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택 아트코리아방송 논설고문칭찬합시다 운동본부 총재1
3시간 21분만의 혈투 후 조코비치가 정현의 가슴과 어깨를 두드렸다. 경기 전 후 선수 간 인사는 테니스의 오랜 관습, 하지만 패자가 미소를 띤 채 승자에게 축하와 격려를 보내온 모습은 조금 특별했다.

 

바로 작년 혈투를 벌인 선수들이라기보다 마치 스승과 제자 같은 모습이었다. 정현은 “조코비치가 다음 경기도 잘하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정현과 조코비치의 호주 오픈 테니스대회 남자단식 4회전은 테니스가 왜 아름다운 스포츠인지를 보여주었다.

 

일진일퇴의 경기 내용도 흥미로웠지만, 진정성과 아량이 담긴 인사가 더 눈길을 끌었다. 정현은 승리 후 인터뷰에서 “조코비치는 나의 어릴 때 우상이었다.”며 “그가 투어에 복귀해 기쁘고 그를 상대할 수 있어 영광이다.”라고 치켜세웠다. 조코비치는 취재진이 오른 팔꿈치 통증에 대한 질문을 쏟아내자 “정현의 승리를 깎아 내리는 행위를 그만해달라.”며 “그가 더 뛰어났다.”고 말했다.

 

팔꿈치 부상이 승부에 영향을 미친 것이 분명한데도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고 깨끗이 패배를 인정하는 모습에서 강자의 품위가 느껴진다. 잘 알려진 대로 두 사람은 멘토와 멘티 관계이다. 조코비치는 정현이 주니어 선수일 때부터 눈여겨보고 여러 차례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정현은 조코비치의 샷을 보고 연마해왔다. “조코비치는 완성한 그의 젊은 비전과 경기했다.”(CNN) “조코비치가 지난 1년간 모두에게 했던 것을 지금 정현이 조코비치에게 하는 중”(테니스 선수 제이미 머레이)의 반응이 나오는 이유다. 정현은 2년 전 호주오픈 1회전에서 조코비치와 만나 완패했다.

 

하지만 이제 우상과의 첫 대결이 너무 떨려 아침밥도 못 먹었던 소년은 그 어디에도 없다. 한국인 최초 메이저 테니스대회 8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룬 정현이 더 큰 선수로 성장하기 바란다. 여섯 살 소년은 유난히 자주 눈을 깜빡이었다. TV를 보면서도 눈을 찡그렸다.

 

걱정이 된 부모가 소년의 손을 끌고 안과를 찾았다. 검진 결과 약시, 야외 활동을 하며 녹색을 보는 것이 좋다는 의사의 권유에 부모는 소년에게 테니스 라켓을 쥐어줬다. 안경잡이 테니스 선수 정현(22.한국체대)이 운동을 시작한 계기다. 테니스 지도자 아버지의 핏줄까지 물려받은 정현은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늘었다.

 

정현의 장점은 빠른 공을 눈으로 쫒아 반응하는 동체시력이다. 역설적이지만 정현의 동체시력을 키운 것은 약시다. “시력이 좋지 않아 사물을 볼 때 보통 사람보다 더 집중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동체시력이 발달했다.”는 것이 정현의 어머니 설명이다. 정현이 만 11세 되던 2007년 이형택(42 이형택 테니스아카데미재단 이사장)이 테니스 16강에 진출했다. 이런 그의 활약을 보고 자란 ‘이형택 키즈’ 정현이 기어이 일을 냈다.

 

정현은 호주오픈 16강전에서 노바크 조코비치(세르비아 세계랭킹 14위)를 꺾고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메이저대회 8강에 진출했다. 조코비치는 정현 스스로 ‘우상’이라고 부른 선수, 무려 223주간 세계랭킹 1위 자리에 오른 스타다.

 

이날 정현은 자신의 두 우상을 한꺼번에 넘어섰다. 어린 선수들은 영웅을 바라보며 동기를 얻는다. 박세리의 영향을 받은 박인비, 신지애, 최나연은 이제 다음 세대 골퍼들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세리 키즈’를 넘어 ‘인비 키즈’라는 말도 나왔다. 과거 투수들이 선호하는 등번호는 에이스를 상징하는 1번 이었다가 박찬호 이후 61번으로 바뀌었다. 비록 나이 제한에 걸려 평창 올림픽에서 볼 수는 없어도 한국 여자 피겨스케이트 1인자 유영(14)은 당당한 ‘연아 키즈’다.

 

조코비치와의 경기에서 승리한 뒤 관중석을 향해 큰절을 한 정현은 월드스타로 손색없는 여유를 보였다. 정현이 ‘테니스 불모지’ 한국에서 새 역사를 계속 써 나가는 동안 수많은 ‘정현 키즈’도 탄생했으면 한다.

2018년 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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