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코리아방송 = 김한정 기자] 갤러리 라메르에서는 2017. 9. 13(수) ▶ 2017. 9. 19(화)까지 '설숙영 展-그리움 속으로.. '가 전시된다.

설숙영 展-그리움 속으로..


그리움 속으로..

설숙영 도예전

누군가를 그리워 한다는 건 빛바랜 사진처럼 마음속에 스며드는 애잔한 추억이다.

추억은 되돌아가고 싶은 기억,

기억 저편에서 잠시 생각에 잠긴다.

 -설숙영 작가노트-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하여 제라르 즈네트가 말한 바는 설숙영의 도예 작업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본질을 드러내는 것을 지향함으로써,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계속해서 멀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놓쳐버린 진리, 즉 소유권의 박탈로부터 비로소 작품으로서의 가능성과 진정한 소유권이 생겨난다.”

글 : 김병수(미술평론가)


공예와 예술 그리고 미학이 접속하는 자리에 설숙영의 도예 작업이 위치하고 있다. 동양화에서 출발하여 도자기 속에서 전통과 동시대를 접속시키는 방식은 일종의 회고적인 성격을 지니면서도 일상의 미학을 실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기억으로서 전통은 추억 속에서 현전한다. 이것은 예술사와 개인사에서 공존하는 방식이다. 오히려 개인의 회고를 통한 시간의 현재화는 물질적 사유를 환기시킨다. 거기에 다양한 도예 작업이 등장한다.

설숙영 展-그리움 속으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하여 제라르 즈네트가 말한 바는 설숙영의 도예 작업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본질을 드러내는 것을 지향함으로써,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계속해서 멀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놓쳐버린 진리, 즉 소유권의 박탈로부터 비로소 작품으로서의 가능성과 진정한 소유권이 생겨난다. 프루스트의 글쓰기처럼 그의 작품도 일종의 팰림프세스트(Palimpsest, 다른 텍스트를 써넣을 자리를 마련하려고 적힌 글의 일부나 전부를 지운 양피지)이다.

그 안에는 다양한 비유법들과 의미들이 혼합되고 서로 얽혀 있으며, 이들이 모두 동시적으로 현존하고 있어, 오로지 풀어낼 수 없는 전체성 안에서만 해독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시간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역사의 흐름을 바라볼 때와 같은 방식으로 시간의 흐름 밖에 있을 수 없다. 역사 속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도예사 속의 도예가라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강에 비유하자면 우리는 아무리 멀리까지 내다봐도 강 이외에는 보이지 않는 광대한 강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역사를 역사로서 지켜볼 수 있는 일정한 장소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이때 사람은 ‘시간’의 한복판에 있으면서 ‘시간’이 움직인다는 것을 어떻게 알까? 아마도 기억과 추억의 관계가 그것을 설명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설숙영 展-그리움 속으로..

인간은 기억으로 자기의 정체성을 구축하려한다. 이렇게 이루어진 자아는 순수한 추억일 수는 없다. 그들의 모습은 항상 긴장을 유발하는 파워 게임이다. 추억이 기억을 변형시키기도 하고 기억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추억이 환기되는 경우도 있다. 기억이 모든 것을 좌우하지는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설숙영의 도예 작업이 이르려는 ‘미래의 추억’은 무엇일까? 동양화, 전통 도예 그리고 동시대미술로서 도예가 이루어내는 세계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어쩌면 그것은 지난한 작업으로 기억과 추억의 콘텍스트로서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특이한 비교미학이 요청되어야 한다. 매체와 문화라는 이중적인 구조에서 고찰해야한다는 뜻이다. 도예와 회화가 그 한 축이고 이른바 동양과 서양이 또 다른 축을 이루고 있다.


설숙영의 도예가 지닌 콘텍스트는 동시대의 문화 상황까지 포함하고 있다. 작가의 텍스트에서 창작과 해석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이 모두를 지배하는 구조 체계는 다름 아닌 전통의 규칙과 코드의 체계이다. 이 체계는 우리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적으로든 내면화한 것으로서, 우리가 텍스트로서 예술작품을 대면했을 때 어떻게 의미를 만들어 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이러한 규칙과 코드 가운데 일부는 대체로 우리들에게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 자연스러워하지만, 그 대부분은 제도로부터 배운 것들이다.

설숙영 展-그리움 속으로..

동양화와 도자기의 만남이라는 콘텍스트가 성립되는 지점이다. 작가의 작품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상기하게 된다. 이렇게 작가의 전공과 작품의 가치는 아주 중요한 관련을 갖는 것이다. 하나의 도자기라는 형태를 취한 작품은 단지 조형적 텍스트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장식이나 실용성 등 작품 외적인 요소도 무시할 수 없다. 작품만이 아니라 작품이 존재하는 ‘위치’를 고려하지 않으면 설숙영 도예의 총체를 제대로 포착할 수 없다. 이 경우 작품으로서 텍스트에 대해 작품이 존재하는 위치를 콘텍스트라고 하는데 여기에 대한 모색이 작가에게는 필수적이다. 원래 콘텍스트라는 개념은 언어학 분야에서 추상적인 언어 형식과 장면이라는 언어 밖의 요소 간의 결합을 나타내고자 사용되었다.

우리는 문맥이나 맥락이라는 말로 번역한다. 좁게 이해하면 어떤 말이 위치하고 있는 언어 구조이지만, 넓게 이해하면 언어가 존재하는 장소에 따라다니는 여러 가지 요소, 즉 화자, 청자 등 구체적인 요소에서부터 그 시대의 문화 상황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콘텍스트라는 사고는 동시대 미술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왜 도자기에 그림을 그릴까? 꽃을 포함한 이른바 여성적인 장식들은 단지 관습적인 전통에 대한 순응인가, 혹은 페미니즘과는 무관한가? 기억과 작업은 정말 동일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일본에서 체험한 ‘찬란한 문양 위주의 도자기’에 대한 매혹은 여전히 유효한가? 이러한 물음들이 가로지르는 장소가 바로 설숙영의 도예 작업이다.

설숙영 展-그리움 속으로..

이미 100여년 전인 1921년 야나기 무네요시가 「도자기의 아름다움」에서 “도자기를 단지 기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기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마음이다. 그것도 사랑으로 가득한 마음이다. 친밀한 마음이다. 그 아름다움은 친밀함의 아름다움”이라는 생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세계 도자사의 측면에서 보면 그리스 시대에 시작된 지중해 주변의 문화는 역시 조각 기술에서 앞서 있고 15∼6 세기 무렵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탈리아 반도로 페르시아계의 도자기가 보급되었을 때도 항아리나 사발 혹은 접시를 만드는데 만족하지 않고 그 위에 인물이나 동물을 부조하여 장식하고 채색도 다양하게 사용했다. 그 후 그러한 흐름은 프랑스나 독일의 마이센 등으로 퍼져갔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그리스의 타나그라 테라코타 등도 찰기 있는 점토로 만든 조각인데 또한 이 무렵에 이미 청동기에도 밀랍으로 원형을 만드는 기법이 있었고 또 대리석을 비롯한 석조의 전통도 깊었으므로, 당시 그들의 조형 능력을 생각하면 그것과 도기나 자기와 잘 융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설숙영의 도예는 이 지점에서 조각적인 것과 회화적인 것의 텍스처라고 할 수 있다. 또 동시에 다문화적인 콘텍스트를 구현하고 역사성을 획득한다.


설숙영은 단국대학교 대학원 도예과를 졸업하고 개인전 및 초대전 6회, 한 · 중 · 일 유럽 8개국 전시 外 단체전 및 국제전 50여회 전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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