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아트코리아방송] = 여기, 우리 가슴에서 잊혀지지 않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의 따뜻한 체온과 숨결이 담긴 조각들은 남아서 여전히 그리운 손짓과 젖은 눈빛으로 서 있습니다. 조각가 이영주 선생님의 유작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제 가슴에는 말할 수 없는 깊은 그리움의 파문이 일었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사람이었고, 순수한 신앙인이었으며,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까지 작업장에서 예술혼을 불태운 불굴의 조각가였습니다. 그의 영혼의 환영과 사랑과 그리움의 시선, 정신의 분신인 조각 작품들은 시간의 유영을 넘어서 부드러운 유선형의 미학과 고요한 잔상으로 다가옵니다. 그는 거칠고 차가운 세상 속에서도 파쇄되지 않을 천년의 웃음과 그리움을 새기고 간 것입니다.

우리 교회 정문 앞에 세워진 예수님이 베드로의 손을 잡아 주시는 모습을 형상화한 이영주 선생님의 작품은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랑과 위로, 희망과 용기를 안겨주는지 모릅니다. 이번 유작전에 많은 분들이 찾아오셔서 그를 잊지 않고 기억하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뜻 깊은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떠났지만 여전히 그는 우리 곁에 있으니까요.

2016. 7. 12

소 강 석 목사 (새에덴교회, 시인)

寓話의 나라.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이영주는 미술대학을 졸업한 후 곧장 이태리로 유학을 떠났기 때문에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신예 조각가이다. 필자 자신이 그와 비슷한 시기에 수학했던 동문임에도 불구하고 몇 년 전에야 그를 알 수 있었을 정도로 그는 우리에게 낯선 존재이다. 그런데 필자가 그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진 것은 올해 초쯤 잠시 귀국했던 그가 나를 찾아와 자신의 유학생활과 작업활동에 대해 이야기 하는것을 듣고 난 후였다. 그때, 필자는 이태리에 유학했던 작가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된 어떤 특징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나의 생각을 밝힌 적 있다. 그것이 나의 선입견이었든 아니면 실제로 이태리에 유학했던 작가들이 보편적으로 가진 한계였든 돌에 제한된 재료의 선택과 대리석을 공예적으로 가공한 결과가 빚은 장식성에 대한 나의 불만을 들은 그는 집과 작업장 사이를 반복적으로 오가는 변함없는 일상을 토로하며, 한순간이라도 작업하지 않으면 생활리듬 자체가 흐트러지는 ‘자기와의 계속된 경쟁’이란 위기의식을 이야기했다. 말하자면 생활자체가 삶의 이유일 수밖에 없는 이 지리한 반복적 일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오로지 작업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의 말 속에서 전업작가로서의 직업의식과 작업에 대한 애정, 장인근성과도 같은 성실성과 근면함을 발견할 수 있었으며, 그것이 카라라 출신의 조각가들에게 가진 나의 불만을 해소하는데 일정한 보탬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작업활동을 자신의 존재이유로 여기며 열심히 작품만 제작한다고 꼭 훌륭한 작품을 창조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조각가에게 더없이 필요한 덕목임에는 분명하다. 나는 그에게서 노동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성실한 한 젊은 조각가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고 그것이 그에 대한 나의 신뢰를 형성하는 주된 이유가 되었다. 고상한 말로 남을 설득하기 보다 생활자체를 담담하고 정직하게 털어 놓은 그의 태도에서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잊어버렸거나 혹은 도외시해온 장인의 진지함을 발견했다면 필자의 판단이 과장된 것일까. 이영주의 작품에서 두드러진 특징을 든다면 그의 조각이 우화적이라는 점이다. 이런 점은 그의 작품이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의미와 상통한다. 실제로 그의 자품은 서로 상이한 이야기들이 마치 씨줄과 날줄처럼 교차하고 있으며 그것은 주로 꿈속에서 보았던 장면이나 대상을 입체로 구현하고자 한 상상력의 결과이다. 조각은 평면 위에 환영을 그려내는 회화와 달리 재료와의 투쟁 속에 삼차원적 입체를 만드는 것이므로 그속에 우화적인 내용을 담아내는 것이 쉽지 않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가 선택하고 있는 방법은 회화적 표현에 보다 가까운 부조와 환조를 결합시키는 방법이다.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에 있어서도 사람과 동물, 나무 등의 우리에게 익숙한 형상들이며, 이 대상들은 하나의 풍경처럼 그의 작품 속에 아로새겨져 있다. 동물의 등 위에 앉아 있는 사람과 그 옆으로 펼쳐지는 신전의 풍경, 사람의 머리 위로 나무가 자라고 그위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작은 마을의 지붕이 펼쳐지는 그의 작품은 충분히 초현실적이며 민담처럼 구수하고 시처럼 아름답다. 표현방식에 있어서 부조와 환조의 결합을 통한 서술성의 획득만큼이나 그속에 담고자 하는 내용 또한 꿈과 현실, 과거와 현재, 사적인 내밀성과 사회성, 남성과 여성, 한국적 정서와 서구적인 것 등 어떻게 보면 서로 대립적인 요소들로 구성되고 있어 보는 재미와 상상하는 즐거움을 제공한다. 이런 요소들이 그의 작품을 현실의 구체성을 심리적으로 재해석하게 만드는 장치이자 작품의 설화성을 강화하는 근거가 된다. 그리하여 그는 돌의 차갑고 육중한 무기질적인 속성을 이겨내며 ‘회화적 조각’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꿈과 욕말을 곧잘 신화를 통해 표현해 왔으며, 신화란 대체로 인간의 염원이 반영된 것이었다. 그런 점을 주목해 볼 때, 이영주는 자신의 ‘우화의 나라’에 걸맞는 신화를 창조하여 전파한 이야기꾼이자 음유시인이다. 그것은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자유’를 매개로 이루어질 수 있는 상상의 왕국이란 점에서 그는 이 작은 영역을 가꾸는 타고난 설계사이다. 그러나 양질의 대리석 산지이자 세계의 대리석이 가공을 위해 집결하는 카라라에서 다양한 성질을 지닌 돌을 골라 자신이 담아내고자 하는 이야기대로 깍고 쪼는 그는 돌에 생명을 부여하는 어떨 수 없는 조각가이다. 그의 작품이 지닌 따뜻한 정서처럼 그는 재료를 학대하지 않으면서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를 썩 잘 구현하는 재능있는 조각가인 것이다. 세련된 기교보다 다소 투박한 표현이 오히려 그의 작푸을 더욱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는 점에 대해 나는 지지한다. 고졸하며 명상적인 그의 작품은 분명 생활과 작업의 일치에서 비롯된 것이며, 먼 이방에서 자신과의 투쟁을 통해 체득한 삶의 방식을 반영하고 있다. 작업과정에 있어서 그에게 주어진 자유를 자기정체성의 구현을 위해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 또한 가치있는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상상의 자유가 다소 도식적이란 사실도 지적하여야겠다. 그것은 대립적인 이야기구조의 반복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무엇보다 그 폭이 제한적이란 점에서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우리의 기억에 오래남는 우화가 갖가지 비유와 은유의 조직구조인 것처럼 나는 그의 언어가 보다 깊이있는 삶의 교훈을 되새기는 것으로 거듭나기 위해 넓은 상상의 바다 가운데로 나설 수 있기를 바랄 따름이다.

최 태 만 (미술평론가)

표현본질의 교감을 배려하는 음유시인

한국의 조각가들은 이미 얼마 전부터 세계적으로 유명한 Apuana산맥을 끼고 있는 Versilia 지방의 특수한 환경(세계적 대리석 산지이며 집산지)을 그들의 경험적 유능함으로 소화하여 기념비적인 작업을 하는 작가들이 되었다. 이미 입중된바와 같이 몇몇 훌륭한 동양의 조각가들 특히 한국,일본의 조각가들을 통해서 그들의 독특함을 평가할 수 있었다. 그중 몇명의 주목받는 한국의 젊은 조각가들은 언젠가부터 이곳 Toscana의 전통적인 기술을 예술적인 환경에 적응시켜 나갔다. 그들은 그들만의 고유한 환경과 방법으로 창작활동을 함으로 인해 소위 “미술 애호가들”이라 부르는 비평가, 화랑관계자, 수집가들로부터 주목받고 있는 계속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조각가 이영주를 처음 대면한 것은 그가 지난 1994년 아주 무더운 여름 Luca지방 Altissimo산맥의 오래된 대리석 수송로인 Seravezza시가 조각가 미켈란젤로와 시와의 오래된 인연을 기념하여 주최한 “미켈란젤로의 도로에서”라고 명명되어진 국제 야외조각 심포지움에 초대되어 참가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힘든 작업이 진행되어 가는 동안 문득 개인적으로 그에게서 어떤 이상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다름아닌 그의 작업태도…. 그당시 나에게 그는 여느 다른 조각가들보다 아주 집요하고 인내심이 강하게 보였으며 시간이라는 제약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그의 감정과 언어를 그의 작품의 표면에 성공적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특히 그는 대리석을 파고들어가는 과정에서 독특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즉 다른 조각가들과 달리 돌의 표면부터 직접 파고 들어가는 방법이었으며 사실 이것은 대조각가인 미켈란젤로와 그의 조수가 특히 좋아하던 방법이었다. 이 방법은 작업과정에서 줄곧 확실한 뎃상력을 필요로 하며 후에 완성되어질 작품이 구체적으로 그의 눈에 보여야만 가능한 방법인데, 그는 작품을 끝내가는 동안 나에게 그것을 완전히 확인시켜 주었다. 아울러 그의 작품을 보는 동안 또다른 특이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항상 그의 주위에 관객이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과 그의 작품을 보노라면 하루하루 궁금증을 수반하는 어떤 매력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이후 몇 개월이 지나 우연한 기회에 그와 그의 작품들을 다시 접해볼 기회가 주어졌고 또 다시 접해본 그의 작품들을 통해 충분히 세련되고 가치있는 다양한 내용과 양식의 변모와 그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를 발견했다. 여기에서부터 그의 다른 작품들에 대한 나의 인식이 출발했으며 일련의 모든 대리석과 화강석으로 제작된 그의 작품 안에서 그 무엇인가를 경험하게 되었는데 그것에 대한 해답은 그의 순수한 작품에 대한 욕구과 그의 상상력 혹은 그의 마음이라는 거울에 비친 세상사와 과거와 현재에 대한 꿈이 복합적으로 조합되는 과정에서 때로는 상징, 은유, 반어법과 같은 그만의 구성방식을 취함으로써 그의 작품이 더욱 함축되어진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시간이라는 자유롭고 긴 공간 안에서 보는 이에게 더욱 더 흥미라는 생명나무를 심어주는 것이다. 노동을 소중히 여기며 묵묵히 그의 언어를 작품으로 옮겨가는 진지한 태도의 결과… 나는 그가 작업장을 오고 가며 작업한 결실 곧 조각가 이영주의 작품량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한 작가가 만들어지기까지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소요된다. 작가가 그 험난한 예술에의 길을 가는 동안 끝없는 자기자신과의 투쟁을 통해 자신을 무장하고 그러한 과정을 통한 후에 독자적인 작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게 되는데 이때문에 나는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곳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유렵에서는 사실 소작보다는 다작을 중요시하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훌륭한 작가와 쇠는 두드려야 강해지는 것처럼… 그가 이곳에 체류하며 제작한 믿어지지 않는 양의 작품들을 보면 그가 땀흘리며 겪었을 자신과의 투쟁을 짐작케 한다.

조각가 이영주의 두드러진 점은 그의 작품이 우화적이고 자유로운 메시지를 은근히 열변하는 자유주의자라는 점이다. 때문에 그의 자유로운 상상력의 결과는 풍부한 이야기꺼리를 제공하며 보는 이의 경험과 상상을 자유스럽게 유도해 내곤 한다.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 또는 소재를 보면 흔히 접할 수 있는 것들 인물, 집, 동물, 풍경 등과 같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이며 그는 그것들을 통해 쉽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의 여성적인 섬세한 조형감각은 때때로 어던 하나의 산이나 작은 언덕 위에 마을(촌락과 같은 구조물)을 구성하기도 하고 그곳에 얽힌 수많은 상황들을 그만의 견지에서 풀어본다든지 동물과 인간과의 공상적인 이야기들을 은유적으로 표현해 우리 마음속에 내재된 각자의 본질을 일깨워 우리를 시간이라는 깊은 계곡 안으로 끌어들이게 한다. 그가 어떤 확실한 색깔의 대리석을 선택하는 동안 그는 충만한 예술적 구상의 확신을 경험할 것이며 항상 그는 아주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것들을 눈에 보이는 매번의 경우 속에서 우연이 아닌 계획되어진 어떤 것을 여기에서도 동반하며 비애 속의 베일에 가려진 정서의 발로, 하지만 마찬가지로 이것 역시 사랑의 느낌이거나 시간을 멈추게 하고자 탐문하는 것에 대한 노력의 흔적을 그의 작품들은 취한다. 여기에 항상 작가 이영주만의 숙고가 있다. 남-녀라는 이명법이나 이미 기억되어진 풍경 그리고 형상, 실재가 안니 변형된 여정의 기록들, 환상과 과거 속의 그리고 현재 속의 상황을 통해 표현되어진 이와 같은 한결같은 몸짓의 연속은 조각의 완결된 제작과 적절한 관계를 통하며 그의 작업은 적절한 사고의 노력에 대한 주요성을 수반하며 지금까지 인식되어진 저 어떤 신뢰할 수 있는 것에 대한 확신으로 의심할바 없는 진실에 우리를 도달시킨다. 그의 표현형식은 대개 구체적인 형상들로 구성하고 있으면 대부분 그만의 언어를 적절하히 표현하기 위해 주로 부조형식을 취하거나 때로는 그의 독특한 구성형식 즉, 고고학에서의 유물발굴 상황 같은 것을 연출시키기도 한다. 이와같은 이야기를 다루는 조각가 이영주는 형식보다는 표현본질의 교감을 배려하는 음유시인이며 그러한 까닭에 그의 작품들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길고 긴 “그의 세계”에 대한 잔영을 남기는 것을 동반한다. 며칠 후 그것들은 더욱 풍성하게 와닿게 되고 그리고 그것들은 전혀 고갈될 수 없는 생명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 얼마 후 그는 이곳을 떠나 머나먼 그의 나라에서 다시 둥지를 틀고 작업을 할 것이다. 이곳에서 그가 그의 땀을 통해 구축해온 상상을 동반한 생명의 나라에서 비롯된 풍부한 그의 언어들이 이후 어떻게 변화될지 벌써 기대가 된다. 보아도 보아도 궁금한 이야기들이…

로도비꼬 지에루뜨 ? Lodovico Gierut 이탈리아 미술평론가

[어떤 여행], 우화를 위한 시간의 약도

돌에 다가앉아 이영주가 하는 작업은 세월이라는 조류에서 기억의 산호초를 쌓아올리는 행위에 가깝다. 노블화이트의 박공부조들이나 고색창연한 기념주는 서사의 기록이며 회람의 수단이라는 점에서 그의 조각이 지닌 서술적 맥락과 전통을 같이한다. 그러나, 이영주가 정과 연마라는 두개의 갈마듦으로 재생하는 각인은 이미 회자되고 망각해버린 이방의 구문이 아니라, 자신의 거울 앞에서 삶과 더불어 변화하는 시간의 약도이다. 그의 작업은 스스로 재생하고 다시 새롭게 반복되는 명상의 기호들을 다루고 있다. ‘어떤 여행’을 표제로 그는 사람들이 떠나고 돌아오는 여정을, 무엇을 떠나 어디로 향하는지를 묻는다. ‘존재한다는 것, 항해와 표류, 휴식처, 동행, 놓치고 싶지 않은 의미, 욕망과 희망, 풍성, L씨가 사는 세상, 손금, 내면의 속삭임, 명상록, 그리고 침묵의 나무…’ 해마다 봄이 떠난 그 자리에서, 조금은 더 비좁아진 행락의 너울 너머 벚꽃같은 눈웃음이 잔잔한 주름들을 마음 빈자리에 쌓아 갈 때마다, 그가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세상과 그 세상이 그리 오래 기억하거나 이해하지도 못할 각자의 삶이라는 화두에서, 성수반의 푸른 물그늘에 드리운 낯선 얼굴을 바라보며 자신이 두고 왔던 거울속의 풍경들을 반추하는 순례자처럼, 우리가 얼마나 멀리, 그리고 오래도록 벗어나 있었는지를 그의 작업은 깨닫게 한다. 세상살이를 명제로 다가오는 그의 작업은 우리 안에 스스로 꽃 피우다 시들곤 하는 그리움같은 기억과 연민을 새삼 응시하게 만든다. 바라보기 위한 고전적인 정면성이 서술적 조각의 형식이자 관행이라는 통제의 도구로 위장된 관객의 권리라면, 서로 마주보며 나누는 대화보다 얼굴 없는 정보의 검색이나 전송행위가 확대된 소통의 관계라는 말로 와전되는 현상도 역시 이기적인 문명이 지닌 자기파괴의 형식이자 섬처럼 고립해 가는 개인들에게 주어진 자기합리화의 권리라고 할 수 있다.

당신은 햇살이 금빛으로 익어가는 밀밭에서 한때 자신을 길들였던 어린아이의 머리결을 떠올리며 가슴이 뛸 수 있는 존재인가. 이 질문이 우화의 형태로 세상에 소개된 것은 이미 오십여년 전의 일이다. 반 세기 전만 해도, 미술사가 작품 혹은 유물의 미적인 가치 척도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두었다면, 인류학의 역할은 그 유물의 문화적 맥락에서 남은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그러나 현대의 미술사는 새로운 인류학적 개념을 빌어 스스로의 도구로 삼으며, 대상1)이 지닌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이 배태된 문화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을 적어도 분명하게 인식하고는 있다. 이상한 일이지만, 미술작품이라는 대상에서 그 작품의 외적인 맥락에 대한 포함과 의미해석의 문제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을 정도로 대립된 통합과 분리의 두가지 양상을 보이고 있는 듯 하다. 사실, 노을진 밀밭의 금빛에 대해 나는 아무 할말이 없다. 그러나 싱거운 맥주잔에 진간장을 한 두 방울 떨어트리며, 아카시아 꿀이 섞인 헤이즐넛 커피를 기억하게 만드는 그런 투명한 금빛에 대해서, 조금의 과장도 없이, 마음속에 붉은 노을이 동백처럼 번져가는 사적인 맥락의 선물이자 형벌이라고, 시간의 녹으로도 무디어지지 않는 추억이라고 서술할 수는 있다. 작업에서 열려있는 인식과 해석의 여지에 관해 이영주는 손이 많이 간다고, 한 작품을 완성하는데 예전보다 시간이 더 걸린다고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전시를 거듭할 수록 재료에 대한 해석이나 작업의 구상 모두가 규격의 틀안으로 고정되는 일 없이, 관객의 입장을 향해 점점 더 개방되어 간다는 해명이다. 사람들은 초대받은 만찬에서 쇼팽의 야상곡을 만날 수도 있고, 몇잔의 술이 물들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즈막히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흥얼거릴 수도 있다. “쇼팽은 낭만파 음악가로 기억되고 있지만, 그는 전혀 낭만파 음악가가 아니었다. 낭만파 음악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중의 하나는 문학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쇼팽은 단지 음악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정밀하게 계산된 숫자의, 정밀하게 계산된 작품을 낮아서 쓰고 있었던 것이며 변주곡을 드라마로 간주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쇼팽이 피아노의 시인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리고 그가 시를 쓰듯 ‘녹턴’을 써냈지만 더 이상 시적인 감성을 가지고 그의 음악을 들으려 하지 말라는 충고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시가 아니고 음악 그 자체이므로.”2) 물론, 어떤 사람들은 동백이 피었다가 고스란히 무너지는 그 짧은 시간의 침윤을 흘러간 가요의 애상과 혼합하지 않아도, 꽃이 지닌 향기와 색깔을 나른한 봄날 오후 내내 완상하는데 아무런 어려움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알 수 없는 것들에 관해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무지의 인정이 해답의 부재가 아니며, 쓸모없는 일 또한 아니라는 것을. 그렇게 우리는 세상에서 부재하는 해답에 대한 염려를 가벼이 진압한 채, 그의 작은 성소들이 지닌 충일한 삶 들을 다시 만나 볼 수도 있다.

이영주가 서술하는 구조들은 예외없이 정면성의 권위적 틀을 벗어난다. 돌이 지닌 입방체라는 고지식한 속성은, 굵은 몸짓과 표면을 감싼 구석구석마다 귀엣말 같은 이미지와 쪽지같은 짧은 글의 초상들이 빈틈없이 채워진, 담담한 비망록으로 바뀐다. 그가 기록한 형상들은 남성과 여성, 그리고 삶에 관한 웅변이 아니라 이야기이며, 삶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단문에 가까운 경구나 잠언의 관점을 지닌다.

작가는 흡수한 일상의 빛깔과 의미를 관객의 감성과 인식이라는 시금석위에서 헤아려 볼 수 있는 새로운 소통의 구문들로 제시할 따름이다. 그는 돌이라는 재료가 지닌 느낌을 알기위해 오랜 시간을 일해왔고, 여전히 그렇게 일하는 작가로 살아간다. 실제로, 이영주의 작업은 많은 이미지들을 품고 이지만, 그것들을 빌미로 자신을 미화하거나 탐닉하지도, 숨기거나 가두려 하지도 않는다. 그가 떠 있는 빈배를 가리켜 자신과 같은 존재로 느낀다고 말할 때조차, 얼핏 드리워진 그늘아래, 두볼에 홍조 가득한 산란의 어군이 모이듯 풍요로운 삶의 의미가 재생을 기다리며 맴돌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라보고, 돌이 갖는 매끄러움과 거칠고 단단함을 구별하며, 크고 작은 형상들이 지닌 모든 감각적인 매혹을 수용하는 것이 그의 목회에서 기대되는 입문 형식의 전부인 셈이다. 이영주의 작은 집들, 덩어리진 구름, 그리고 어딘가 여우가 숨어 있는 나무덤불의 도시와 이웃한 사람들은 당신이 익히 알고 있는 미소와 인사를, 그리고 가끔은 놀람과 한숨까지도, 그안에 보듬고 있으면서 여전히 넉넉한 세상이다. 당신이 하루의 그림자를 지우며 찾아갈 휴식처는 바로 자신안의 그 공허에 좀더 다가가려는 확신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을 수도 있다. 그곳에서는 시간을 망보고 있지 않아도 유순한 사람들이 좀더 젊어진다. 어떤 여행이든 그저 지나는 사람들이 머물러 살아가는 이들을 있는 그대로 읽어내기란 쉽지않다. 당신이 실타래를 물고있는 귀여운 여우를 아직 만나지 못했다고 해도 그리 서운해할 이유는 없다. 단지, 괴로움을 추억과 지리바꾸는 왕복 달리기에 일상이라는 구실을 달아, 그늘진 금빛 기억들이 삶이라는 연기의 뇌관을 지연시키는 동안은, 울퉁불퉁한 심장이 당황해하는 그 길목에서 언제든 잠시 머물러 보기 바란다. 당신에게 소중한 것을을 길잃은 눈 대신 마음을 열어 만나 볼 수도 있는데.

글쓴이 / 서 원 영


이영주 - 어떤 여행 2010

인사갤러리 기획전 이영주 - 어떤 여행은 대상을 섬세하게 바라보는 숙련된 작가의 시선과 은유적인 표현이 작품에 반영된 오랜 시간 동안 준비한 석조각전이다. 구체적인 표현으로 리얼리티를 추구하기 보다는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어우르는 조형성과 단단한 돌 위의 입혀진 서정성, 그리고 현실 속 있는 그대로의 우리네 삶을 선보인다. 사람과 풍경, 동물과 사물, 현실과 회상, 상상이 한 덩어리 위에 조합되고 구성되는 과정은 조각의 조형성을 창조하는 동시에 폭넒은 3차원의 공간을 끌어들이고 부조적인 정면성을 가진 채 관객을 응시하고 있다.

사람냄새 나는 조각. 이탈리아를 주무대로 유럽에서의 활동 후에도 국내에서 오랫동안 석조의 길을 묵묵히 가고 있는 조각가 이영주. 작가의 작업은 지금까지 ‘어떤 여행’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삶의 희로애락 그리고 상상력에 대한 이야기를 꾸준히 해왔다. 돌이라는 튼튼한 기록의 장에 고된 시간과 노력을 들여 한 점, 한 점 서술해 왔기에 작가의 감정과 주제들은 결코 쉬이 보이지 않는다. 새롭게 선보이는 우화가 가미된 15개의 반신상 작품들은 간략한 눈동자 상감기법으로 그 위치에 따라 대상의 소소한 눈빛과 다양한 표정을 담아내고 있다. 사람을 향한, 사람냄새가 나기에 자연스럽게 눈치를 포착하며 표현한 작가의 작업세계를 공유할 수 있다.

이별한 이. 사랑에 빠진 이. 기다리는 이. 고민에 빠진 이. 미소를 머금은 이. 화해를 위해 기회를 엿보는 이. 이 모든 이들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이자 작가의 모습이기에 차가운 돌에 감정이 흐르기 시작하고 이야기가 시작되며 사람의 냄새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작가의 조각은 관찰자의 내면으로 자연스럽게 다가와 깊은 추억과 잊혀졌던 감정들을 다시금 회상하게 하며 우리의 유대감을 통해 사람을 위한, 사람을 향한, 사람냄새 가득한 작품으로 되살아 난다. 흔들림 없이 땀과 노력으로 창조한 순수 조형예술의 세계를 작가는 즐기고 있으며 이번 전시를 통해 그 즐거움을 함께 공유하길 기대해 봅니다.

인사갤러리 큐레이터 조 윤 영


용인포은아트갤러리

2016. 7. 12(화) ▶ 2016. 7.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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