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코리아방송 = 김한정 기자] 지난 9월 27일 초대문화체육부 이민섭 장관과의 인터뷰가 종로구 인사동에 위치한 인사아트프라자 3층 갤러리에서 이민섭 전 문화체육부장관과 아트코리아방송 김한정 대표이사, 진행에 한국뉴스 이성용 대표가 리포터로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이민섭 초대 문화체육부 장관과의 인터뷰

이성용 대표 : 장관님!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 월간한국뉴스 이성용 대표입니다. 대한민국 최초로 문화부장관을 역임하셨는데요?

 

이민섭 전 문체부장관 : 제가 문화체육부 초대 장관이 된 것은 93년 2월 문민정부, 김영삼 대통령 정부가 시작되면서 초대 내각에 문화부와 체육부가 통합하면서 초대 문화체육부 장관에 올랐고, 그 당시 강원도 춘천지역에서 4선 국회의원을 하고 있는 상황에 국회의원과 장관을 같이 하는 겸임장관으로 정부 일을 시작했습니다.

 

이민섭 초대 문화체육부 장관과의 인터뷰

이성용 대표 : 문체부 장관을 시작하시기 까지는 문화에 대한 관심이 많으셨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 당시의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이민섭 전 문체부장관 : 역대 문화부 장관이나 체육부 장관은 그 분야에 경험이 있고 환경 경험이 있거나 여러 가지 관련 사업에 종사한 캐리어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문화부가 문화부만이 아닌 체육부 까지 합치니까, 또 그것이 체육 청소년부에요. 청소년 정책까지 같이 포함해서 하다 보니 온 분야에 전문가라고 해서 여기에 딱 적합하도고 할 수는 없는 거죠. 제 경우는 사실상 대학에서는 정치학을 전공했고 신문사에 들어와서 문화부 기자도 하고 정치부 기자로도 지냈어요. 그런 연고가 있고 국회에 들어와서는 문화공보위원회, 문교공보위원회, 안사 위원장을 역임하고 있었고 국회의원에 겸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난하지 않겠는가, 해서 발탁이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민섭 초대 문화체육부 장관과의 인터뷰에서 사회 진행을 맡은 월간한국뉴스 이성용 대표

이성용 대표 : 그 분야에 인정을 받아서 맡으신 것이군요?

이민섭 전 문체부장관 : 그렇죠. 그렇기 때문에 아마 문공위원장 직을 오래 했고, 그래서 국회에서는 문화부와 체육부에 대한 국정감사를 하고 그 당시 문화 체육 쪽 행정 관련 업무를 지원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국회의원과 장관을 겸직하는 장관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성용 대표 : 그 당시 장관직을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임하셨는지?

이민섭 전 문체부장관 : 특별한 철학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평소 문화공보위원회에서 업무를 예산심의를 하다 보니까 어깨 너머로 그 행정부처에 여러 가지 사정을 알 수 있었던 것이 영향을 미쳤고, 또 언론계에서 15년 정도 봉사했던 것이 여러 가지로 참고가 돼서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민섭 초대 문화체육부 장관과의 인터뷰

이성용 대표 : 초대 문체부 장관을 하시면서 언론계의 경력으로 언론계의 도움도 받으셨는지?

이민섭 전 문체부장관 : 네! 언론의 협조가 절대적이었어요. 여러 가지 문화부 시책 중에 지금도 블랙리스트가 많이 있지만 그 당시에도 첨이 하게 대립되는 정책문제가 많았거든요. 언론이 그것을 이해해 주고 좋게 써 준 덕분에 국민의 여론을 좋게 끌고 갈 수 있었고 국회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죠. 예를 들면 지금 민감하게 여러 가지 얘기가 되고 있지만, 한국예술총연합이란 단체가 있습니다. 문화예술단체를 연합해서 모든 정책을 건의하고 추진해 왔는데, 민족예술단체총연합회라고 있습니다. 민예총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당시 야권 성향의 단체인데 서로가 상당한 갈등과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요. 그래서 문민정부 초대 장관이기 때문에 문화예술계 갈등을 좀 조화롭게 해 봐야 되겠다.’해서 예총 쪽에 양해를 구하고 문민정부가 시작됐으니 이념이나 진영 간의 갈등을 넘어서 순수한 문화예술의 합동과 협동의 활동이 필요하지 않느냐? 그래서 민예총은 정식 제도권 안에 법인체를 인정해 줬습니다. 그 때는 예산도 적게 편성됐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예산이 상당히 배려가 되고 조화롭게 문화계가 하나가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죠.

 

이민섭 초대 문화체육부 장관과의 인터뷰

이성용 대표 : 그러면 문민정부 안에서 나갈 방향과 장관님의 방향이 같은 방향으로 간 것이네요?

 

이민섭 전 문체부장관 : 그 당시 문화발전 10개년 계획, 체육진흥 10개년 계획, 청소년 육성 10개년 계획, 10개년 단위로 각 부처가 계획을 만들어서 추진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10개년 계획이라는 것이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잖아요. 예측 불가능한 분야도 많고 예산이 그 때 그렇게 확보될 수 있는가?

 

어느 정도 예산이 되어야 어느 정도 일을 할 수 있느냐는 계획이 나오는데 그런 예측이 불가능한 긴 기간이라 문화, 예술, 청소년, 체육 진흥 육성을 10개년 계획을 5개년 계획으로 맞췄습니다. 새로 짰어요. 쉽게 얘기하면 문민정부에서 처음 시작한 것이니까 계획도 문민정부답게 보완해서 큰 틀을 그렇게 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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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용 대표 : 그럼 진행하신 일 중에서 가장 보람되었다고 생각하시는 일은?

이민섭 전 문체부장관 : 구체적으로 말씀 드린다면 ‘문화정책발전 10개년 계획’, 그 틀이 무엇이냐? 몇 개의 틀이 있느냐 이것이 중요 하거든요. 문화 쪽만 얘기해도 문화발전 10개년 계획의 기본이 무엇이냐? 첫 번째는 민족문화의 정책성 확립, 우리 민족의, 우리 국가의 문화가 정체성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면 우리나라가 남, 북 분단 상태에 있기 때문에 우리 대한민국의 고유문화가 ‘무엇이라는 틀’을 만들어야 되겠다.

 

‘정체성을 확립해야 되겠다.’는 것이 첫 번째, 두 번째는 ‘글로벌 문화의 교섭’, ‘우리문화의 세계와 세계문화의 한국화’로 세계 교류가 있어야 되겠다. 그래서 글로벌 문화로 나가는 것이 기본 방침이다. 세 번째는 우리의 모든 문화, 공간이나 콘텐츠가 중앙에 밀집해 있다. 시골이나 농촌에는 문화라는 것이 없다.

 

이 문화를 평준화해서 서울에 살든, 시골에 살든, 모든 혜택과 시설을 균형화 하자. 네 번째는 각자 국민이 문화에 참여하는 문화 ‘참여문화의 교섭’ 쉽게 얘기하면 , 마지막은 우리나라가 통일을 지향하는데 과연 통일이 되면 과연 우리 문화는 무엇인가? 또 남북한이 통일이 되면 이질적인 문화가 하나로 융합될 수 있는 그런 패턴을 만들어야 되겠다.’ 해서 ‘통일문화의 교섭’을 목표로 문민정부의 틀을 새로 짠 거예요.

 

그래서 초대 장관으로서 가장 우리 국민이 열광했던 부분을 꼽는다면 문화 쪽에서는 광화문에 위치한 총독부 건물을 철거했습니다. 많은 찬반 의견이 분분했지만, 대통령의 결정을 받아서 헐었습니다.

 

그다음 체육 쪽의 중요한 일이 있다면 88올림픽 때 체육부가 생겼는데 그래서 국위가 많이 선양됐지만 모든 국가발전의 원동력을 체육에 집중해서 국민의 민심을 하나로 모아야 되겠다. 그러려면 월드컵 유치가 중요한데 이미 그 당시에는 일본이 4년 전, 월드컵 유치 위원회를 조직해서 300억 원을 만들어서 추진하다 경쟁국이 없으니까 스톱하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 당시 나고야로 갈 뻔했던 올림픽을 서울로 유치했습니다. 앞으로의 월드컵도 일본으로 내정 되었다고 하지만 우리가 다시 끌어 올 수도 있단 말이지요. 명분이 무엇이냐면, 월드컵의 기본 정신이 축구를 통한 세계평화에 이바지 한다. 이것이 월드컵의 기본정신입니다. 그렇다면 지구상의 유일하게 남은 분단국가인 우리나라가 남북한 공동으로 월드컵을 개최 하겠다.’ 하면 명분이 좋단 말이지요.

 

이런 명분이 있을 때 우리가 월드컵 유치를 시작하자. 하고 유치위원회를 바로 조직해서 일본에 맞춰 300억 원의 기금을 마련했습니다. 정부가 100억을 내고, 업계에서 200억을 내고, 그렇게 해서 2002년 월드컵 유치까지 다 쓰고 30억 원이 남을 정도로 일본과 경쟁할 수 있는 그런 작업을 했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너무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안됐을 때를 생각해서 최후 수단으로 일본과 공동으로 합작 개최를 하려고 비밀카드를 가지고 시작했는데 마지막에 일본이 어렵다고 생각했는지 먼저 공동개최를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신속히 받아들여서 일한 공동월드컵이 아닌 한일공동월드컵으로 결정했지요. 그 대신 결승전은 일본 도쿄에서 한다고 결정이 났지요.

그래서 월드컵 유치한 것이 가장 보람되다고 할 수 있지요.

 

그 다음은 용산에 국립중앙박물관 조성한 것을 들 수 있는데요. 땅이 10만평이 서울 시내에 쉽게 나올 수가 없어요. 미8군이 쓰든 100만평의 부지중에 가장 중요한 부지 10만평을 국립중앙박물관 부지로 떼어 달라고 부탁했는데 미국이 양보해서 지금의 국립중앙박물관이 될 수 있었지요.

 

또 내부적으로는 문화도 산업이니 문화 산업국을 만들어야 되겠다. 경제연구소는 수 백 개인데 문화정책에 대한 연구소가 없어서 ‘문화정책개발원’을 만들었습니다.

 

이민섭 초대 문화체육부 장관과의 인터뷰

이성용 대표 : 장관님께서는 정책이 바뀌면서 일관성, 균형성, 통일성이 없이 그때 그때마자 생기는 문제점이 많은데요. 혹시 문화부를 관계했던 분들이 정책이 바뀔 때마다 진행하는 분들과 함께 협력관계가 돼서 자문위원으로 진행되고 있는 부분이 있나요?

 

이민섭 전 문체부장관 : 문화체육관광부에 있던 공직자 출신들이 관련 산하 기관이나 기타 문화예술계에 굉장히 광범위하게 사무총장이나 기관장으로 많이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당장 평창 올림픽 만해도 정부는 바뀌었지만, 먼저 하던 조직위원장이 계속하고 있지요.

 

그리고 담담 국장들도 지금의 정부에서 일을 준비하고 있고, 문화는 비교적 정치 영향을 안탄다고 봐야죠. 여, 야가 화합이 잘 될수 있는 분야입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문화정책이 다른 교육정책이나 경제정책에 맞물려 가지고 5년 만에 계속 정책이 유지가 안 되는 것이, 대통령은 단임제로 마친다 해도 밑에 공무원이나 문화예술인은 영원한 문화예술계 인사로 연결 시켜줘야 하는데 블랙리스트라 해서 제거하고 다시 정권이 바뀌면 소외됐던 사람이 복원되어 정치보복으로 문화예술계의 창작 내지는 정책유지가 안 되는 것이 제일 안타깝지요.

 

이성용 대표 : 서울에 문화 쪽에 관계 되는 문화 상품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서울과 종로 문화 쪽 관계되는 일을 말씀해 주세요.

 

이민섭 전 문체부장관 : 한국의 문화 중심지는 핵심 센터가 ‘서울시’라고 할 수 있지요. 서울을 보면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만나서 여기에서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문화도시로 자리매김을 해야 되겠다. 유럽에는 파리가 있고 로마가 있지만, 서울은 동서양의 만남의 광장이 되어야 되겠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 한류문화가 빨리 세계에 진출해서 그들로 하여금 다시 돌아와 합류해서 영화와 행사를 하면서 서울을 알려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서울이 메카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제가 그랜드 디자인이랄까, 서울에서 동서양 문화가 만날 수 있는 것, 그런 것을 구상해서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까지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월드컵에 집중해야 했기 때문에 뒤로 물러났는데 서울의 문화중심지는 경복궁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벨트, 거기에는 우리 고궁문화가 자리 잡고 있는 광화문, 효자동, 숭인동, 인사동, 동숭동, 돈화문, 창덕궁 등 이곳이 서울문화의 핵심센터입니다.

 

그래서 문화의 거리가 인사동에 조성 된 것도 그런 이유 중 하나로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장소이기에 종로구청장이 민간단체와 합동해서 동서양 문화의 만남의 광장이 서울이라는 핵심 엔진이 인사동에서부터 시작되어야 된다고 봅니다.

 

추가해서 인사동 문화의 거리를 중심으로 핵심문화벨트가 되는데 인사동에서 전시장, 공연장, 상품매장 등을 갖추고 있는 곳이 ‘인사아트프라자’입니다. 이곳이 그랜드 오픈과 동시 문화공간으로 탄생했고, 그 안에 인사문화연구원이 최근에 발족했는데 제가 명예 이사장을 맡고 인사아트프라자 박복신 회장이 이사장을 맡아서 이곳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해서 ‘인사아트프라자’가 대한민국 문화에 앞장서는 ‘문화거리의 랜드마크’로 자리메김하게 되었습니다.

 

문화와 예술에 저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같이 참여해서 일을 해보자. 하는 것이 제 취지로 명예 이사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사진촬영 : 이용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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