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총련 위원장 및 아트코리아방송 칼럼니스트
누구나 남산에 오르면 어린아이처럼 설레게 된다. 남산은 남쪽나라 제비를 기다리는 봄소식처럼 온유하다. 이를테면 마을, 나라, 도시의 안옥함을 발현한다. 북한산성, 남한산성, 강화산성을 궤적으로 삼은 치열한 국가생존의 움터를 음미한다. 삼각산, 관악산을 할아버지 산으로 삼았을 때 남산, 목멱산의 존재는 더 한층, 봄볕을 맞이해야할 마을 중심의 정신세계를 읽을 수 있다. 남산 N타워의 모습은 오히려 서울의 상징 기념탑처럼 솟아있다. 21세기 미래의 문화 발전소다.

 

1910년대, 색 바랜 남산정경은 낭랑한 솔밭이 성성하다. 1950년대 남산자락은 일제강점기 화석, 6.5 화석이 보인다. 1970년대, 콘크리트 미학, 달동네 움터는 진행형이다. 어찌 되었든 용산과 명동 자락을 상징적으로 품고 지탱한 남산의 명제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돌이킬 틈조차 없었던 1910년에서 2017년까지 공간을 채우는 사유를 위하여 틀 거리를 잡는다.

아 영운곡, 아 용골의 부침과 용솟음의 기원은 합당하다. 몽유도원도길, 주차장 해프닝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잔잔한 서글픔이 밀려오지만 어찌하려 안평대군을 음미하는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미륵반가사유상, 달항아리, 까치호랑이 얼개와 함께 한국미의 정신이자 머릿돌이었기에, 다시 한 번 남산자락의 풍미를 유추하는 시간이다. 남산솔밭이 철갑을 두르듯 울창하였다는 애국가 소절은 사라졌다. 홍송 솔밭자취를 읽으려면 꼼꼼히 남산자락을 만나야한다. 관악산의 면모가 한눈에 들어오는 남향의 자락쯤에서 솔밭자취를 만날 수 있었다.

 

여하튼 남산자락의 옛 모습은 헝클어졌다. 장충단공원, 한양공원, 명동, 조선신궁의 설계는 오늘도 살아 숨 쉰다. 팔각정과 봉수대가 엉성하게 얼개를 남산타워랜드처럼 운영되고 있다. 참으로 간단치 않은 지층의 파편덩어리가 나뒹구는 곳이다. 영운골, 용골, 삼선골, 한강골의 체취에 힘을 쏟은 나머지 명동 복판을 관통하는 청계천 지류에 대한 음미를 게을리 했다. 게을리 했다기보다는 아스라한 꿈처럼 여겨진 것이 맞는 설명이다. 이태원-신촌-명동-강남으로 연결되는 식민지 해방-근현대화공간의 실험은 고되고 숨 가쁜 여정이었다. 지독한 홍역 기이자 홍위병이 날뛰는 아수라세계였다. 어느 식자의 직관으로 토설된 산수차원의 원숭이 흉내 꼴이다.

과연 고차원적인 수도 서울의 비전은 무엇일까! 잡다한 진보노선의 사람, 환경, 일거리 비전은 옳은가! 모를 일이다. 과연 서울이 벌써 노쇠한 고령도시의 치유를 들먹일 단계인가! 판단은 미루어 놓기로 했다. 명백한 사실은 명동에 흐르는 남산골 지류에 대한 연민의 심경을 확인할 뿐이다. 경주에 남산이 있다. 안산격의 산이요. 불교성지가 되어 사랑받고 있다. 과연 서울의 남산, 목멱산의 모습과는 분명 구별된다. 서울의 남산, 과연 어떻게 자리매김 되어야 할까!

 

우리는 황룡사지, 미륵사지에 대한 영롱한 빛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사라진 문명제국에 대한 연민과 함께 민족 얼의 꽃봉오리를 음미하는 창문이다. 왜 이러한 통로가 작동하고 있을까! 통념의 집단의식이 고양된 지층이다. 훈민정음의 빛과 같다. 남산자락 좌우에 걸쳐져있는 숭례문, 장충단 봉우리에 있는 봉수대는 목멱산의 뜻을 웅변한다. 안산-남산의 몫을 분명히 하는 인프라다. 용산의 치열함, 청, 러, 미, 일의 각축전 속에 승자독식 즉, 치킨게임의 승자문명은 이태원 풍경이다. 군 병영의 알고리즘이 작동된다. 북, 남의 원형은 명치유신의 신봉기업인 「명치」를 대명사한 지명이름이 명동이고 보면 우리의 남산 이름표를 성찰함이 마땅해 보인다.

 

신촌, 명동, 이태원, 그리곤 중동건설 붐을 기린 강남의 테헤란 로를 설계 할쯤이면 우리는 지독했던 해방공간의 보릿고개를 넘는 줄기로 자리매김 됨이 온당하다. 어찌되었든 홍대-북촌 열풍의 진원지를 후대의 사가들이 논쟁을 일삼을 것이 분명해 보이지만, 인사동차없는거리의 선언은 오늘날 우리의 고찰을 시작하는 시대담론의 줄기적인 자각이자 출발점으로 환원한다.

인사동의 올무처럼 칭칭 동여맨 업보는 깊다. 애국자를 취조하고 고문했던 종로경찰서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오지난으로 잘 알려진 기생, 요정의 뿌리는 종묘, 사직의 얼을 훼절시키기 위한 비보다. 참으로 서글픈 계략이지만 우리 모두는 시대 사극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역겨운 비보계략이다. 율곡로, 종로, 청계로, 을지로, 충무로, 모두를 관통하는 수도 서울 문화 제1호는 와룡 동에서 필동을 향한 북남으로 흐르는 길이다. 율곡로는 창덕궁, 창경궁, 종묘의 혈을 가르는 비수다. 종묘 뜨락 요정의 존재는 정한 수를 더럽히는 부적이다. 그 곳에 전통문화거리 인사동의 존재는 무엇이며 우리 모두가 사유하는 북촌-서촌은 무엇일까!

 

어찌 되었든 세운상가 1km의 개혁문은 근현대화라는 명제 위에 세워졌다. 명동-와룡동의 연결은 중대한 테제를 잉태한다. 수도 서울의 황룡사요, 미륵사지다. 단언컨대 이 명제의 환원은 비로소 우리 길의 미래를 읽는 시작점으로 확인된다. 목멱산 드라마의 알고리즘이다.

 

조선의 멸망은 현실이 되었다. 그 끝자락에서 장충단이 세워진다. 조선말 혼돈 속에 산화한 젊은 병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장충단의 염원은 오늘날 현충원의 뜻을 담고 있다. 우리식 현충원의 모형이다. 장충단-숭례문의 존재성은 남산자락의 무게감을 반추한다. 남, 북의 명동-용산의 무게감이다. 남산 N타워의 별칭과 함께 팔각정-어린이회관-도서관-안중근기념사업회 컬렉션-봉수대 의식 등의 얼개들이 남산 스카이웨이를 꾸리며 옹기종기 무언가를 추스르고 있다. 과연 이 모습이 우리의 정제 미일까! 정수의 모형을 설계하는가! 라는 반문이다.

 

유교와 불교의 대척점은 정치적이다. 이데올로기 현상이다. 고려-조선의 굴기는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문화는 불문율이 된다. 유교-불교의 대칭점 사이에 가로지르기를 하고 있는 사유다. 오히려 대칭점 사이에서 한ㆍ중ㆍ일 문화벨트의 존유를 읽게 된다. 목멱산, 국사당의 존유를 찾게 된 것은 방향이 되었다. 또한 용골, 영운곡, 삼선골, 한강 골의 여여한 줄거리와 하나가 된다.

 

숭례문 총탄 흔적은 상징이다. 한양공원 표석의 흉탄은 사징이다. 깊은 내상의 자취다. 존 F. 케네디 기념물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빛이다. 거창한 외형이 아니다. 오히려 발등에 치일만큼의 낮은 횃불이다. 왜 이처럼 낮게, 적게, 형상화하였을까! 문화적 안목처의 승화다. 스탈린식 기념물 조형은 오히려 자기모습을 극대화시켰다. 황제치장물처럼 우상화의 극치를 보여준다. 전체주의담론의 재앙이다. 과연 세종로, 세종대왕 동상의 크기로 훈민정음의 뜻이 빛날까! 천민문화주의의 산물이다. 어찌 되었든 오늘 2017년 10월 13일, 9월 1일부터 시작한 영운곡, 용골, 남산골 과제물을 쥐고 마음담기를 하고 있다. 사유의 강처럼 흐르고 있다.

 

삼선골, 한강골, 중간지점쯤에서 남산골의 형상을 음미하는 단계다.

 

남산한옥마을의 뿌리는 충무로, 필동 일대에의 자리매김을 하였다. 문화역사적 방점처럼 오롯한 기운을 담고 있다. 장충단까지의 기슭을 연결하기에는 힘이 부치지만 와룡동, 창덕궁까지의 길머리는 분명 「문화제1거리」의 출발점으로 보아도 좋다. 명동성당과 명동거리의 상징은 인사동 조계사, 탑골공원, 운현궁의 아우라에 비추어 잘 정립되어 있다. 2017년 10월, 북촌-인사동 문화거리의 연결은 실험중이다.

남산자락의 남산골 원형은 숭례문-명동성당-한옥마을-장충단을 연결하고 음미한다. 탁란 계략에 의한 국사당 훼절은 참으로 쓰라리운 지층이다. 오히려 명동성당-조선신궁의 힘겨루기에 살아 존재하는 명동성당을 지나는 남산골을 사유하다 보면 용산-명동이 담고있는 내재율에 직면한다. 해방공간의 엄중한 숙제다.

 

역사왜곡은 여타 민족에게 부여된 숙제다. 이스라엘 유대인들의 성전울림은 지고한 염원이자 장대한 드라마로 자리매김 된다. 여호와의 청연한 울림으로부터 시련의 신이 늘 유대인과 동행하고 있다. 시오니즘은 또 하나의 숙제와 대면하고 있다. 또 하나의 신념의 동행자다. 이들 또한 성전의 이름으로 승화된다. 9.11 참화는 오히려 이들에겐 축제나 다름없는 개념이다. 이처럼 용산의 해방공간은 처연함을 내재한다.

 

어떻게 사유의 강(江)을 직시할 것인 가다. 지중해의 미학은 그 답을 정립하고 있다. 그리스로마신화는 비잔틴문명을 형상화하고 있다. 마치 해방공간의 분열과 조정의 시점이다. 어찌 그럴까! 반도에 불과하거나 로마의 영광도 없어 보일 듯한 초라한 우리 조국이 비견할 대유물이나 될까! 결코 그렇지 않음을 우리 모두는 직시해야 한다. 그리스로마의 혈통은 지고한 인류문명의 비전을 제시했다. 르네상스의 길목을 열었다. 이 비범하고 평범한 정의는 우리의 일상 속에 숨 쉴뿐더러 온전하게 공유하고 있다. 보통사유체계가 되었음이다. 극동의 분점, 피타고라스원리의 직각만큼 분명한 테제가 수도 서울 남산이요, 목멱산이다.

 

목멱대왕-목멱산에 대한 정의는 우리 정신사의 거대한 드라마. 2017년 10월 20일 오늘, 남산골이야기를 담는 소망까지 장대함으로 분화될 것이다. 아폴로의 신이나 제우스의 아우라, 시바의 존재감, 그 모든 것의 이미지만큼이나 영롱함을 안고 있다. 우리는 고구려, 부여, 고조선의 역사왜곡의 후손이다. 식민지를 관통한 민족의 업보다. 두텁게 쌓아올린 식민지바이러스의 지층 두께는 오늘까지 유효하다.

 

태조 이성계의 목멱대왕은 무엇일까! 그리고 태조 왕건의 목멱대왕은 무엇을 담고 있을까! 2017년 오늘 대한민국 수도 서울 목멱산의 남산골은 무엇일까! 유, 불, 도, 선, 교의 정의는 우리 의식의 뼈대다. 지중해의 미학(美學)에 버금가는 요소다. 우리의 단군신화의 정수가 목멱대왕이다.

 

오히려 수도 서울의 르네상스는 언제쯤 발현될 것인가! 라는 화두가 이 글 문을 잡는 열정임을 숨길 수 없다. 누구에게나 부여된 시대의식의 출발점이다. 유럽의 환경담론은 치유의 함의이자 반성문명이다. 유물사관 즉, 합리주의 체계의 중대한 오류를 읽고 있다. 합리적 규명의 허구를 깨닫는 과정일 뿐이다. 르네상스라고 정의한 개념으로부터 21세기 오늘, 인류문명 자산의 검증이다.

 

남산골의 사유는 두 담론의 줄기를 일깨워준다.

 

1. 오늘 우리의 길목은 어떤 정의를 요구하는가!

2. 오늘 우리의 정의는 무엇을 잉태하려고 하는가! 본질에 대한 질문을 정의한다. 수도 중심의 산이기에 그렇다.

 

태조 왕건, 태조 이성계가 정의하려 했던 목멱대왕의 존재는, 21세기 오늘 발현의 물꼬를 찾아야 한다. 그 존재의 서막이 남산골 이야기다. 마치 신화를 찾는 길목임에는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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