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아트코리아방송]= 일우 그는 한 마리 소다. 느리고 게으른 듯한 풍모 뒤에 달관한 대범함이 있고 주위를 내리보는 듯한 성깔 속에 진솔한 포용력이 있다.

일우 박윤서 展-불이 Non-duality

길이 있든 없든 혼자서 뚜벅뚜벅 잘도 걸어가고 깊은 속내와 매운 눈길로 세상 보는 데에 아무런 거침이 없다. 그런 그는 자유인이다. 자유인은 세상사의 겉모습에 얽매이지 않고 다른 이들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는 잃을 게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잃을 게 없으면 꾸미거나 드러내지도 않는 법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허와 실이 없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불이이다. 모든 게 하나여서 불이(不二)이고 어떤 것도 다를 게 없기 때문에 불이(不異)이다.

일우 박윤서 展-불이 Non-duality

언젠가 그의 전시회에 간 적이 있다. 실상과 허상이라는 주제였을 것이다. 그림 마다 숲속 나무에 새가 앉아 있었다. 그러나 작가가 형태와 색으로 그린 새보다 나무와 잎새가 틈으로 드러내는 그려지지 않은 새가 더 눈에 띄었다. 그려진 새가 실상이고 그려지지 않은 새가 허상이었을 것이다. 왜 허상이 그렇게 돋보였을까? 허상을 그리기 위해 실상을 그렸기 때문일 게다. 자연 속에서 보이는 대로가 곧 진실은 아니다. 진실은 눈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눈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두 가지가 다 새라면 실상과 허상은 서로 다를 게 없이 하나이다. 불이이다. 실상과 허상을 구분하려 든 나는 바보이다.

일우 박윤서 展-불이 Non-duality

옛 누군가가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라 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음악이 미술보다 더 모방적이라고 썼다. 예술의 본질은 보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데 있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흔들고 생각을 움직이게 한다면 실상과 허상이 어떻게 다른 둘로 나누어질 수 있겠는가? 일우가 그림이라는 이름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그런 것일 것이다. 허상과 실상의 구분을 없애주는 것이 상상이다. 상상은 인간의 완전한 자유영역이다. 상상하는 힘을 가진 인간만이 자유롭다. 상상으로 인간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굴레에서 벗겨내고 자유를 누리게 하는 것이 예술이다. 박윤서에게서 문득 예술가를 보는 것은 그럴 때이다.

일우 박윤서 展-불이 Non-duality

예술가 박윤서를 (나도 그렇고 그도 예술가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지만) 이번 전시에서 만나게 될 듯하다. 흔히 볼 수 있는 자갈밭 사진 위에 자갈 한두 점을 올려놓은 게 내가 얼핏 본 이번 작품들이었다. 처음에 나는 그가 사진 속의 자갈과 실제 자갈을 대비시켜 놓은 걸로 알았다. 그래서 있는 새와 없는 새의 변주 같은 거라 생각했다.

일우 박윤서 展-불이 Non-duality

그러나 사진 위에 얹힌 자갈이 실제는 색을 입힌 종이모형이었다. 사진으로 찍힌 자갈은 허상으로서의 실상이고 모형으로 만들어진 자갈은 실상으로서의 허상이었다. 단순한 실상과 허상의 혼돈이 이런 것이었다. 그러나 말없이 되새김질하며 무심한 듯 둘러보는 소에게도 그것이 혼돈이겠는가? 이에 대한 생각은 보는 자의 몫이다. 이번 작품들에, 그간 그림 속에서 자유를 구하고자 모색과 방황을 거듭해 온 예술가 일우 박윤서의 진면목이 드러날 것이다.

김 세근


갤러리 라메르 제1전시실

2016. 11. 23(수) ▶ 2016. 11. 29(화)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194 홍익빌딩 | T.02-730-5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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