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루이 다비드가 1788년에 그린 <라부아지에 부부의 초상>. 라부아지에는 법률가이기도 했지만 가로등을 발명하고 농기계. 농업기술. 광물지지도를 만드는 등 전 분야에 걸친 천재적인 화학자였다. 그의 부인 마리는 부득이한 사연으로 13세 때 라부아지에와 결혼하여 남편에게 화학과 수학을 배웠다. 그런데 프랑스혁명 때 세금 징수원이라는 단순한 이력으로 남편 라부아지에와 마리의 아버지가 음모에 휘말리게되고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그가 처형된 후 잘못된 판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천재 화학자이며 과학자였던 그의 죽음은 다시 물릴 수 없는 최대 오점을 담긴 비극이었다. 작품 속에는 인류를 위해 몰두하며 단란했던 그들 부부의 모습과 붉은 테이블 위에 놓인 18세기 실험 기구들이 이채롭게 보인다 .

캔버스 유채 1788259.7X196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죽음의 참상을 극적으로 표현한 마라의 죽음은 처형당한 라부아지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림의 주인공 마라는 의사로 명망이 높았고 정치적으로 야심이 큰 사람이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부르봉 왕가에 격렬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매우 저돌적인 성격의 사람이었다. 1779년 경 마라가 프랑스 과학 한림원에 입성하려하자 '불이 물질같은 입자'라는 주장을 편 마라의 논리와 실험의 오류를 라부아지에가 지적을 하고 반대를 하자 마라는 보복조치로 라부지에를 가난한 서민의 세금을 착취했다고 고발을 하고만다. 이에 파리의 자코뱅파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다는 소식을 듣고 혁명주의 24살의 샤를로트 코르데가 마라를 살해하게된다. 그런데 다비드가 그림을 마라를 의도적인 분위기로 미화하여 마라의 죽음을 격상시키고 선동하여 결국 라부지에와 그의 장인이 처형당하게 된 것이다. 다비드는 당시 마라와 같은 급진적 자코뱅파로 정치적으로 권력을 누린 화가로 300명이 넘는 사람들을 단두대로 보냈으며, 나폴레옹의 대작을 그려서 그의 신임을 얻게 된 처세술이 능한 교묘한 사람이었다.

캔버스 유채 1793128X165 벨기에 왕립미술관

 

앙투안 로랑 라부아지에(Antoine-Laurent Lavoisier, 1743~1794) 프랑스 화학자로 객관적인 실험을 중시한 질량보존의 법칙등 중요한 업적을 많이 남겨 근대 화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Jean-Paul Marat: 1743524~ 1793713장폴 마라산악파(몽테뉴파)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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