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 사람이 있다. 미성년자 성추행 혐의로 감옥에 들어와 한없이 우울한 상황에 놓인. 하지만 영화 이야기를 하는 순간만큼은 우울함을 잊을 수 있기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주절거리기도 한다. 그리고 바로 그 이야기 속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사랑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줄도 안다.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의 몰리나 얘기다. 굳이 영화 주인공과 다른 점을 꼽자면 몰리나의 생물학적 성은 남자라는 정도.

동성애자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좋지 않던 시대에 태어난 몰리나는 어쩔 수 없는 위축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무언가를 부탁할 때 '당신만 혐오스럽지 않다면'이란 단서를 붙이기도 하고, 남자는 여자를 원하게 돼 있다는 논리하에 주변 남자들과 깊은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가 으레 그렇듯이 주인공에게 사랑이 빠질쏘냐. 몰리나는 사랑에 빠진다. 감방 룸메이트이자 반정부주의자인 위험한 남자 발렌틴과.

몰리나의 사랑은 담담하다. 아니, 담담한 것처럼 보인다. 그의 행동은 우정인지 사랑인지, 혹은 인간이라면 갖는 측은지심인지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다 비로소 '어머니가 왔다 가셨다'는 거짓말이 시작되면서, 짜놓은 것처럼 사식이 온통 발렌틴의 몸보신을 위한 것들임이 드러나면서 관객들은 알게 된다. 몰리나의 담담함 속에 어떤 열정이 숨겨져 있는지. 그 마음을 알고 나면 몰리나가 왜 그토록 발렌틴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 했는지 눈물이 날 정도다.

그렇다면 이토록 순애보적인 사랑을 받는 발렌틴은 과연 몰리나를 진심으로 사랑했을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슬프게도 '그렇다'는 대답이 선뜻 나오지 않는다. 몰리나를 진심으로 아끼는 것 같다가도 둘이 나눈 감정이 아닌 성행위 자체를 분석하는 행동. 두 번 다시 남자에게 이용당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란 대사. 순수한 사랑이라 칭하기엔 어딘가 꺼림칙한 기분이다. 그 때문에 몰리나의 사랑이 더욱 마음 아프게 다가오는 것도 있지만.

맞닿아 있는 것 같지만 오묘하게 어긋나 있는 두 사람의 감정은 변환 없는 무대에서 극대화된다. 아무리 작은 극장이라 해도 무대 변환이 전혀 없는 극은 드물다. 하지만 '거미여인의 키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무대가 유지된다. 과감하게 '정중동'을 택한 것이다. 너무 단조롭지 않을까 했던 생각은 배우들의 감정이 고조됨에 따라 서서히 잊힌다. 앞이 한 치도 보이지 않는 암전의 활용도 적절하다. 배우들의 움직임을 제외하곤 바뀌는 게 없는 상황에서 암전은 꽤 드라마틱하다.

한편 발렌틴은 몰리나를 거미 여인이라 칭한다. 몰리나가 들려주는 영화 이야기에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었기 때문인지, 몰리나 자체에 끌렸기 때문인지는 모른다. 어떤 이유이든지 간에 몰리나에게 얽힌 발렌틴처럼, 극이 펼쳐놓은 거미줄에 관객들도 서서히 얽혀들어 간다. 한순간에 감정이 극대화된다기보다, 차곡차곡 감정을 쌓아올리다가 마지막에 둑이 터지듯 팍 넘치는 식이다.

힘차게 타오르다가 갑자기 꺼진 촛불처럼 고조된 분위기가 한순간에 가라앉을 때, 몰리나는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비련의 주인공다운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암전과 함께 극이 마무리되면서 여운에 젖어있을 무렵, 몰리나가 다시 등장한다. 여자를 우아하게 만들어준다던 뒷머리를 올린 헤어스타일과 함께. 그런 머리를 하고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이런 생각이 든다. 비록 커튼콜 때의 모습이라 해도 몰리나는 그 나름대로 해피엔딩을 맞이한 게 아닐까 하는.
 

저작권자 © 아트코리아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