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한국공예예술가협회 회장 및 아트코리아방송 논설국장
[아트코리아방송 = 이칠용 칼럼니스트] 휴일도 잊고 작업 중인 오왕택, 오유미 부녀가 작업하는 공방을 찾았다.

항상 사모의 말없는 미소가 오늘을 있게 했고 따뜻한 차와 과일까지 대접 받았다.

함께 간 김영금 상임이사, 추석 대접 너무 과분하다며 눈 호강과 마음 호강에 기뻐했다.

상단에 비알간 목단이 중심추가 되어주며 그 옆면으로 흘러내리는 등나무 꽃의 줄거리가 뻗어 나가는 모양이 아름답다. 함의 아래쪽으로 흘러내리는 꽃송이는 또 다른 볼거리다.

오왕택 나전칠기 명인은 2013년 이태리 밀라노, 피렌체, 로마를 비롯해 일본 가나자와 야마나까 와지마 등의 박물관 미술관, 공방, 전시판매장을 함께 돌면서 그의 전통문화에 대한 긍지와 미래 지향적 철학을 익히 알고 있었고 미다스의 인물 색출 전사 손혜원 대표의 전통문화 사랑에 동승한 그가 부러웠다.

2016 제19회 남원시 목공예대전 은상 수상작

과년한 따님은 나전칠기와 살림을 차릴 건지 공방을 떠날 줄 모르니 효녀인가 불효자인가 헷갈린다.

오왕택 나전칠기 명인을 찾아가다.

이리 보나 저리 보나 뚤뚤 뭉친 가족을 보면서 역시 뭉치면 부활하고 헤어지면 고충이 따른다는 옛 속담이 맞는 것도 같다.

오왕택 나전칠기 명인을 찾아가다.

​올해 원주 옻칠 공모전에서 대상을 거머쥐었으니 내년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에도 모처럼 나전칠기에서 대상이 나올까 기대를 해본다.

오왕택 나전칠기 명인을 찾아가다.

도봉산 자락의 정기가 분명 수유리 오왕택 공방이 있는 이곳까지 뻗어 내리는 듯하다.

 

오왕택 나전칠기 명인을 찾아가다.

나전칠기의 소개

칠공예의 장식기법의 하나. 나전은 얇게 간 조개껍데기를 여러 가지 형태로 오려내어 기물의 표면에 감입시켜 꾸미는 것을 통칭한다.

나전을 풀이하면 소라 라(螺), 비녀 전(鈿) 이라 한다.

오왕택의 대표적인 ‘사계’ 시리즈인 보석함. 검정바탕에 하늘거리듯 탄력있는 선의 나전, 그리고 붉은 장석이 요소들과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다만, 금이나 은판을 오려붙인 것은 따로 평탈(平脫)이라고 부른다. 나전이라는 말은 한국·중국·일본에서 공통적으로 쓰이는 한자어이며, 우리 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자개’라는 고유어를 써 왔다. 따라서 그 만드는 일을 ‘자개박이’ 또는 ‘자개박는다’라고 일컫는다.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는 ‘자개(紫蓋)’라고 기록하기도 하였지만, 이는 음차(音借)한 표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11세기 고려 때의 언어를 기록한 ≪계림유사 鷄林類事≫에서 ‘나왈개개(螺曰蓋慨)’라 했는데, 그것이 자개[差慨]의 오기임이 사실이라면 일찍부터 자개라고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감입기법에는 나무바탕을 직접 새겨 상감(象嵌)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칠 바탕 위에 자개를 붙이고 다시 칠을 올린 뒤 표면을 연마하여 무늬가 드러나게 하기 때문에 나전에는 으레 칠이라는 말을 붙여 나전칠기라고 쓰는 것이 상례이다.

 

우리나라의 나전칠기는 일반적으로 목제품의 표면에 옻칠을 하고 그것에다 한층 치레 삼아 첨가하는 자개무늬를 가리키며, 그런 점에서 목칠공예에 부수되는 장식적 성격을 띠고 있다.

 

나전기법은 중국 당나라 때에 성행하였으며 그것이 우리 나라와 일본에 전하여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 전래의 초기에는 주로 백색의 야광패(夜光貝)를 사용하였으나 후대 특히 우리 나라에서는 청록빛깔을 띤 복잡한 색상의 전복껍데기를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패각이 이처럼 아름다운 빛깔을 발하는 것은 탄산칼슘의 무색 투명한 결정이 주성분인 까닭에 그것이 빛을 받을 때 프리즘과 같은 색광현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또한 조개껍데기 자체의 박막(薄膜)에서 생기는 색현상도 그 발색에 중요한 구실을 하며 전복껍데기의 경우는 박막에 의한 발색이 다양하게 작용하는 본보기이다.

 

나전기법은 기물에다 무늬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칠공예의 하나이다. 그러한 장식법은 한국·중국·일본을 비롯하여 버마·타이 등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를 포함한 아시아 일원에 널리 보급되어 있으며, 지역에 따라 각기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칠공예의 장식기법은 일찍부터 주로 자개를 이용하여 왔기 때문에 칠기와 나전칠기의 호칭을 거의 분간하지 않고 혼용하는 예가 많으며, 심지어 전자(鈿字)를 보식기(寶飾器)나 자개장식으로 풀이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신라 말기 중국과의 교역관계 기록에 보이는 전함(鈿函)과 ≪고려사≫에 나오는 전함조성도감(鈿函造成都監)의 그것은 사실상 내용을 달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는 목기와 더불어 칠기가 발달된 나라이다. 그 발달에는 우리 나라 나름의 제약이 있는 반면에 가진 것을 야무지게 활용하는 슬기도 있었다. 옻칠의 흔적은 일찍이 청동기시대 유물에서도 발견되었지만, 특히 낙랑에 의하여 한문화(漢文化)가 직접 유입됨으로써 칠공예 발달의 획기적인 계기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창원 다호리고분이나 광주 신창동 등지에서 발굴된 칠기 유물로 보면 우리 나라 칠기의 기원이 이미 가야문화 훨씬 이전부터임을 알 수 있다. 옻칠의 수액을 채취하는 옻나무는 우리나라의 전역에 분포하며 그 중에서도 산지를 낀 지방에서 좋은 칠이 많이 나는 편이다.

 

고대에는 옻나무가 얼마나 자생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신라에는 칠기를 제작하는 칠전(漆典)까지 있었고,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옻나무의 식재를 국가적으로 장려하고 관리할 만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칠공예는 중국이나 일본에 비하여 단조한 편이어서 생칠·흑칠·주칠(朱漆)과 자개를 활용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옻칠의 질이 좋고 자개솜씨가 뛰어나 우리 나라 칠공예의 두드러진 개성을 이루었다.

 

현존하는 유물로 신라 이래의 칠회(漆繪)와 평탈 및 금니화(金泥畫) 등으로 활용한 예는 찾아볼 수 있으나, 유례가 극히 적어 한 시대의 유행에 그쳤던 것으로 생각된다. 오히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칠기에 문양르 장식하는 재료로 자개가 주로 사용되었다.

 

중국 당나라시대에 나전칠기가 성행하여 우리 나라는 삼국시대에 이미 나전칠기를 제작하였다. 그것을 입증할 만한 유물로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나전단화금수문경(螺鈿團花禽獸文鏡, 국보 제140호, 호암미술관 소장)이 옛 가야지방에서 출토되었다.

 

거울 뒷면에 자개·호박·청석 등을 붙이고 옻칠로 고정시킨 이 거울은 일본 쇼소원(正倉院)에 평나전배원경(平螺鈿背圓鏡)을 비롯한 여러 점의 비슷한 유물이 있어 주목된다.

 

야광패를 두껍게 사용하고 세밀하게 침각(針刻)을 한 점이라든지, 원주륜(圓珠輪)의 내구(內區)와 외구(外區)에 보상화문·새·짐승을 대칭으로 배치하고 화엽 복판에 호박을 삽입하였으며 여백에는 청석가루를 뿌려 화려하게 메운 점이 당경(唐鏡)의 모습 그대로이다.

 

여기에 사용된 재료 중 호박은 버마 북부의 미트키나산이고 담청색과 녹색의 돌은 페르시아산이며, 짙은 청색의 청석은 아프가니스탄 또는 티베트 특산으로 추정되고 있어서 당시 우리 나라나 일본에서는 만들기 어려운 공예품으로 간주되고 있다.

 

나전기법의 유물이 동경 하나밖에 없는 데 비하면 평탈기법은 좀더 널리 보급되었던 것 같다. 백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왕의 두침(頭枕)과 족좌(足座)는 평탈기법에 가까운 최고의 유물에 속하며, 이홍근(李洪根) 소장의 금은평탈보상화문동경(金銀平脫寶相華文銅鏡)과 경상남도 출토로 전하는 은평탈포도당초문귀갑형소갑(銀平脫葡萄唐草文龜甲形小匣), 그 밖에 경상북도 경주 안압지에서 발굴된 은평탈의 장식칠기 2종은 모두 평탈기법에 의한 것이다.

 

여기에서 평탈기물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당시 칠기의 한 장식기법으로서 유행되었을 뿐 아니라 칠기에 자개무늬를 묻고 그 표면을 연마하여 자개가 나타나도록 하는 나전칠기 기법과 같은 공정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즉, 평탈은 우리 나라에서 나전칠기에 선행하거나 기법상의 병존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중에도 특히 안압지출토의 은평탈유물은 목제품에다 옻칠을 두껍게 올리면서 화문(花文)의 은박판을 부착시킨 것으로, 불구(佛具)와 같은 특수 용도의 물건으로 짐작된다.

 

여기에 새긴 무늬는 안압지에서 함께 출토된 상아각화편(象牙刻畫片)이나 토기묵화문대접(土器墨畫文大楪) 등의 초화그림과 마찬가지로 도안적인 무늬구성이기보다는 회화적 형식의 표현이다.

 

이러한 무늬의 특징은 당시 공예품의 의장과 상통하는 점이 있어 당나라 문화의 세련된 무늬가 우리나라에 정착하면서 다소 거칠게 표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압지 출토의 기물이 대개 통일신라시대 것이라는 점에 비추어 보면 평탈의 장식 칠기는 상당기간 제작되어 오면서 한국화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평탈의 존재로 미루어 보거나 고려시대 나전의 발달된 모습으로 보아 나전칠기가 이미 통일신라시대에 존재하였고 그것이 점차 숙련되어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독자적인 양식을 이룩하여 중세 동양 칠공예의 이채로운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고려시대 나전에 관한 문헌상의 첫 기록은 11세기에 문종이 요나라 왕실에 나전칠기를 선물로 보냈다는 ≪동국문헌비고≫의 기록이며, 12세기 초부터는 ≪교빙지 交聘志≫에 고려의 나전제품이 빈번하게 기재된다.

 

당시의 고려 나전에 대한 평가는 1123년 고려에 왔던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에 잘 나타나 있다. 즉 “그릇에 옻칠하는 일은 그리 잘하지 못하였지만 나전 일은 세밀하여 귀하다고 할 만하다.”고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릇의 옻칠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것은 주칠·채칠(彩漆)·조칠(彫漆) 등 화려한 칠기법을 별로 구사하지 않았다는 지적일 것이다. 또한 “기병이 탄 안장은 매우 정교하고 안장을 나전으로 꾸몄다.”고 한 것으로 보아, 고려 나전칠기의 정교함을 다시 한번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의 나전장은 신라의 칠전이라는 관서가 왕실의 식기방(飾器房)이었듯이 왕실 소용의 세공품을 제작하는 관영 공방에 종사하는 기술자였을 것이며, 적어도 나전기술이 보편화되기 이전에는 관영 제작소에서 만드는 기물에 한하여 자개를 박았을 것이다.

 

국초 신라의 제도를 참고로 하던 고려의 관제가 10세기 말 성종대에 재정비됨에 따라 나전칠기 제작소도 이 무렵부터 본격화되었으리라 추측된다.

 

나전장은 목공예에 직접 관련되는 궁중의 어용 기완(器玩) 같은 세공품을 제작하는 공조서(供造署, 또는 中尙署)에 속해 있었을 것이며 다른 국가기술자들과 같이 좋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몽고의 난 이후에는 한때 경함류(經函類)를 양산하기 위하여 전함조성도감(鈿函造成都監)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1272년 원나라에서 요청하는 대장경을 넣을 칠함을 만들기 위하여 설치한 것으로 그 일을 마친 뒤에는 곧 폐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고려의 나전칠기 유물은 불가(佛家) 소용의 경함·염부합·향갑(香匣)·불자(拂子)와 화장구로 알려진 모자합(母子盒)·유병(油甁)과 작은 상자 등으로, 국내외를 통틀어 15점 남짓하며 그 대부분이 일본을 비롯한 외국에 흩어져 있다.

 

도감에서 제작되었으리라고 추정되는 경함도 지금 국내에는 단 한 점도 전하는 것이 없고 일본·미국·영국·네덜란드 등에 흩어져 있어서 당시의 솜씨를 전하여 준다.

 

그 밖에도 문헌을 통하여보면 해외로 보낸 선물 가운데 나전으로 치레한 필갑(筆匣)·연갑(硯匣)·소함(梳函)이 포함되어 있고, 또 그 당시 일본의 해외 기증품에도 평갑(平匣)·소함·서안(書案)·서궤(書几)·안교(鞍橋)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문방구와 말안장 등 나전기물이 광범위하게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기물은 대개 나무에다 베를 발라 옻칠을 하면서 나전을 붙인 목태칠기(木胎漆器)이며, 모자합·유병 등은 삼베를 겹겹이 발라 심을 만든 건칠기(乾漆器)이다.

 

건칠의 화장구는 나전을 하지 않은 무문칠기로서도 출토 예가 여럿 있어 고려사회에 일반화되었음을 암시해 준다. 고려시대 나전칠기는 흑칠 위에 나전·대모·은사·동사를 감입하여 무늬를 만든 데 특징이 있다.

 

이 시대의 자개는 전복껍데기를 종잇장같이 얇게 갈아서 사용하고 있으며, 야광패나 소라 등도 두껍게 사용한 것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박패법(薄貝法)은 중국의 당나라 때에는 없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 나전칠기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복채법(伏彩法)은 당나라의 나전에서도 적지 않게 발견된다. 대모(玳瑁)는 패각 대신 쓰이는 별갑(鼈甲)을 지칭하며, 그것을 아주 얇게 갈고 그 뒷면에 붉은 채색을 하여 표면에 비쳐 보이도록 하는 까닭에 복홍(伏紅) 또는 복채(伏彩)라고도 일컫는다.

 

대모는 재료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한 까닭에 조선시대 나전에서는 많이 쓰지 못하였지만 조선 후기의 화각장(華角裝) 기법으로 이어지고 있어 전통적 장식기법의 하나로 정착되고 있다.

 

고려시대 나전칠기의 또 하나 특징으로 금속선의 사용을 들 수 있다. 중국의 ≪격고요론 格古要論≫에는 송나라 나전칠기 중에서 동선(銅線)을 감입한 것이 한층 아름답다는 기록이 있지만 남아 있는 유물은 매우 드문 편이다. 이에 비하여 고려에서는 나전칠기 당초무늬의 덩굴줄기라든지 무늬와 무늬 사이의 경계선 등으로 다양하게 응용되었으며, 주로 은선·동선·주석선이 쓰였다.

 

금속선은 두 가닥의 가는 철사를 한데 꼬아 새끼줄처럼 만들어 쓰거나, 실고추를 썰 듯 모난 철사를 단선(單線)으로 사용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후자는 고려시대에만 나타나며 조선시대에는 그것이 자개로 대치되었다.

 

그것은 조선시대에는 자개를 일정한 소폭의 만곡상(彎曲狀)으로 나타내는 기술이 발달되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점차 금속선의 문양 표현법이 드물게 되었다. 이들 나전의 무늬는 상감청자가 융성하던 시기의 회화적인 초목수금도(草木水禽圖)는 거의 없고, 대개 국화문과 당초문을 전면에 가득 밀집배치하고 있다.

 

그 중 일본 동경국립박물관 소장의 나전국화문경함(螺鈿菊花文經函)과 나전국당초문경함(螺鈿菊唐草文經函) 및 가타무라미술관(北村美術館)의 나전모란당초문경함(螺鈿牡丹唐草文經函) 등은 정교한 국화나 모란송이를 당초줄기로 정연하게 엮어 배치한 전형적인 나전경함의 양식을 갖추고 있다.

 

또, 일본 다이마사(當麻寺) 소장의 나전대모국당초문염주합(螺鈿玳瑁菊唐草文念珠盒)은 자개로 된 국화 송이와 두 가지 금속선의 당초덩굴 및 대모 복채의 수법 등 나전칠기 최성기의 정교한 작품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 밖에 이채로운 것으로는 흑칠나전묘금포류수금문향갑(黑漆螺鈿描金蒲柳水禽紋香匣)이 있다. 상자 형태의 이 조그만 향갑에는 자개로 회화적인 도안을 나타내면서 금니(金泥)로 세부의 표현을 보완하였으나 13세기 이후의 거친 점이 보인다.

 

조선 초기의 나전칠기는 고려시대 이래의 의장(意匠)을 계승하였지만, 그 잔손질한 솜씨가 성기고 거칠어졌으며 무늬의 정연함도 점차 잃어간다. 즉, 섬세한 국당초무늬보다는 꽃잎과 이파리가 굵직굵직한 모란당초 또는 연당초무늬 하나로 기물의 모든 면을 처리하는 예가 많고, 구도가 복잡하면서 꽉 짜여지기보다는 대칭이 흐트러지고 공간을 많이 남기며 전체적으로 어색한 일면을 가지고 있다.

 

소수의 귀족 취향에 영합하여 정교하고 우아하던 특성이 점차 민중적 취향으로 바뀌어 신선한 감각을 새롭게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따라서 대모의 복채나 금속판을 재단한 모진 단선의 사용은 자취를 감추고, 대신 15, 16세기의 청화백자에 등장하는 매화와 대나무나 꽃과 새를 배치하여 회화적 효과를 시도하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그래서 시대가 내려올수록 대범하고 거친 표현의 회화적 의장이 정착되어 분청사기의 박지분청(剝地粉靑)이나 조화분청(彫花粉靑)의 맛을 느끼게 한다.

 

조선 전기 나전칠기의 전형적인 당초무늬 의장은 장방형의 납작한 의함(衣函)에 표현된 모란당초무늬를 통하여 접하게 된다. 만개한 꽃과 꽃봉오리를 전복자개로 오려붙이고 자유분방하게 뻗어나간 덩굴줄기도 자개를 끊어 이어붙였다. 그래서 종횡으로 뻗어나간 모습은 율동감을 주며 속도감을 느끼게 하여 중국이나 일본 것과는 전혀 다른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

 

이러한 모란당초무늬의 의장성은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일본의 나전칠기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에는 당초문·쌍봉문·쌍용문 등이 한결 후퇴하고, 새로 소나무·대나무·매화·사슴·학 등 십장생을 주제로 하는 서정적인 도안이 부각되었다.

 

이러한 도안은 회화적인 요소를 잃지 않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이들 나전 기물은 문방구에 이용되는 경우는 적고, 화장구·재봉구·소반·장롱 등의 가구로 확대되어 대중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말기인 19세기에는 나전기법이 좀더 다양해진다. 문양보다 자연의 사실묘사가 더 많아지고 끊음질수법으로 귀갑문(龜甲紋) 같은 기하학적인 무늬를 기물 전체에 씌운다든지 산수풍경을 표현하는 것이 많아진다.

 

그것은 사회구조가 바뀌면서 신흥상업자본층이 형성되어 그들에게 맞는 취향이 요구되고, 또 장인들 역시 다소 기업화된 공방에서 제품을 양산하게 됨으로써 생겨난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현대의 나전칠기 공예는 어려운 상황에서 재현의 길을 걷고 있다. 그것은 20세기 초부터 일본에 의한 새로 도입된 문물에 의한 혼란, 그리고 산업화 추세에 따른 수공예의 낙후성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동안에는 이왕직(李王職)소관의 미술품제작소를 개설하고 나전부를 두어, 흩어진 기존의 우수한 기능보유자를 모으고 젊은 기술자를 길러냈다.

 

여기에서는 일본사람이 기술 지도를 함은 물론 그들이 그려 주는 도안에 따라 나전칠기를 제작하였다. 10여년 뒤인 1922년에는 이왕직미술품제작소에서 분리하여 조선미술품제작소를 발족시켜 제품생산에 주력하였다.

 

색상이 아름답고 껍데기에 굴곡이 적은 전복이 많이 생산되는 통영에 공업전수소(工業傳修所)가 일찍부터 개설되어 나전칠공예의 실기를 가르쳤고, 가내수공업의 사설공장이 무수히 번창하였다. 또 1940년에는 평안북도 태천(泰川)에 칠공예소가 설치되어 나전칠기를 제작한 일도 있다.

 

한편 조선미술전람회(鮮展)에 공예부가 설치된 것은 제11회인 1932년부터인데 여기에 나전칠기가 적지 않게 출품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출품자들은 일본인의 수요에 영합하여 전통공예의 독자성이나 예술성이 보이지 않았다.

 

오늘의 나전칠기는 19세기의 저속화와 20세기의 외세영합 풍조에서 벗어나지 못한 실정이다. 특히, 광복 이후 거듭된 사회혼란과 캐슈(cashew)라는 대용칠의 등장에 따라 퇴보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최근의 경제성장으로 전통공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생활공예품으로서의 나전칠기가 조금씩 소생하고 있다. 현재 국가적으로 나전칠공예를 보호육성하기 위하여 주름질 중심의 기능을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螺鈿匠)으로 지정하고 있다.

 

주름질은 본래 자개를 줄로 썰어 물건의 형상 그대로 오려붙이는 솜씨이며, 끊음질은 거두로 실같은 자개상자를 만들어 끊어 붙임으로써 무늬를 선묘(線描)하는 것을 말한다.

 

자개는 현재 진주패·야광패·멕시코패·홍패 등 수입품이 많아서 주름질이 한층 다채로워진 편인데, 오히려 나전이 안고 있는 과제는 자개라는 재료의 문제보다도 목물(木物)에서 문양 장식에 이르는 의장상의 안목에 있으며, 또 좋은 칠을 정제하여 자급하는 문제 등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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