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아트코리아방송】 2013,09,21[방화대교]야경촬영 탐방에 나섰다.
솔직한 차용주의자">
【경기,아트코리아방송】 2013,09,21[방화대교]야경촬영 탐방에 나섰다.
솔직한 차용주의자">
솔직한 차용주의자" data-idxno="oldIdxno" data-type="photo" style="display:inline-block">
[경기,아트코리아방송] 9월의 마지막, 방화대교 북단 에서 남단으로 바라보는 [방화대교]야경 붉은 꽃 저녁 야경촬영에 한강의 시원한 저녁 행주산성으로 오른다.
주말을 이용하여 추석 막바지 휴일[토요일] 방화대교 야경사진을 담기위해 가까운 한강 방화대교를 찾았다.
행주산성에서 바라본 한강 방화대교 생가보다 많은 남,여 사진인들이 방화대교 야경촬영에 포인트 자리에 틈새가 안 보인다.
추석 마지막 휴일 [방화대교]아치트러스[arch truss]가 이번 일요일까지가 유일한 야경을 촬영할 수 있는 마지막 불빛이라는 말에 사진인들이 많이 몰 린듯 하다. 방화대교는 촬영도 중요하지만 촬영 후 주변 정리가 필요하다.
촬영지 어디든 寫眞人들이 남기고 간 보기 싫은 그 흔적을 꼭 남기는 사진인들이 많다.
싸가지고 온 음료, 빈 페트병, 휴지 등을 촬영한 어둠속 자리에 벼려두고 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러한 쓰레기들은 본인들이 말끔히 치우고 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린 마지막 촬영을 마치고 버려진 쓰레기를 그냥 보고 올 수 없어 모두 주워 봉지에 담아 내려오는 길 옆 휴지통에 모두 넣고 돌아 왔다.
어느 일부 사진인들로 인해 촬영 장소에 흔적을 남겨두고 온다면 관리공단으로 부터 입, 출입이 어려워진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당부 드리고 싶다.
"임진왜란 역사이야기"
[행주산성]에 아녀자와 행주치마는 없었다,
행주치마란 단어는 행주산성 전투(1592년)가 있기 한참 전인 중종 12년(1517)과 22년(1527)에 최세진이 각각 편찬한 와 라는 책 등에 이미 등장한다.
따라서, '행주치마'가 행주산성에서 유래하였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는 민간어원설일 뿐이다.
권율장군 이 관군과 승병으로 이루어진 4천 남짓한 병력으로 행주산성에 주둔하게 된 계기는 명나라의 본격적인 참전이었다.
평양을 탈환한 조명 연합군은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공격을 서두른다. 일본군의 전력을 얕잡아 본 이여송은 친밀한 부하제장들의 전공을 높여주기 위해 화포병 없이 기병을 주축으로 한양으로 진격하다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크게 패하여 패퇴한다. 이때가 1593년 1월 23일이었다.
"방화대교에 대한 사례"
방화대교는 2,559m로, 인천국제공항 고속도로 구간 중 서울특별시 입구에 건설된 다리이다,
한강을 횡단하는 다리 가운데 27번째로 건설선 최장 교량이며, 특히 중앙부 540m의 아치러스[arch truss]교는 비행기의 이착륙을 형상화한 디자인으로 미관이 뛰어나서 남쪽의 개화산과 북쪽의 행주산성은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다리의 구간은 퇴적층이 20m 넘고 지지층 심도가 36 ~ 40m에 있으므로 대부분의 기초는 깊은 기초 형식으로 시공되었다. 수상 시공이 용이한 유심부에는 우물통 기초공법이 육상부에서는 현장타설 말뚝기초와 강관 말뚝기초공법이 각각 구분되어 적용되였다.
주간경부 교량 형식인 아치트러스교는 전 부재가 압축 또는 인장을 주로 받는 이상적인 구조 형식으로, 접속 경관부 및 램프부의 교량형식은 스틸박스길더[steel box girder] 교로 만들어 졌다,
http://www.artkoreatv.com/
경기, 아트코리아방송 한정석 기자
alfo35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