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마티스를 생각하면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그가 노년에 십이지장 수술로 병상에 있을 때 움직일 수 없는 지경임에도 불구하고 붓대신 색종이 오리기를 대체하며 새로운 작품에 열정을 쏟아 붓던 모습이다

그것은 새로운 장르였으며 그의 무한한 도전정신과 열정적인 예술적 혼은 존경할 수 밖에 없다. 칸딘스키 등 세계적인 미술가들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마티스도 법학을 전공했으나 돈과 명예를 위한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미술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루브르 미술관에서 명작을 모사하는 열의에 귀스타브 모로의 눈에  띄게 되었고 그의 가르침을 받게 된다. 그는 니스에 머물며 폴 고갱의 발자취를 찾으러 모로코와 타히티를 여행하며 새로운 문화적 시각에 영향을 받게 된다. 그리고 야수파 동료였던 앙드레 드랭을 따라 남프랑스에 가서 스페인 국경에 스튜디오를 열기도 했다

마티스가 1905년에 '모자를 쓴 여인'을 전시했을 때는 전시 주최자도 꺼려했을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그는 채도가 높은 강렬한 색채와 화풍으로 아라베스크의 꽃무늬를 즐겨 그려 자신만의 장식적인 미술을 주도했다

그는 피카소와는 20세기 최대의 화가로 일컬어지고 서로 친했지만 피카소와는 선의의 경쟁을 하였다. 그러던 노년의 마티스는 병색이 짙어져서 주변이 만류하는데도 최후의 마지막까지 예배당의 벽화와 스탠인드 글라스를 작업했다

마티스는 ' 왕의 슬픔' 이란 작품을 통해 인물화를 자주 그렸던 여성 모델과 좋아하던 음악 등 자신이 선호하던 이 세상 모든 것과 이별을 고하는 자신의 입장과 같은 슬픔의 작품을 완성했다. 열정을 다해 작품에만 정진했건만 더이상 작품을 하지못하고 죽음에 직면한 순간의 심정은 얼마나 비통했을까. 치열하게 작품을 하다 어느날 자신도 모르게 세상을 떠난 작가의 아뜰리에에 남겨진 수많은 작품과 미완성인 작품을 보게 됐을 때의 통증은 예술가로서 볼 때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작품 '왕의 눈물' 앞의 마티스

그의 작품은 유럽 회화에 지대한 역할을 했으며 특히 데이비드 호크니와 하워드 호지킨, 패트릭 콜필드에게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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