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코리아방송 = 김한정 기자]  유년의 뜰전 - 장애란展이 용산구 회나무로에 위치한 카라스갤러리에서 2018. 01. 07 ~ 2018. 01. 30일까지 전시된다.

유년의 뜰전 - 장애란展

유년의 뜰, 창조적 퇴행
존재론적 닮기로서의 아이되기

유경희(Ph.D. 미술평론가/예술테라피스트)


“멜랑콜리한 인간이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유일한 쾌락은, 매우 강력한 것인데 바로 알레고리다.”
- 발터 벤야민

 차라투스트라는 잠시 말을 멈추고 청중들을 바라보았다. 웅성거리던 청중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모두가 차라투스트라를 바라보고 있을 때, 차라투스트라는 어른들 분위기에 굴하지 않고 구석에서 놀고 있는 두 세 명의 아이들을 보고 있었다. 모두가 차라투스트라의 시선을 따라 아이들을 보았다. 부모들이 얼른 아이들에게 뛰어갔다. 그때 차라투스트라가 소리쳤다. 아이들의 신성한 놀이를 멈추게 하지 말라. 너희 모두는 내게 많은 것들을 새로 배워야하지만 저 아이들은 내게 아무 것도 배울 필요가 없는 자들이다. 배울 필요가 없이 생을 즐기고 있는 신성한 아이들에게 못난 배움을 강요하지 말라! 그러고는 차라투스트라의 강의가 다시 이어졌다.
-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유년의 뜰전 - 장애란展


아이의 그림을 볼 때, 그것이 우리를 매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지금까지의 보는 방식을 잊게 하기 때문이다. 그 말은 또한 지금까지 습득했던 배움의 모든 방식을 잊게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실, 전설의 피카소는 어린아이가 되는 데 평생이 걸렸다고 토로한 바 있다. 그 말이 함의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마치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초인)’의 궁극성이 어린아이의 세계에 있다는 말과 상통한다. 예컨대, 니체는 삶의 진리로서의 초인정신을 외부적인 유토피아 사상에서 찾지 않고 어린아이의 세계 속에서 찾았다. 다시 말해 천진무구함의 명징성, 순수함의 긍정성, 그리고 인간본연의 자유로움을 신적이거나 종교적인 것에서 찾지 않고, 어린아이에게서 찾아냈다는 것은 어린아이를 인간 본질의 궁극적 상태로 본 것이다.

유년의 뜰전 - 장애란展

장애란의 회화 역시 어린아이 그림을 연상케 한다. 쉽고, 재미있고, 강렬하며, 가식적이지 않은 그의 작품은 기성 작품이 주는 긴장감이나 위압감과는 거리가 멀다. 수년전까지 이탈리아 트랜스아방가르드의 작가 밈모 팔라디노를 연상케하는 표현주의적 회화를 그렸지만, 그런 그림에도 아이만의 특유한 드로잉적 요소가 내재해있었다. 표현주의적 성향의 그림을 그려오다 완전히 어린아이 그림으로 돌아선 건 아마 동화에 대한 작가 특유의 관심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동화의 세계에 대한 천착이야말로 잃어버린 유년의 회복과 관련된 것이리라.

유년의 뜰전 - 장애란展

예술가라면 좀 특별한 유년시절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유년시절의 상처와 억압과 기쁨과 쾌락은 일평생을 좌지우지할만큼 치명적인 동시에 매혹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때 생성된 무의식은 내면 깊숙한 저장고에 차곡차곡 쌓여 현실 속으로 불쑥불쑥 올라온다. 그것은 의지와 상관없는 일로 억압된 것은 어김없이 회귀하게 되는 심리적 메커니즘 때문이다. 장애란 역시 유년시절의 처절하고 참담했던 순간순간이 여전히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고, 그런 억압했던 무의식을 전혀 새로운 동화적 이미지로 전이시키는 방법으로 유년시절을 복귀시키고 있다.

유년의 뜰전 - 장애란展

장애란의 그림은 어린애가 되어 그린 그림일까, 그저 어린애를 흉내 낸 그림일까? 작가는 6살에서 8살 사이의 아이들의 그림을 가장 흥미롭다고 말하면서, 어린아이가 된 듯한 착각으로 그린 그림도 있고 어린아이의 그림이 좋아 모방한 적도 있다고 말한다. 후기구조주의 철학자 질 들뢰즈 식으로 말하자면, 장애란의 회화는 ‘되기(devnir)’, 그 중에서도 ‘아이-되기’의 실천적 산물이다. 사실 들뢰즈의 ‘아이-되기’는 니체의 “어린아이는 천진난만이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으로 굴러가는 수레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신성한 긍정”이라는 전언의 진화된 철학적 버전이다.

니체는 최고의 인간상을 영혼의 성숙단계로 구분하면서 정의한다. 낙타-사자-아이의 단계가 그것이다. 낙타의 단계는 무거운 짐을 짊어진 현재의 우리 삶의 모습과 닮아 있다는 점에서 순종적 단계이고, 사자의 단계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의지가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관습, 규범, 전통을 파괴하고 권위에 반항하는 단계이며, 어린아이의 단계는 창조의 단계이다. 니체는 어린아이의 상태를 인간이 성장할 수 있는 최고점으로 보았다. 즉 삶을 놀이로 삼는 단계로, 어린아이만이 그대로의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단계라는 말이다.

유년의 뜰전 - 장애란展

어쨌거나 장애란의 회화에서 ‘아이-되기’라는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언뜻 퇴행으로 보이지만, 단순한 역행이 아니라 창조적 역동으로써의 퇴행이라고 보아야한다. 그렇게 작가는 ‘아이-되기’라는 범주 속에서 꽃되기, 새되기, 나비되기, 동물되기 등의 또 다른 ‘되기’를 통해 카멜레온이 환경에 따라 제 몸의 색을 바꾸는 것과 같은 존재론적 닮기를 실현하고자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작가는 즉흥적이고 직관적인 그림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런 까닭에 마치 초현실주의자들이 그랬듯 다소 거칠고 현란한 무의식의 자동기술적 드로잉을 펼쳐내면서 원시적 힘과 넘치는 생기를 발현하고 있다. 이때 작가 스스로는 물론 관자로 하여금 과거의 트라우마와 지친 현실을 잠시나마 벗어나 무장해제되는 자유와 일탈을 맛보게 된다. 장애란은 이런 회화를 통해 상처받지 않은 유년으로의 회귀를 꿈꾸며, 자아상실의 근원이 된 유년을 건강하고 즐겁고 미적인 상태로 복원시키고자 한다.

유년의 뜰전 - 장애란展

그렇지만 장애란 회화의 ‘아이-되기’가 마냥 천진난만하며 즐거운 것만은 아닐 것이다. ‘아이-되기’를 통해 상처와 억압은 잠시 망각되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어김없이 불안과 두려움이 의식을 지배하게 되는 경험 또한 존재할 것이다. 다시 말해 어쩔 수 없이 작가는 그림과 삶의 경계에서 심각한 아고니(agony)의 상태에 놓여있게 되기도 한다. 어떻게 하면 과거와 현재, 그리고 삶과 예술이 화해할 수 있을까?

사실 이런 문제는 비단 장애란이라는 작가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류가 예술을 시작한 이래, 모든 예술가가 겪어내야 하는 운명인 것이다. 좋은 예술작품은 삶과 시간을 잘 보낸 예술가만이 보여줄 수 있는 건강성이 담보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시간을 넘어서 존재하는 매스터급의 예술에는 인간을 매혹하는 단계를 넘어서는 인간을 변화시키고 진화시키는 힘이 내재되어 있다. 작가 역시 그런 건강성과 진화의 힘을 견지한 예술을 창조하기 위해선 스스로를 타자화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유년의 뜰전 - 장애란展

자신을 타자화한다는 말은 자신으로부터 스스로를 거리두기 해야 한다는 의미이고, 자기 문제를 객관화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연민에 빠져 허덕이게 되며, 예술은 미학적 의미를 잃고 한낱 센티멘탈리즘으로 전락하게 된다. 따라서 작가는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을 총체적으로 타자화하고 관망할 수 있는 공력을 쌓아야 한다. 자신의 억압과 상처와 트라우마가 자신만의 것이 아니며, 인류가 삶을 시작한 이래로 지속되어온 그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개연성을 담보한 사건인 동시에 실존적 상흔이라는 거대한 의식을 지녀야 한다. 그럴 때만 삶과 예술의 존재론적 균형잡기 또한 가능해질 것이다.

사실 작가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니체와 들뢰즈의 ‘아이-되기’에의 천착은 매우 훌륭한 덕목이긴 하지만, 그것이 지닌 부정적인 측면 즉 ‘소통의 일방성’을 경계해야한다. 사실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제멋대로 할 수 있는 힘은 타자를 배제했을 때만 생기는 힘이다. 아이가 누리는 완벽한 몰입과 완전한 자유는 작가들뿐만이 아니라 인간 모두가 부러워할 대상이지만, 그러기 위해 소외시키고 배제시켜야 하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장애란의 회화 역시 완벽한 몰입과 환상적 세계에 대한 추구, 그리고 어른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생명력을 지녔다는 덕목은 매우 고무적이지만, 자칫 자기만의 세계에의 함몰이 주는 소통의 부재라는 위험성은 경계해야할 것이다.

유년의 뜰전 - 장애란展

지금까지 장애란은 ‘아이-되기’를 통해 유년시절로의 환상적 회귀라는 기제를 사용했고, 이로써 창작해낸 산물들은 얼마간 억압과 상처로부터 자신을 치유했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자신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예술작품으로 견고하게 승화시키는 지점에 대한 미학적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와 연동하여 작가가 지향하고 추구하는 동화책과 예술작품의 간극에 대해 깊은 사유가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사유는 ‘알레고리’라는 예술적 수사와 관련된다. 이미지로 생각하는 화가들에게 알레고리는 본디 생래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이미지는 태생적으로 환상적이라는 말이다. 환상은 그리스로 그 어원이 ‘가시화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환상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며, “현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충동”이라는 말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의 핵심적 전략인 전이(데페이즈망)는 부박하고 지난한 현실을 위트있게 전복시킨 수사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애란 역시 앞으로의 작품에서 특유의 장점인 즉흥과 충동과 직관을 견지하되, 그것을 한층 넘어서는 고도의 수사법을 담보하는 것도 생각해 볼일 이다. 그것만이 현실을 전복시킬 힘을 얻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장애란은 예술가라면 모두 부러워할만한 자기충족성의 회화를 실천할 힘을 가졌다. 그 힘은 상처와 결핍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모든 미학적인 이미지에는 결여가 있다. “나는 무엇인가의 결여이다. 나는 그것을 애도하는 중이다”라는 자크 라캉의 아포리즘처럼 막강한 예술충동은 없어 보인다. 장애란의 회화 역시 이 전언을 현실화하고 있음이 명백해 보인다. 이제 막 시작한 발걸음에 뜨거운 응원을 보낸다.

장애란은 이화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숙명여자대학교 회화과, 숙명여자대학교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8회의 개인전과 16회의 단체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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