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코리아방송 = 김한정 기자] 인사동에 위치한 갤러리 이즈에서는 10월 3일까지 조용익展 ‘형상의 이유’(Grounds for Shape)가 전시되고 있다.

조영익展 ‘형상의 이유’(Grounds for Shape)

선에서 리좀으로 그리고 다시 인간으로 - 들뢰즈(Gilles Deleuze)는 모든 '있음'이라는 것은 '차이들(differences)의 생성'을 의미할 뿐이라고 단언한다. 차이가 없다면, 나의 존재는 불가능하다. 오늘은 어제의 차이이고, 여름은 봄의 차이이다.

조영익展 ‘형상의 이유’(Grounds for Shape)

차이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규칙이나 형식 같은 몇몇 개념들을 제외하고는 없다. '시간'도 차이의 연속을 수치로 개념화한 것일 뿐이다. 차이는 그래서 존재의 원인이고 세계를 창조하는 힘이다.

 

모네(Claude Monet)가 '루앙 대성당(Cathédrale Notre-Dame de Rouen)' 모티프를 계절, 시간, 날씨, 빛 변화에 따라 묘사한 연작도 결국 세계를 만드는 차이들의 생성에 관한 한편의 장엄한 서사이다. 반복은 차이의 연속이며, 차이는 반복을 가능케 한다.

 

그래서 들뢰즈는 '덥다'와 '춥다'의 대립되는 개념보다 더 실재적인 것은 덥다와 춥다 사이의 다양한 스펙트럼(spectrum)이 아니냐고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조영익展 ‘형상의 이유’(Grounds for Shape)

작가 조용익의 스테인리스 스틸(stainless steel) 조각은 이러한 차이의 생성을 형상의 근거로 삼는다. 감각으로 확인된 외양의 세계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들로 가득한 리좀(Rhizome)의 세계 즉, 뿌리줄기처럼 중심이 없고 시작도 끝도 없이, 항상 중간이자 사물의 틈, 존재의 사이, 간주곡 같은 공간을 구축한다.

 

그래서 그가 만들어 내는 인간이나 동물의 형상은 절대적인 형태, 절대적인 법칙 같은 단단하고 고정된 관념에 기인하지 않고, 다질적인 것, 불균등한 것들의 계열들 같은 '현상 이하'의 차이들을 시각화한다.

 

혹자에게는 조용익의 조각이 어떤 형상의 뼈대와 같은 지지체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선들과 그사이에 뭉쳐있는 선의 교차점 덩어리(작가는 이것을 '특별한 세포'라고 부른다. 이는 생물학적 의미의 세포와 차별되는 형이상학적 세포를 뜻하고자 함이다.)는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어디서 끝났는지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는다.

조영익展 ‘형상의 이유’(Grounds for Shape)

그것은 분명히 리좀적 분열의 장면이며, 차이 자체를 생성 원리로 삼기 때문에 형상을 떠받치는 지지체 역할과는 완전히 동떨어지게 된다.

 

조용익은 '특별한 세포'(스테인리스 구)와 이 세포의 리좀적 분열운동(스테인리스 선)을 외관의 근거로 보고 있다. 그에게 외관의 진실은 허구이며, 허영이다. 감각 능력의 한계가 외관을 결정짓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개미에게, 사람에게 혹은 어린아이에게, 노인에게 사과는 다 다르게 보인다. 사과 존재는 차이의 다양한 스펙트럼 안에 있는 것이지 사과의 감각된 외관에 있지 않다.

 

작가는 외관이 숨기고 있는 존재의 발생 근거, 들뢰즈식으로 말해서 리좀의 끝없는 불규칙적 증식과 자기 발전에 귀 기울인다. 그래서 조용익의 조각은 양감과 형태로 대표되는 조각의 오래된 미덕보다는 차이를 파생하는 존재의 창의성과 그 안에 실재하는 다양한 스펙트럼에 주목한다. 그가 만든 사슴은 눈으로 확인된 사슴의 재해석이 아니라 사슴이 존재할 수 있었던 차이의 다양한 변이와 사슴 존재의 스펙트럼을 담는다. 존재의 형상은 그래서 더 이상 '시각의 문제'로 점철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대한 '의식의 문제' 안에서 다루어지게 된다.

 

감성적 영역에서도 그의 리좀적 사고관은 마찬가지로 작동한다. 작가는 고통, 불안, 답답함. 나약함, 고독 같은 삶의 '실질적 증거들'에 관심을 둔다. 하지만, 작가가 느끼는 이러한 것들에 대한 근본적 해결 방안은 없다. 아니, 해결될 기대도, 해결하고 싶은 욕망도 없어 보인다. 어차피 욕망은 또 다른 결핍을 부르고, 결핍은 또 다른 욕망을 잉태하고.., 이 악순환은 우리가 생명이라는 멋진 경험을 얻고 지불한 대가이지 않은가. 여전히 청년인 조용익은 예술을 실천하면서 이 명징한 논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단순하면서 간결하기도 하고, 복잡하게 뒤엉키기도 하는 본인의 심성과 닮은 조각을 구현한다. 흩어지면 붙이고, 너무 붙으면 떨어뜨린다. 그의 일상적 삶이나 예술적 행위는 오롯이 하나가 된 느낌이다. 고립되고 고정된 존재가 아닌 역동적 존재만이 감당할 수 있는 무한한 두려움은 그의 작품에서 신비롭게 각색된다.

조영익展 ‘형상의 이유’(Grounds for Shape)

조용익은 아마 이 지점에서 조각하는 참 즐거움을 만끽할 것이다. 그리고 그 즐거움은 가볍고 밝은 느낌의 스테인리스를 용접하면서 불꽃의 뜨거움과 식은 후의 차가움을 오가며 '특별한 세포'를 마구 증식시키는 행위로 귀결된다. 그의 작품은 멈춰있는 형상의 정적(靜寂)이 아니라 존재의 시끌벅적한 운동을 보여주는 일종의 다이어그램(diagram)이 된다.

 

작가는 어떤 형상을 끝없이 계획하지만, 그것의 뒤엉킴은 어디로 향할지 정작 본인은 모른다. 이 혼란스러운 생성이 경험의 상(image)에 가까워지면, 그걸로 충분하다. 결국, 조용익의 조각은 형상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기 위해 형상을 핑계 삼은 것일 뿐이다. ■ 이재걸

 

"나의 조각은 '왜 내가 여기에 존재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으로부터 시작된다. 형상을 만들기 시작하고 그 형상 속에 껍데기를 하나씩 벗겨가며 근본에 가깝게 가려 한다. 특별한 세포(cell)의 형태로 모든 사물이나 생명체를 보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흥미로운 사물이나 동물, 신화 속 신들의 형상으로 나름의 해석을 가한다. 그래서 외피가 아닌 내면의 형태를 끄집어내고자 한다."- 조용익, 작가 노트 중

조영익展 ‘형상의 이유’(Grounds for Shape)

Q. 이번 전시를 설명해 주세요.

이번 전시는 형상의 이유라는 타이틀을 걸었는데요. 형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유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전시의 주제로 들어가 있는 것은 셀리라는 세포로서 모든 사물들이나 대상들을 바라보는 제 자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여기에 놓인 작품은 제 자신을 나타내는 형상으로써 디자인 했고, 모든 것을 세포 화 시켜서 바라보고 거기에 대한 이유를 아름답게 붙여서 작업해 보았습니다.

 

Q. 이번 전시에 투자한 기간은?

작은 소품들은 제가 2012년부터 진행해 왔었고 제작기간은 2년 정도가 소요되었습니다.

 

Q. 이러한 작품들은 언제부터 시작하셨는지?

제가 중악대학교를 다니면서 철 조각이라는 작업을 접하면서 흉내를 내보고 거기에 대한 물성들을 연구하다 보니까 이런 스테인리스의 조그마한 물질을 모아서 형태를 만들어 가는 재미를 느꼈기 때문에 대학교 때부터라고 봅니다.

 

Q. 앞으로 계획 중인 작품은?

기존의 반짝 반짝한 스테인리스 작업을 최근에도 했었는데요. 기존의 작업과 최근의 작업을 접목시켜서 제 자신을 좀 더 솔직하게 보여줄 수 있는 그런 형상들을 만들어서 보여 줄 예정입니다.

 

Q. 본인 소개를 해 주세요.

저는 중앙대학교 대학원을 수료 하고 신진작가로서 조각의 새싹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더 좋은 작품 많이 해서 관람객들에게 좀 더 감동을 줄 수 있는 그런 작업을 많이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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