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아트코리아방송] = 인사동 가나아트스페이스에서는 2017. 8. 16(수) ▶ 2017. 8. 23(수)까지 채 수평전이 열린다.

채수평 전

멸치는 멸치(蔑致), 또는 멸어(滅魚), 멸치어(滅致魚)로도 불리는데‘물 밖으로 나오면 금방 죽는다.’는 뜻에서 나온 이름이다. 청어목 멸치과에 속하는 멸치는 몸길이가 평균 12~13cm 정도로 가장 작은 바다생선이기도하며 전 세계에서 어업자원으로 쓰이는 종류는 140여종 중 7종정도이다. 우리나라 멸치의 주요 어장을 대부분 부산 기장을 비롯한 통영, 거제 등의 남해역대로 많이 알고 있지만 여수 남해역대도 어장이 풍부하고 맛도 좋아서 기실 여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어장이다.

채수평 전

멸치는 고등어나 청어처럼 대규모 군락을 형성하는 집합적 존재로 먹이사슬의 고통스런 현장에 맞닥뜨릴 때 그 중에 어느 개체가 불행하게 외부공격에 희생당하면서 전체의 생존성을 담보한다. 무리를 지어 피동적(被動的)으로 침략자에게 대항하는 소극적 외부대항 존재들이다. 밀집대형이 생존을 위한 방어이자 최선의 공격방식인 것이다. 멸치의 일상성에는 하찮고 볼품없는 빈약과 흔해빠짐이 가득하다. 흔히들 멸치도 생선이냐 한다. 단지 크기만 작을 뿐 일반 생선과 다를 것 하나도 없는 게 멸치이다. 어찌 보면 살아있는 멸치보다 이미 건조되어 상품화된 마른멸치만 봐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사실 마른멸치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알려진 것이다. 을사조약 이후 풍부한 수산자원을 가진 남해안 연안에 일본어민들이 집단이주를 하였으며 멸치어장은 주로 히로시마에서 온 일본인들에 의해 통영, 거제지역을 중심으로 어장이 형성되었다. 이들에 의해 지금의 마른멸치처럼 생멸치를 가마에 쪄서 말리는 가공법에 의해 맛이 장기간 유지되는 마른멸치가 알려지게 된다. 당시에 우리나라는 생멸치를 그냥 또는 요리해먹거나 멸치젓갈과 지금은 보기 힘든 말린 포로 먹었었다.

채수평 전

채수평 작가가 권한 김주영 소설 [멸치]에 제목이 주는 기대감과 달리 정작 멸치는 소설 끝자락에 가서 나타난다. 어린 소년인 주인공이 은둔자인 외삼촌이 기거하는 움막 근처 유수지에서 자맥질을 하다가 멸치떼를 만나고 “해부대위의 박쥐우산과 재봉틀”처럼 민물에 나타난 생경하기 그지없는 멸치떼는 소년을 감싸 안으며 끝을 맺는다.

채수평 전

- 사소한 어류인 멸치도 엄연한 척추동물이다. 산란으로 번식하지만, 알을 밴 멸치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고래가 멸치를 사냥하는데, 고래를 만난 멸치 떼는 질주를 멈추고 폭죽처럼 흩어졌다가 전열을 가다듬고 의연히 수중 발레를 벌인다. 그리고 물결을 이룬다. 목숨이 담보되고 말았는데도 비굴하거나 추악하지 않고 포식자를 향하여 매혹적인 군무를 보여주는 어류는 멸치뿐이다. 물결을 이룬 아름다운 춤사위에 매료된 고래는 더욱 충동적으로 멸치를 사냥한다. 그러므로 멸치는 고래보다 크고 의젓하다. 고래는 너무 크고 멸치는 제일 작지만, 고래보다 강직하고 담대한 어족이다. 그리고 내장까지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몸체로 일생을 살면서도 알을 밴 흔적만은 감추는 은둔자의 삶을 산다.

채수평 전

- 소설가 김주영

채수평 작가는 이번 전시의 제목을 멸아(?我)라 하였다. 멸치의 멸(?)과 나를 뜻하는 아(我)를 붙여서 작가의 모티브를 직관적으로 드러내고 싶어 했다. 작가의 중심 제재나 생각을 오차 간격 없이 작품과 함께 글로 마감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멸치떼를 화면에 구성하기까지 그가 가져온 일련의 행보를 이번 작품들에서도 보여주고 싶어 하는 작가의 의중에는 ‘전이’(轉移)가 기저(基底)를 이루고 있다.

그의 전작들 화면에는 장난감들과 책들이 많이 등장한다. 작가의 아들이 어릴 적 갖고 놀던 장난감들은 가족적 정감이 깃든 오브제로 재탄생하고 제목이 보이거나 혹은 제목이 사라지고 색면만 칠해진 많은 책들은 보편적 사회속의 일상과 근원의 관계가 내포된 은유적 표상(表象)으로 화면에 등장하는 것이다. 

채수평 전

플라스틱으로 통칭되는 합성 중합체(重合體)가 주 재질인 장난감들과 종이로 이루어진 책들에서 한 때는 생명을 지녔던 유기체(有機體)인 마른멸치로 작가의 시선이 옮겨지면서 비록 관심과 의중의 연속성은 계속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작가는 새로운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그 전에는 예컨대 장난감, 책등 선택한 대상의 본성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이번에는 그 의미가 달랐다. 근본적으로 자연에서 출발한 존재물을 앞에 두고 그 시각적 형상을 어떻게 화면에 구현해야할지 기술적 디테일은 차치(且置)하고라도 역시 자연에서 온 나무나 꽃 같은 것들과 달리 마른멸치 너머에 투영(投影)되는 멸치는 상당히 곤혹스런 의심을 계속 그에게 던져주었다. 멸치, 멸치떼 그리고 별 생각 없이 일상에서 보아왔던, 때로는 술안주였던 마른멸치 등.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서 꺾이지 않은 살아있는 꽃이나 테이블 위 정물로 변한 꽃이나 그려지는 대상 이상의 의미를 던져주는 중압감은 일반적으로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꽃의 생명이 다함을 슬퍼하는 감정이입의 상태는 특별하지 않는 한 서정적이지 고통과 회의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꽃의 변이(變異)에 대비해 멸치의 변이는 살아 움직이는 동적현상(動的現象)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며 ‘본디 살아감’에 대하여 회의적 의구심을 촉발 할 수 있다. 꽃과 책들에서 멸치떼 아니 ‘마른멸치’로 시선이 조율된 작가에게 그것은 지금껏 다루었던 소재들의 은유적 전이(轉移)를 통한 형상화작업을 벗어나는 문제가 된 것이다.


레이드(Louis Arnaud Raid)는 예술과 자연 간의 차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 조각작품(예술작품)의 ‘몸체’는 바로 지각된 형태 속에서 존재하며 그것이 깨뜨러질 때 생명없는 덩어리들만 남는다. 그러나 꽃이나 나무를 꺾을 때 연결 된 구조(본래형태)속의 표피들을 계속해서 벗겨 내더라도 미의 표면이 계속 나타나게 되고 그 각각의 미는 능동적으로 내재하는 표현의 효과를 창출해내며 그 각각의 미는 앞에서의 미와 밀접하게 연결되어진다. 우리가 그 자연물을 계속 파들어 가더라도 여전히 미는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의 유일한 한계는 어느 특정한 정도를 넘어서면 우리는 미를 인식할 수 없고 오직 가정하거나 상상할 수만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채수평작가가 소설 [멸치]의 그 이상야릇한, 어떤 정서적 감성을 일으키는 ‘멸치떼의 군무’만을 생각했다면, 어렴풋이 드러나던 소설 말미의 희망만을 보았다면 달리 주저함 없이 화폭의 평면위에 붓으로 멸치를 묘사하고 멸치떼의 군무를 그려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위에 언급한 ‘전이’(轉移)하에 멸치라는 대상을 택하면서 ‘본디 생명의 존재’가 개입되고 예술과 자연 간의 간극을 멸치에 투사(投射)하게 되면서 무엇인가 부족한 감을 토로하던 중 기존의 평면을 버리고 - 화면의 평면위에 묘사된 멸치가 아닌 - 입체로 멸치를 제작하고 채색하여 화면에 부착하는 형태로 그 부족한 감의 채움을 시도하게 된다.

여기에는 일종의 대위개념(對位槪念) 혹은 치환(置換)으로써 작업의 대상으로 차용한 멸치의 구조를 본디의 생명으로부터 다가온 멸치에서 오브제(objet)로 바꿈의 작가적 제의(祭儀)가 자리한다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의도적 혹은 의식적 전이(轉移)라는 공정(工程)을 거쳐 대상의 의미적 상태를 바꿔놓음으로 그것은 이제 비로소 멸치가 이전의 장난감, 책들과 같이 작가의 작업감성의 영역에 놓여있음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이제 화면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멸치와 작가만이 알고 있는 멸치가 공존하면서 단순하면서도 복선이 내포된 형상성을 드러낸다.  화려하면서도 단순한 색들이 강렬하게 다가오는 그래서 조금은 난폭한 화면의 프레임속에 멸치떼의 군무가 역동적으로 화면을 가득 메우면서도 이면(裏面)을 품고 있는 - 군무를 형성하는 각각의 멸치는 아이러니하게도 삶아 건조한 마른멸치의 주형물이다 - 살아 움직임에 대한 작가의 의심과 질문들이 각각의 오브제화한 주형물을 통하여 복선의 반전처럼 이율배반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색감에 의한 화려한 역동성과 오브제의 화석(化石)적 동태(動態)의 집합적 조합에 의한 일루젼이 화면의 주요 프레임인 구조에서 영국작가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 [살아 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육체적 불가능성]속 상어가 포르말린 방부액 큐브에 갇힌 박제된 진체(眞體)라면 채수평의 멸치는 아크릴컬러로 채색한 제의(祭儀)적 형상체(形狀體)라 할까? 허스트의 상어에는 즉각적으로 촉발되는 상해가는 날것에 대한 거부감과 그로테스크한 두려움이 지배적으로 자리하고 있다면 채수평의 멸치는 수동적으로 화면의 일부를 점유하면서 전체적인 화면을 구성하고 있을 뿐 번화한 도심가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파들의 움직임처럼 개별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군락성(群落性을)을 띤다. 더 나아가 그것이 생명에서 무생명으로 전이(轉移)라는 은밀한 작가적 제의를 치룬 기호(記號)로 확연하지 않게 화면의 구성을 이룬다. 그래서 작품의 첫 대면에서 전체화면에 역동적으로 전개되는 멸치떼의 군무에 시선이 먼저 집중된다. 결국 제의(祭儀)적으로 멸치의 실재를 은유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바다와 존재라는 관념적 실상에 물음을 던지는 작가의 의도를 화면에서 처음부터 잡아내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면 전체가 만들어내는 시각적 인상은 회화의 고혹한 매력을 던지듯 역동적으로 쏟아낸다.

강하게 색감을 드러내며 다이나믹한 리듬을 증강하는 화폭 이면에는 존재하는 실재성에 대한 작가의 고뇌어린 물음이 있다. 그 교집합 속에는 희망을 갈구하듯 시리도록 아름답고 현란한 멸치떼의 군무와 보잘 것 없음과 빈약의 멸치(滅致)가 동시적으로 교차하고 있다. 작업과 의식의 작가적 갈등과 연속에서 여수 그리고 여수바다와 사람, 과거와 현재, 멸치떼의 군무가 메타포(Metaphore) 궤적을 새김질하고 있는 것이다.

채수평작가의 ‘의식의 전이’에는 그가 살아온 지역, 역사 그리고 살아왔고 살아감의 관념이 무수히 각인되어있다.  그러나 이전 작업들과 달리 멸치를 대상화 한 이후 그것은 모두 작가에게 있어서 순수 작업의지로 대상의 구조와 표피를 계속 해체하고 벗겨내 갈 수 없는 무거운 중압으로 작용한다. 예컨대 피에트 몬드리앙이 초기에 “나무연작”의 작업에서 나무의 본래형태들을 삭제해나가면서 화면의 순수한 형태발전으로 진전해 간 끝에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작품과 같은 오늘날 누구라도 알고 때로는 가구의 디자인으로 차용되는 등 일상생활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원색의 기하학적 도형과 선들의 평면으로 완성을 보게 되는 그러한 프로세스를 바랠 수가 없다는 뜻이 된다. 즉 형식적 측면에서 이전 작업들이 회화의 순수영역을 어느 정도 강조하였다면 이제는 삶의 존재로서의 작가의 고찰이 형식구조의 비중을 완화하면서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나의 음악은 조국의 예술적·철학적·미학적 전통에서 태어났고, 고향은 나의 창작에 다시없이 귀중한 정서적인 원천이 되었다. 내 음악의 모태는 통영의 숲과 바다, 갈매기, 고기 잡는 소리이다." - 작곡가 윤이상

지역적으로 바다를 접한 작가의 세계가 드디어는 작가의 모티브가 된 것처럼 피할 수 없는 필연성이 작동하고 한 편으로 작가의 순수조형의지와는 다른 차원에서 작업의 동인이 되고 그 필연성에 내재된 역사와 삶의 양식은 작가의 의식에 자리하여 작업의 정의를 형성해 나가고 있다. 총체적으로 보면 작가의 그것이 Locality가 되었든 Glocality가 되던 이제 오십의 세월을 훌쩍 넘어선 채수평작가의 삶과 예술에 대한 인식과 사유의 제시이자 현재진행형의 예술적 성찰이라 할 수 있다.

2017년 7월 조형예술가 임상완(LIM Wan)


채수평은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졸업 및 동국대영상대학원 박사과정 수료했다. | 개인전 | 제13회와 단체전250회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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