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총련 위원장 및 아트코리아방송 칼럼니스트

한 가지 질문과 한 가지의 답은 명쾌한 사유를 내재한다. 그러나 질문과 대답을 계속 한다면 내재율은 생명력이 식물 화되거나 광물화된다. 똑딱 똑딱 시계처럼 회전목마처럼 도식화된다. 사람의 삶은 이 도식을 뛰어넘는 그 무엇을 위하여 박동 친다. 심장 박동소리다. 니힐리즘의 등대 같았던 소팬 하우어의 사람의 내재성은 식물, 광물, 동물, 인간성에 대한 탐독의 편단이었다. 물론 융과 프로이드의 다층적 심상세계의 해부학은 우리 모두를 전자현미경 속의 콘텐츠 집합체에 불과하다는 검증방법을 역설하였어도, 한 생명에 대한 심연세계는 독자적이며, 계량할 물질이 아님을 우리 모두는 자각한다. 어는 누구에게도 편리의 계량을 요구할 그 어떤 질문과 대답을 할 수 없다. 니힐리즘의 항생효과는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세계를 여는 담금질정도로 정의한다. 여하튼 40여년의 질문대답은 식물, 광물성 같은 입장이었다.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것은 오히려 환원이다. 소팬 하우어의 의지의 세계로부터 표상의 아득한 질문과 대답이 잦아들고 있음을 알고 있었음이다.

포럼은 한 인간이 겪는 삶의 지향 점에 건널목과 같은 형태로 직시하였다. 포럼-아고라의 현상은 민주주의를 작동시키기에 앞서 한 인간이 사회에 던지는 질문과 대답을 얻기 위한 내재율 이였다. 민주주의 담론의 투망 속에 소소히 숨 쉬는 한 인간이 내민 사회마당의 무대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포럼의 형태를 가장 많이 차용한 집단은 아마도 정치문화였다. 포럼의 형태가 디지털과 만나 시민사회의 여론 패러다임으로 확장하리라고는 쉽게 예단치 않았다. 권력의 도구화로 생명력을 내주었다. 요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세상이 그렇다. 굳이 이 탐욕스러운 진화, 진보에 대한 검증은 논외로 두기로 한다.

이제, 문화라는 질문과 대답의 얼개를 내재한 포럼의 장을 열고자 한다. 후설의 인식론은 명백한 저서나 논문 따위는 없다. 에포케(epoche) 라는 의식의 판단정지를 통하여 확장의 세계를 준용할 뿐이다. 후설의 인식론은 20C 지성계의 격정적 화두가 되었다. 칸트와 헤겔의 관념론 적 사유의 틀 거리가 허물어지는 둑의 구멍과 같았다. 나는 그 사상의 동조자다. 철학의 그 모든 유추도 한 사람의 사유를 넘어 설 수 없으며 넘어서도 안 된다는 이해다. 동양사상의 노자는 이와 같은 맥락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장자사상의 현란한 우주존재론의 중용 가치도 어찌 보면 이 단순한 명제를 위한 수사공식의 결정판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이와 같은 사유의 밭을 간극으로 한, 질문과 대답 같은 세월은, 결코 독백의 울타리가 아닌 차안(此岸)-피안(彼岸)의 둘레 길을 마나게 된다. 그 이정표의 넋두리 같은 편단 4편을 쓰게 되었다.

Mall- Aution의 씨앗
Art가 부자다, 문화가 답이다.
사려 깊은 경복궁포럼
동화책과 사금파리 일기장

이제 포럼의 밭을 진정 세상에 내놓을 준비가 되었는가 하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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