는 않았나,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리고 덧붙였다. “왜 예술가가 환경운동가 같은 이야기만 하느냐고? 예술가는 미래 세대를 책임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선함과 사랑과 아름다움을 이 세상에 보여주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 예술 세계를 말하기에 앞서 내가 가진 세계관을 꼭 먼저 들려주고 싶었다.”
팔순 노장의 사자후는 거침이 없었고 그칠 줄 몰랐다. 중국의 국보(國寶) 예술가로 꼽히는 한메이린(韓美林·82) 선생이다. 그는 전방위 예술가다. 서예·그림·조각·공예·디자인·애니메이션 장르를 종횡무진 넘나들며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아름다움을 표출해낸다. 그의 화업 70년을 압축한 전시가 2016년 베니스를 시작으로 베이징, 파리에 이어 서울에 왔다.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시작된 ‘한메이린 세계순회전-서울: 메이린의 예술세계 격정·융화·올림픽’(6월 6일~7월 8일)이다.
그가 추구해온 예술은 과연 어떤 것일까. 중앙SUNDAY S매거진이 5일 기자 간담회와 현장 투어에 이어 9일 서울대 미대 동양화과 학생들과의 워크숍까지 동행하며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예술 숲은 아름다운 나무들로 깊고 무성했다.
1936년 중국 산둥성 출신.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렵게 살다가 60년 중앙공예미술학원(현 칭화대 미술학원)를 졸업했다. 문화혁명 당시 모함을 받아 4년 7개월간 옥살이도 했다. 복권 후 수묵의 번짐 효과를 이용한 동물 그림으로 명성을 얻었다. 88년 선보인 에어차이나의 봉황 로고는 지금도 사용되고 있으며 2008 베이징올림픽 마스코트 ‘푸와’도 그의 손에서 나왔다. 2011년 환구시보 선정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중국인’에서 1위로 뽑혔다. 각국 정상을 위한 선물도 도맡았다.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3곳(항저우·베이징·인촨) 있다. 세계 오지를 답사하며 고대 문화유산을 찾아 기록하는 ‘예술 카라반’을 40년간 해오고 있다.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2층과 3층 전시실을 꽉 채운 한메이린의 작품들을 보다 보면 ‘이걸 다 한 사람이 했단 말인가’라는 의문이 우선 든다. 붓과 마커로 쓴 글씨와 그림과 디자인, 그리고 무쇠와 청동, 돌과 나무와 흙으로 빚어낸 각종 형상이 뿜어내는 아우라가 관람객을 쥐락펴락 한다. “틀에 어긋나지 않는 절제, 손의 움직임에 대한 믿음, 기묘함과 흥겨움, 무거움과 가벼움, 구속되지 않는 자유분방함, 웅장한 기세, 넘치는 생동감이 있다”는 판디안 중앙미술학원 원장(중국미술가협회 부주석)의 찬사가 “요즘도 하루 18시간씩 작업한다”는, 좀처럼 믿기지 않는 작가의 말과 댓구를 이룬다.
전시장 초입에 걸린 ‘민포물여(民胞物與)’(2008)는 길이가 7m에 가까운 대자서(大字書)다. ’인류는 동포, 만물은 벗’이라는 웅장한 네 글자 앞에 서서 그는 “예술은 기본이 중요하다. 기본은 글씨”라고 강조했다. 다섯 살 때부터 붓글씨를 써왔다는 그다. “가장 쓰기 어려운 글씨는 초서(草書)인데, 단숨에 일필휘지로 아무렇게나 쓴 것 같지만, 사실 느린 글씨입니다. 서예가에게는 글자 하나하나가 근거와 출처가 있어야 하거든요.”
그의 글씨의 원형은 바위에 새겨진 고대 상형문자와 암각화다. 무슨 뜻인지 아는 이 없는 글자는 그의 손에서 예술이 된다. 그는 이것을 ‘하늘의 글’ 즉 천서(天書)라 이름 붙였다. 천장 높이가 10m에 달하는, 서예박물관에서 가장 큰 전시장은 암각화가 글씨로, 그림으로 또 조각으로 어떻게 형상화됐는지 한눈에 보여주는 현장이다. 이동국 서예박물관 수석큐레이터가 “전율을 느꼈다”는 무쇠로 만든 ‘천서’(2018, 353×80×52cm)는 ‘3차원으로 표현된 서예’다. 종이에 채색한 ‘천서’(2016) 시리즈와 비교해보면 금세 알 수 있다.
동물 그림도 마찬가지다. 간결한 선만으로 그려낸 말과 소는 알타미라 동굴 벽화속 그림들을 떠올리게 한다. 장석호 동북아역사재단 책임연구위원은 “한메이린만의 ‘전형’은 그림과 문자 사이에 존재하는 이미지다. 문자인 듯하면서 그림이고 그림인 듯하면서 문자인 조형언어”라고 설명했다. 그가 30여 년간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채집한 고대 문자 3만여 자를 묶어낸 『천서(天書)』(2007)와 세계 각지의 암각화를 모은 『고로적현대(古老的現代)』(2015)의 출간은 그래서 인류문명사적으로도 각별한 의미가 있다.
그는 전통을 잊어서는 안 되며, 옛 것에서 새로움을 찾아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전통과 과거를 모르는 현대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전시 기획을 맡은 자오리 중앙미술학원 교수는 “한메이린은 전통이라는 일종의 가능성을 어떻게 가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을 제공하고, 문명의 원초 기억을 반영했으며, 이것의 미래 역량을 제시했다”고 평했다.
“예술가는 영혼을 만드는 엔지니어”
한메이린 선생은 9일 오후 열린 서울대 미대 동양화과 워크숍에서 20여 명의 학생이 30분간 각자 그린 작품들을 일일이 보면서 대화를 나누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2시간으로 예정된 워크숍은 4시간 반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끝났다.
질의 :대상을 보고 그리나 상상해서 그리나. 응답 :“처음에는 모델을 보고 그렸지만 화가가 된 이후에는 모든 것이 머릿속에서 나온다. 그걸 표현하는 것이 작가가 하는 일이다.”
질의 :작품이 잘 안될 때는 어떻게 하나. 응답 :“높이뛰기를 하다 보면 항상 거기서 걸리는 부분이 있다. 그럴 때는 다시 한번 더 뛰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넘어선다.”
질의 :작업량이 대단하다.
응답 :“나처럼 멍청하게 살 필요는 없지만, 나는 보통 하루에 18시간을 그린다.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는 중요하지 않다. 내겐 그림 그리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5년 가까이 감옥에 있으면서도 매일 무릎 위에 손으로 그림을 그렸다.”
질의 :피곤하지 않나.
응답 :“서양 화가는 요절하는 사람이 많다. 기를 밖으로 분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양 화가는 어떤가. 오래 사는 사람이 많다. 기를 모아 단련하기 때문이다.”
질의 :예술가는 어떤 사람인가.
응답 :“영혼을 만드는 엔지니어다.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역할을 갖고 있다. 예술가는 자신의 비극을 노래하더라도 아름답게 해야하는 숙명을 타고난 사람이다. 그게 예술가로서의 존엄이다. 힘들지 않으면 예술가가 아니다. 아무 고통 없이, 어느 날 문득 영감이 찾아와서 그걸로 성공하는 예술가는 없다. 나는 힘들 때면 일본의 두 팔 없는 작가를 생각한다.”
질의 :그래도 살다 보면 힘들 때가 많다.
응답 :“어려움과 마주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과거보다 현재가 중요하다. 지나간 일에 후회하고 분노하고 복수할 시간은 없다. 항상 즐겁게 생활하라.”
질의 :후학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응답 :“요즘 디지털 기기의 발달로 예술 작품을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반드시 원작을 봐야 한다. 인쇄물이나 영상은 한계가 있다. 질감이나 스케일은 직접 보고 느껴야 한다.”
질의 :암각화에 관심이 많은데, 한국의 울산 반구대를 가본 적이 있나. 서 있는 고래 문양들이 흥미로운데.
응답 :“(눈을 반짝이며) 한국에도 그런 게 있었나. 꼭 가보도록 하겠다.”
‘대오성불(大悟成佛)’(2018), 종이에 먹, 730 x 123cm 영훈선사와 귀종선사의 대화. ’부처님이 무엇인가“ ’알려줘도 안 믿을 것이니 안 말하겠노라“ ’내 진심으로 믿지 어찌 아니 믿겠는가“ ’자, 그럼 알려주지, 자네가 바로 부처님이네! 도는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크게 깨달으면 부처님이 되는거네“
만으로 여든 두 살인 한메이린 선생은 머리가 새카맣다. 염색은 한 적이 없고, 잘 빠지지도 않는단다. 시력은 1.5, 1.2에 혈압은 70/110. “믿기지 않겠지만 감기는 한 번도 걸려본 적이 없다”고. 더욱 놀라운 일은 지난 1월 득남을 했다는 것이다. 웃으며 보여주는 휴대전화에는 왼팔에 다섯 달 된 아들을 안고, 오른손으로는 큰 붓을 이용해 붓글씨 쓰는 동영상이 담겨있다. 도대체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도인에게 전수받은 ‘6가지 비법’ 덕분”이라고 말한다. “어릴 적 학교에 가는데 사원 앞에서 한 도인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 ‘네 눈을 보니 참 영리해보이는구나. 비법을 가르쳐줄 테니 잘 기억했다가 따라하면 100살까지는 건강하게 살 것이다. 뭐 안 해도 상관없고.’ 당시는 잊어버리고 있다가 대학 다닐 때 그 말이 생각나 지금까지 매일 하고 있어요. 6가지 모두 하는데 10분 정도밖에 안 걸려요.”
중앙선데이 2018. 6. 16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