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코리아방송 = 김한정 기자] 충무로 42번지에 위치한 충무아트홀에서는 512일 오후 일제 침략시기에 우리나라의 명산 곳곳에 우리나라의 생기를 차단하기 위해 심장에 꽂았다는 혈침(쇠말뚝)에 대한 이야기를 소윤하(민족정기선양위원회) 위원장과 인터뷰를 가졌다.

소윤하 선생 인터뷰 '일제 쇠말뚝 뽑기 1편’

이날 인터뷰에는 문총련 박동위원장이 아트코리아방송 리포터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소윤하 선생 인터뷰 '일제 쇠말뚝 뽑기 1편’

日 帝 穴 針 試 論
民族精氣宣揚委員會 委員長 소윤하(蘇閏夏)

1. 일제쇠말뚝과의 첫 만남

필자가 처음 일제혈침(쇠말뚝)을 만난 것은우리를 생각하는 모임에서 1985년 삼각산 백운대에 박혀있던 쇠말뚝을 뽑을 때 참여 하면서부터였다. 이 쇠말뚝이 발견 되었을 때(1984)는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산 오르내림이라는 동호인 모임일 때다.

이 모임에서 백운대의 쇠말뚝을 뽑은 뒤 MBC T.V 방송국에서 再演을 요구함에 따라 백운대로 등정하는 데 함께하면서부터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다.

백운대에 박혔었던 쇠말뚝을 뽑고 난 뒤우리를 생각하는 모임이라는 이름의 단체가 결성되었고, 具 潤書 씨를 회장으로 추대했었다.

회장은 성품이 온화 강직했고, 우리민족을 위하여 어떤 행동을 해야 옳은 것인가에 대한 화두를 놓지 않은 이 시대의 참 된 선비였었다. 우리모임에서는 우리호칭 사용하기 캠페인을 버리기도 했고, 매년 음력 시월 삼일 개천절에는 民族魂 大祭라는 행사를 치렀다.

호칭 문제에 있어서는 미스 킴, 미스터 팍, 등으로 부르다가 우리의 이 없어지겠다는 걱정 끝에 남자는 박 선비, 여자는 박 선아, 즉 선비. 선아로 부르기 운동을 전개했었고, 민족혼 대제는 開國天下 한 날(開天節)을 기리며 자연과 사람을 하나로 묶는 행사를 했었다.

그 당시 필자는 일본 사람들이 산에다 쇠말뚝을 박아 산의 기맥을 잘라서 민족의 정기를 말살했었다는 것에는 회의 적이었다. 왜냐하면 많고 넓은 산천에 조그마한 쇠말뚝 몇 개를 박았다고 해서 산의 기맥이 잘리거나 또 산의 氣脈이 막혀서 生物學的 存在性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었다. 또 그 쇠말뚝이 박히므로 나쁜 영향을 끼쳤다면 우리가 지금처럼 발전 할 수가 있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는 고 박정희 대통령이 1962년부터 이 일제쇠말뚝을 뽑았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고, 일본이 박았다는 확실한 기록의 근거도 없었기 때문에 이 문제를 놓고 회원들끼리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었다.

삼각산 백운대 정상 바위에 박혀있던 쇠말뚝은 백운산장의 주인 할머니 증언에 따른 것이다. 당시 이 쇠말뚝을 발견한 사람들이(장현태 변호사를 中心으로) 이것을 누가 왜 이곳에 이런 모양으로 쇠말뚝을 박았는지에 대하여 궁금증을 느끼고 확인했었다. 그 과정에서 백운산장 주인 할머니로부터 일본 사람들이 박았다는 증언을 듣게 되었다.

소윤하 선생 인터뷰 '일제 쇠말뚝 뽑기 1편’

그 쇠말뚝은 우리 시아버지께서 왜놈들한테 끌려가서 박은 것이다. 그곳에 쇠말뚝을 박으면 조선이 망한다면서 박았는데, 시아버지께서는 생전에 꼭 뽑아야 한다고 하시다가 뽑지 못하시고 돌아 가셨다.라고 했었다.

이 말을 들은 모임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풍수지리학자들에게 백운대정상이 일제가 쇠말뚝을 박을 만한 혈 자리인지, 한편으로는 산악인들이 암벽등반훈련을 하기 위해서 박은 것이 아닌지, 또 국립지리원과 지적공사에서 측량용으로 박은 것이 아닌지 여부를 확인했었으나 산악회에서도, 국립지리원과 지적공사에서도 박은 사실이 없다고 확인이 됐고, 풍수지리학적으로는 백운대정상이 백회혈에 해당 된다는 주장이 나왔었다. 따라서 모임 사람들은 백운산장 할머니의 증언을 그대로 수용하여 일제의 소행으로 결론을 내려 제거하기에 이르렀었다. 지적공사로부터는 이 쇠말뚝을 측량용으로 오해할 것을 염려하여 측량에 대한 자료를 보내오기도 했었다. 측량용은 규격이 정해 져 있기 때문에 쇠말뚝 자체가 측량용일 수는 절대로 없다면서 측량용으로 오해 없기를 당부했었다.

이 일제가 박은 쇠말뚝을 뽑아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었던 사람은 徐吉洙(. 서경대교수, 고구려연구회 회장)박사였다. 서 길수 박사가 이것이 일제가 박았다는 기록은 없지만 추정이 가능한 根據에 대하여 이런저런 이야기 들를 많이 했었다.

서 박사는 말이야 중 시줏돈과 교회의 염부 돈 이자를 연구해서 경재학 박사학위를 받은 괴짜다. 그리고 뭐든지 한 번 작정하면 끝까지 돌진하는 명물이다.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이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으며 소개했었던 장현태 변호사의 얼굴이 지금도 뇌리에 떠오른다.

필자는 신흥종교문제연구소에 재직하면서 모든 종교단체의 실태를 조사, 연구 한 바가 있었다. 종교집단들이 본래의 성스러운 무한의무를 잃어버리고 돈 버는 데에만 환장한 괴물 집단으로 전락했다는 결론을 내린바가 있었다. 이 종교집단들이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데 동의, 의기투합되어 만나기만 하면 종교와 돈에 대한 토론을 했었다.

만날수록 놀라운 사람이었다. 언어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특히 에스페란토에 대한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언어의 지배가 진정한 지배자라는 주장을 피력하기도 했다. 세계평화를 위해서는 국적이 없는 에스페란토 어가 세계 공통어가 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기도 했었다.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이었다. 만날수록 존경과 신뢰의 탑이 쌓였다.

서 교수는 이 일제쇠말뚝에 대하여 대학 재학 시절부터 전국적으로 다니면서 事例조사를 했었다고 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수집한 자료를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에서 발간하는 <民族魂>에 발표했었다. 필자는 이 논문을 읽고 난 뒤부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는이 쇠말뚝을 박은 일은 일제가 그 근거를 남길 수 없는 일일뿐더러, 日帝는 이런 일을 하지 않았다고 발뺌을 하고 있지만 전국 방방곡곡에 넘치고 있는 村老들의 口傳을 안 믿을 수 없다. 그리고 그 구전에 따라 實物이 나타나고 있다. 만약에 어느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일본을 모함하기 위해서 꾸민 일이라면, 박았다는 시대가 들쭉날쭉하고 또 큰 인물이나 인재, 또는 장수가 태어나지 못하게 했었다는 이야기는 전국적으로 일치한 구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村老들이 왜 있지도 않는 말을 지어서 말 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하면서 이것은 반드시 뽑고 원상복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설사 그들이(日帝) 맥을 자르기 위해서 박았든 기를 막기 위해서 박았든 박기는 저들이 박은 것은 확실하고 또 氣脈이 잘리지 않았어도 일제가 노린 呪術的인 문제가 분명히 있기 때문에 이것은 모두 제거하고 원상복구를 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이것은 고도의 심리전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 동네 뒷산이 명산이었으나, 일본 놈들이 혈을 질렀기 때문에 이 부락에서 앞으로는 큰 인물이 안 나온다는 생각을 하도록 한 심리전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自暴自棄 하도록 했었다는 말이다.라고 했다.

우리민족은 예로부터 풍수지리사상을 믿어 왔었다. 備邊司謄錄을 봐도 山訴를 한 기록이 많이 나온다. 정승과 평민이 묘소문제로 임금에게 上疏를 올려서 임금이 평민의 손을 들어 준 사건도 있었다. 일본 사람들이 이런 문화정서를 깨고 마음에다 쇠말뚝을 박아 스스로 自暴自棄 하도록 한 주술로도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모든 희망은 일본 천황에 의해야 된다는 생각을 갖도록 했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강제로 시켰다. 이도 같은 맥락으로 봐야 한다.라고 했다. 이 서 길수 교수의 설명을 듣고 그의 주장에 필자는 완전히 동화되고 말았다.

서 길수 박사의 주장에 따라 깊은 冥想에 들어갔다. 자연과 나와의 관계에 꼼꼼히 생각해 봤다. 그 결론은 우주대자연이 빈틈없이 연결되어 있음을 감지했다. 내 몸도 마찬가지다.

내 몸에 미세한 가시가 한 개 박혀도 아프다고 느낀다. 아프다고 느끼는 그 순간부터 힘을 제대로 쓸 수가 없다. 신경이 거슬린다. 하물며 급소를 찾아 박은 쇠말뚝이 있다면 그 아픔은 지대할 것이다. 따라서 땅이 땅의 제힘을 못 쓰게 되고 그 영향은 땅위에 존재하는 모든 生物에 미치게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東洋醫學에서는 任 脈督 脈12경락과 365경혈이 막혀 병이 생기게 되고 막혔던 혈()을 뚫어서 병을 치료한다고 한다. 몸도 자연의 일부분임은 명상으로 확인된다. 일제가 저주한 쇠말뚝은 비록 산과 강과 바닷물 속에까지 박았지만 그 결과는 사람의 몸속에 흐르는 기로를 차단하여 사람이 제대로의 구실을 못하도록 加害한 독물임을 깨달았다. 자연 속에 사람이 있고, 사람 속에 자연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쇠말뚝은 하루빨리 뽑고 땅의 원상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굳은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日帝는 우리민족의 을 없애려고 별 수단을 다 썼다. 민족의 혼을 없애므로 써 민족의 뿌리를 잘라 버리겠다는 악랄한 행위를 자행했었다. 역사왜곡이 그것이요, 신사참배를 강제로 시킨 것이 그것이요, 창씨 개명한 것이 그것이다. 무엇보다도 미래의 큰 인물이 이 땅에서 태어남이란 미래에 대한 희망이다. 큰 인물을 못나게 막기 위해서 이 말뚝을 박았다는 것은 미래의 희망을 잘라 없앤 더할 나위없는 악행이다. 어느 나라든 훌륭한 사람이 많이 태어나야 그 나라가 강성하고 백성들의 삶이 윤택해진다. 따라서 장차 우리나라에서도 훌륭한 인재들이 많이 태어 나도록하려면 이 저주의 일제혈침부터 제거하여 침적되어 있는 무의식 속의 독소를 소멸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생물의 바탕은 땅이다. 그 땅이 괴로우면 땅위의 생물들도 영향을 받는 다는 가이아이론을 상기해 봤다. 아프리카에서 팔락이는 나비 날개 짓이 아메리카에서는 태풍이 될 수 있다는 나비효과도 같은 맥락으로 음미했다.

2. 제보의 내용과 진실여부의 사례

1). 1993년 경상북도 상주 출신 이재훈 변호사가 속리산 문장대와 입석대에 일제가 박은 쇠말뚝이 박혀있다며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에 제보를 해 왔었다. 이 때 현장 확인 조사를 필자가 自任하고 나섰다. 쇠말뚝에 대한 진실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현장 확인 조사란 쇠말뚝이 있긴 있지만 일제가 박은 것이 사실인지 여부를 확인하는 일이다. 그것을 확인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문장대까지 몇 번인가를 오르내려야 했었고 내 속리면 사내리 일대와 보은읍내까지를 헤매면서 老人亭과 속리산에 대한 역사를 조금이라도 안다는 사람들을 찾아서 일제 때 일본 사람들이 박았다는 증언자를 찾는 일이었다. 당시에는 문장대가 상주군에 속한 땅임을 미처 몰랐다. 이 재훈 변호사가 상주 출신이기에 제보를 할 수 있었음을 늦게야 알게 되었다.

헤매던 끝에 6.25당시 속리산 공비토벌대장을 했었다는 김종섭(당시 86) 옹을 만날 수 있었는데, 6.25당시에 속리산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지만 그 때는 문장대에는 감로천 쪽에 조그마한 것 두 개뿐이었는데 사변 뒤에 가보니 여러 개가 박혀있더라고 했다.

문장대 바위 밑에서 감로 천으로 돌아가는 곳이 위험하기 때문에 누군가가 위험 방지용으로 박았을 것이라고 생각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옛날에 앉은뱅이 여자와 조카라는 젊은이가 문장대에 살고 있었으니 아마 그 사람들을 찾아서 알아보면 그 쇠말뚝을 누가 박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필자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묻기도 하였고 면사무소에 가서 도움도 청해서 옛날 문장대에 살았었던 젊은이는 김 영배라는 사람이고, 지금은 보은읍내에서 박수무당 노릇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거의 한 달여 만에 김 영배 씨를 보은읍내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를 만나서 문장대의 쇠말뚝이 발견 된 이야기와 또 그것을 누가 언제 왜 박았는지를 알기 위하여 찾아왔다고 설명하였다. 필자의 말에 그는 얼굴 가득히 슬픈 모습으로 변했다.

그는 지난 날 그곳에서 고통스럽게 살다가 세상을 떠난 그의 이모가 불쌍하다며 눈물을 지으면서 그곳에서 생활했던 아픈 사연을 무려 5시간이 넘도록 이야기 했다.

그러면서 그곳에서 양다리를 못 쓰는(앉은뱅이) 이모와 함께 살면서 문장대 꼭대기에 쉽게 오를 수 있도록 나무 사다리를 만들어 설치 해 놓고 그 사다리 앞에서 그의 이모가 등산 온 사람들에게 을 봐 주고 얼마의 돈을 모았었는데 어느 날 서울에서 등산 온 학생이 감로 천으로 돌아 가다가 미끄러져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는 사고가 발생했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안 그의 이모가 그 동안 어렵사리 모았던 돈을 몽땅 털어서 石手를 시켜 위험 방지용으로 쇠말뚝을 박고 사람들이 감로 천으로 안전하게 다닐 수 있도록 시설(1960년 경)을 했었다고 한다. 쇠말뚝을 박고 시설한 것을 그림으로 그려 보라고 권하여 그림을 그렸는데 쇠말뚝을 여섯 개를 박고 부대시설을 한 것으로 그렸다. 그런데 감로 천 쪽에 있는 두 개는 그리지 않았다. 그 두 개의 쇠말뚝은 누가 박은 것이냐고 물었더니 그것은 옛날부터 있었는데 일제 때 일본 사람들이 기를 자르기 위해서 박았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6개의 쇠말뚝이 박힌 위치는 실제로 위험방지시설을 하는데 필요했었던 것이 인정되는 위치다. 뒤에 속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상주군에서 이 시설물을 철거할 때 쇠말뚝의 윗부분은 없어지고 밑뿌리만 남아 있게 됐다고 한다. 결론은 8 개의 쇠말뚝 가운데 2개만 日帝가 박은 것으로 확인 됐었다.

2). 1994년 가을 배정석(2003사망)씨로부터 일본 해군 출신 하야시씨가 운명직전에 양심선언을 했는데 진도에 있는 죽도라는 섬 빈지에 혈침을 박았으니 꼭 뽑으라고 했다는 제보를 해 왔었다. 이때 최근에 사망한(1993년 사망<당시 86>) 일본 사람의 양심선언으로 혈침이 박혀 있다는 사실이 實物로 확인이 된다면 이것은 일제가 혈침을 박았다는 귀중한 증거자료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하여 그 일에 몰두하게 된 일도 있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이것이 매장물발굴과 연루되어 현재까지도 미확인으로 남아 있다.

3. 뽑은 수량 製作年代測定

모든 생명체는 유한하여 구 윤서 회장이 안타깝게도 폐암으로 갑작스럽게 타개함에 따라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회원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 모임이 해체됐다.

따라서 필자 단독으로 이 쇠말뚝 제거사업을 진행하기 시작 한 때는 19972월부터다.

처음으로 뽑은 곳은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鹿津의 바다 물속에서 3 , 물 밖 언덕 베기 바위에서 1개 등 4개를 뽑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기이하게도 이들 쇠말뚝이 박힌 바위 주변에는 빈 구멍을 뚫어 놓은 경우가 많다.

강화도 마리산에서는 쇠말뚝 4개가 박혔었는데 빈 구멍이 무려 49 군데가 뚫어져 있었고, 백운대에도 쇠말뚝 15 개에 3개의 빈 구멍이 있었고, 백도에도 쇠말뚝 26개에 8개의 빈 구멍이 뚫어 져 있었으며, 삼각산 탕춘대성 아래 독박 골 알 터에서도 쇠말뚝 3개에 4개의 빈 구멍이 발견 되었으며, 연기군 동면 문주리에서는 9개에 21개의 빈 구멍이 뚫어 져 있었다. 이들 빈 구멍을 왜 뚫어 놓은 것인가에 대해서도 알 길이 없다.

쇠말뚝을 박아 氣路를 막고 주변에 빈 구멍을 뚫어서 精氣를 공중으로 분사시킬 목적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이도 있다.

이 쇠말뚝이 박힌 위치는 처음 발견 할 때는 별로 못 느끼지만 뽑고 난 뒤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른 곳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氣感이 흐른다든가 하는 그런 느낌을 느낄 수 있다. 강화도 마리산 참성단을 북쪽에서 올라가는 능선 층계 부근에 박힌 세 개의 쇠말뚝은 공교롭게도 좋은 가 왕성한 곳이라는 표지판이 서 있는 부근에 박혀있었다. 이 표지판은 인천시가 전문 기공사에게 용역을 주어 를 측정한 내용이다.

이 일제쇠말뚝은 갈라진 바위 틈새에 박은 것이 아니고 바위에 생 구멍을 뚫어 쇠말뚝을 밀어 넣고 쇠말뚝과 바위 사이의 틈에는 백회가루를 흘러 넣어 바위와 쇠말뚝을 밀착시킨 뒤 윗부분은 시멘트로 마감 한 형태가 많다. 이렇게 박힌 쇠말뚝은 오랜 세월이 지나 쇠와 바위가 하나가 되어 쇠의 부식이 거의 안 된 상태로 있다. 그리고 이 쇠말뚝을 박은 구멍은 정으로 뚫은 것으로 추정된다.

設計者의 지시에 따라 구멍의 넓이와 깊이를 뚫었었다고 본다. 당시는 드릴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드릴이 있었다고 하드라도 전선이 닿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정으로 바위에 구멍을 뚫어서 박은 것으로 본다. 그렇게 했었다면 쇠말뚝을 박을 때 치밀한 계획에 따른 설계에 의해서 쇠말뚝의 굵기와 길이 등을 먼저 제작하여 시행되었을 것이며, 많은 공력을 들여서 박은 것으로 짐작 된다. 재질이 무엇이든 쇠의 소리가 맑고 여운이 길다. 끈으로 쇠말뚝을 묶어서 망치로 쳐 보면 종소리와 같이 난다. 이는 담금질을 할 때 특수한 열처리에 의한 것이 거나 합금이 아닐까하고 추측하고 있다.

백도에서 뽑은 쇠말뚝 두 개를 20017월 서울대학교 기초과학 교육연구 공공기기 원<년대 측정 담당 천명기 박사>年代測定을 의뢰하였었는데 2001813<kbs가 광복절 특집으로 피플세상속으로> 라는 제작팀과 함께 서울대학교 공공기기 원으로 방문하여 확인했었다. 제작 년대가 3 만 년이라는 측정의 결과가 나왔다.

왜 그렇게 오래 된 년대가 나오는가를 물었더니 <년대 측정방법은 동이원소를 이용하여 탄소를 뽑아 측정하는데 그 탄소가 오래 된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 쇠말뚝을 만들 때 木炭으로 쇠를 녹인 것이 아니라 石炭으로 쇠를 녹였었기 때문에 그 석탄 속에 있던 化石의 탄소가 쇠 속에 들어갔고 그 쇠 속에 들어갔었던 탄소를 뽑아 년대를 측정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것을 구을 때는 석탄을 이용하여 다량으로 제작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18세기 초부터 일본에서는 석탄을 많이 사용했었다고 한다. 이를 미뤄보아 백도에 박혔었던 쇠말뚝의 제작은 일본에서 제작해 왔었다는 신동식 원장의 말이 떠올랐다.

3만년이나 되는 년대 측정 결과 자료가 필요로 느끼지 않아서 年代 測定結果 報告書를 받지 않았다. 당시 서울대공공기기원에서는 보고서를 발행하지 않으면 年代 測定 料를 안 받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돈을 주면서까지 불필요한 年代測定報告書를 받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보고서를 안 받은 것을 뒤에 크게 후회하는 일이 발생했었다. 년대 측정 의뢰 자체를 하지 않았다는 오명을 쓰는 일이 있었다. 의뢰했었던 기록 자료가 서울대학교 공공기기원에 남아 있지 않았었기 때문이었다. 돈을 받고 보고서를 발행했었어야 기록이 남는다는 것이다.

동양양생원 신 동식 원장의 말에 따르면 1894년도에가또 마루(加藤丸)장군이 일본에서 쇠말뚝을 제작하여 백도로 가지고 와서 박았었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일본에서 만든 것이 사실로 확인 된 셈이다. 석탄을 연료로 사용한 것이 우리나라보다 일본이 많이 앞선다. 쇠를 석탄으로 쇠를 녹여 제작 한 쇠말뚝임은 확실하다는 것은 확인 됐다. 우리나라는 해방 후까지도 대장간에서 목탄()을 주로 이용하여 쇠를 달구었다.

4. 재질과 형태와 크기.

쇠말뚝의 생김새도 각양각색이고 크기도 여러 가지다. 긴 것은 2미터가 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작은 것은 새끼손가락 만 한 것도 있다. 진도군 군내면 녹진의 사달바위와 속리산 묘봉, 입석대, 거창군 가조면 우두 산의 장군봉, 서울 개화산 등에서 뽑은 것은 윗부분이 고리 모양으로 되어 있었고, 삼각산 탕춘대성 아래 알 터(祈子바위) 바위에서 뽑은 것은 쇠말뚝의 중심에 총열과 같이 구멍이 관통 된 것도 있었다. 재질도 여러 가지다. 黃銅으로 육각이 된 것도 있고, 무쇠와 鑄鐵도 있다. 예술품과 같이 정교하게 만들어 진 것이 있는가 하면 철근을 잘라 박은 것 같은 것도 있다.

申 東植 원장의 제보에 따라 2001년도에 백도에서 뽑은 것은 1894년 가또 마루(加藤 丸)가 박았다는 것의 쇠는 몸통에 겹친 v자 무늬가 새겨 진 것도 있다. 가또 마루로 부터 40년 뒤인 1936년에 야마시타 도모유키(山下奉文)가 박은 것은 현재 건축용으로 쓰고 있는 이형철근이었다.

여러 곳에 박혔던 것의 형태는 자 모양으로 꺾인 것도 있고 어떤 것은 와 같이 꺽쇠 모양도 있다. 거문도 덕촌 수월산 거문등대 옆에서 뽑은 것은 몸통을 쪼아서 고기의 비늘처럼 만든 것도 있고, ~ 이렇게 휘어지고 구부러진 것도 있다. 왜 이렇게 각양각색인지 그 이유는 저들 시행자들(日帝)만 알 것이다. 다만 침술사가 병의 종류에 따라 침을 큰 것을 사용 할 곳과 작은 침을 사용 할 곳이 다르듯이 이 혈침도 그러한 의미에 따라서 박은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 본다.

또 인체의 經絡手足에 있듯이 이 쇠말뚝도 높고 큰 산 꼭대기보다는 낮은 곳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개중에는 산의 정수리에 박힌 것도 있기는 하지만 이 정수리가 높은 산의 정수리가 아니다. 야트막한 산의 정수리다. 제일 높은 정수리라고 할 수 있는 곳은 삼각산 백운대의 꼭대기 정도였다. 바닷물 속에도 박혀있다.

5. 제보 받은 곳과 확인한 곳. 뽑은 곳.

현재까지 쇠말뚝이 박혔다는 제보를 접수 한 곳이 300여 곳이고 이 가운데 확인을 거쳐 제거 한 곳은 54 군데이며 뽑은 것은 모두 386개다. (20176월 현재)

한 곳에 여러 개가 박힌 경우가 많다. 白島4개 구역에서 무려 26개나 뽑았으며 청량산(남한산성)에서는 5개 구역에서 74를 뽑았었다. 그러나 확인탐사를 하였으나 아직 찾지 못한 곳이 92곳이며, 나머지는 한 번도 확인 해 보지도 못 한 곳이다. 109 군데는 제보내용에 신뢰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포기했다. 아직 박혀있을 가능성이 있는 곳이 많지만 움직이는데 한계를 만난 실정이다. <뽑은 곳 현황은 별도 자료 기록 참조할 것.>

예를 들어 진도에는 尖察山女貴山이 있는데 이 여귀산의 작은 봉우리에서 분명히 쇠말뚝이 박힌 것을 보았다는 제보를 받았으나 여러 번 탐사 길에 올랐지만 지금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 진도의 경우 이런 곳이 여러 군데다. 임회면 하미의 뒷산 왕자바위, 진도군청 뒷산인 철마산 정상, 굴포리 대섬 등이 그렇다. 진도에서는 녹진 사달바위 바다 물속에서 3개와 물 밖에서 1개를 뽑았을 뿐 다른 곳에 박혔다는 것은 아직 못 찾고 있다.

제보를 받고 애써서 찾아 갔으나 발견하지 못하면 이상하게 힘이 빠지고 배신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되고 놀림을 당한 것 같이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강원도 두타산의 경우는 두 사람이 5일간이나 헤맸으나 발견하지 못했다. 이럴 때는 경비도 더 든다. 왜냐하면 주변에서 정보를 얻기 위하여 사람들을 만나서 막걸리 한잔이라도 대접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제천, 단양 영춘 면도 마찬가지다.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당을 지불하고 함께 찾아 헤맸으나 못 찾는 경우가 왕왕이 있다.

아무튼 전국적으로 제보를 받고 찾아 갔다가 못 찾고 헛걸음질 하는 경우가 연간 십 여 차례가 넘을 때도 있었다. 이는 이 쇠말뚝을 박은 지가 오랜 세월이 흘러서 쇠말뚝을 박는 것을 보았거나 정확한 위치를 알던 사람들이 모두 늙어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어렵고, 옛날과 달리 산의 숲이 우거져서 숲속에서 찾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탐사를 겨울철과 봄철을 이용한다. 낙엽이 지고 잎이 피기 전에 찾기가 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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