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미술평론가, 중앙대교수)

사각의 캔버스 표면에 겹쳐 드리워진 종이띠 조각들. 최필규의 종이띠는 대부분 실물처럼 보이나 실재가 아닌 일루전이다. 찢기고 구겨진 형상으로 묘사하고 중첩해 배열하는 방식에 의해 종이의 일루전은 보는 이를 어떤 관념의 세계로 안내한다. 실재가 일루전으로 재현되고 거기서 환상이 일어나는 현상은 회화예술의 본성이라 할 것이다.

파이프가 파이프 그림으로, 사과가 사과 그림으로 재현되는 과정에서 작가의 예술의지가 개입되듯, 최필규는 종이를 종이그림으로 표상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관념세계를 만들어 왔다.

최필규가 가꾸는 일루전의 텃밭에서 자라는 관념의 갈래는 다양하게 읽혀진다. 민간신앙에 관심을 가진 이는 종이를 무속의 차원으로 이해하고, 세시풍속의 기억들은 종이를 전통 놀이라는 맥락으로 연계시킨다.

어떤 이는 캔버스 표면에 중첩된 종이띠의 구조나 구겨진 표면이 주는 재질의 가벼움에 의미를 두기도 할 것이다. 때로는 찢고, 자르고, 구기고, 붙이고, 그리는 행동에서 유희충동의 본능을 발견해 내기도 한다. 이 모두는 종이가 종이의 일루전 혹은 종이조형으로 제시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상념들이다.

이번 개인전에서 선보이는 최필규의 종이작업은 가히 기념비적이다. 1970년대 후반에 시작되어 다양한 변주를 거치며 심화되어온 일루전적 실재 위에 종이의 정신성과 조형적 실험 의지가 종합적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전시장의 벽면을 채운 폭 8-10미터에 이르는 대작들은 작가의 종이작업에 대한 열정과 확신의 결과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전시장 가운데에 설치한 거대한 대나무 기둥과, 벽면에 드리워진 종이폭포, 그리고 그 위에 투사되어 흔들리는 대나무 영상 이미지는 종이를 둘러싼 작가의 관념세계를 종합적으로 보여준다.

화가로서 최필규의 작품세계는 실재와 일루전의 간극에 대한 성찰에 기초하고 있다. 실물과 허상이 상호 충돌하거나 융합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판타지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번 개인전에서 작가는 실재와 일루전이 피워내는 환상을 2차원 평면의 차원에서 3차원 입체의 세계로 확대시켜 놓았다.

벽면에 드리워진 종이폭포 형상의 설치물 는 종이의 일루전을 평면에서 입체로 옮겨놓은 사례다. 작가는 종이폭포 위에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영상 이미지를 투사함으로써 실재와 일루전 사이의 관계를 복합적으로 변주시키고 있다. 벽면에 고정된 종이다발과 그 위에 비추어진 대나무 잎사귀의 움직임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백지의 판타지는 급기야 4차원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이번 전시를 위한 필자와의 대화에서 최필규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어릴적에 경험한 ‘성주대’의 기억이었다. 집을 새로 짓거나 옮긴 뒤에 가신(家神)을 받아드리는 무구(巫具)로서 성주대에 대한 기억은 그의 작업 노트에서도 다음과 같이 밝힌바 있다 : “어린시절 외할머니댁 대청 대들보에 걸려있던 팔랑거리는 하얀 성주대의 창호지는 왜 그리 신비로웠던지 (...) 작업 후 보여지는 시각적 일루전은 성주대에서 느껴지는 아련한 기억 그것이다.

찢기운 하얀 종이결은 작업실 문 위에서 지금도 팔랑이고 있다”. 어릴적의 기억이 작가의 작품에 미치는 영향은 대개의 작가들에 있어 중요하게 나타나는데 최필규의 경우도 예외는 아닌듯 싶다.

최필규의 종이작업은 어릴적 기억속의 무속 개념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여러 갈래로 오려낸 한지는 신령을 상징하거나 신령의 의사 및 행동을 표현하는 매체로서 농촌이나 어촌 마을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최필규의 종이조형은 민간신앙으로서 무속과 연계된 상징의 차원을 넘어서 있다. 무구와 그 상징이 작가의 창조적 영감을 자극하는 원천의 하나인 점을 부인할 수 없지만 정작 그 너머에 자리잡고 있는 예술의욕은 무속의 영역으로 제한되어 보이지 않는다.

백지라는 대상 앞에서 작가가 느끼는 즉물적 희열과 조형적 확신이란 화가로서 삶의 노정에서 체득한 예술의지의 산물이란 측면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작가의 고백처럼 그의 종이조형은 유희이자 카타르시스로 인식되고 있기도 하다 : “하얀 종이의 구김과 찢기는 나의 즐거운 놀이(유희)이며 카타르시스다”.

최필규의 종이작업은 다양한 시각체험과 관념을 드러낸다. 우선 그의 백지 일루전 작업에서 눈을 끄는 것이 종이띠의 조형적 구조다. 캔버스의 표면에 배치된 종이띠의 패턴은 반복적이며 구축적이다.

허공에 수직으로 드리워진 커튼의 형상에서 빗줄기 같은 사선의 형상에 이르기 까지, 그리고 사각형의 구조에서 삼각형이 연속적으로 배치된 다면구조에 이르기 까지 조형의지는 작가의 작업에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다. 최필규의 백색화면에 배열된 종이띠의 조형방식은 1970년대 이래 지속되어온 단색평면주의 경향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최필규의 작업에 나타나는 평면구조는 일루전적 환상과 연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물질과 사변적 정신성을 드러내는 기존의 작품들과 차별화 된다.

최필규는 이번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 제목에 ‘시간’과 ‘흔적’이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작품 제목 는 작가의 관념세계를 이해하는 열쇠다. 그가 드러내는 시간의 흔적은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풍어를 기원하는 선상의 깃발이거나 상여의 뒤를 따르는 만장(輓章)의 행렬을 스쳐온 시간이자, 때로는 흩날리는 낙엽처럼, 때로는 한여름의 장대비처럼 계절의 순환성을 나타내는 기호로 다가온다.

종이 띠마다 새겨진 주름은 상념의 흔적들이다. 그의 백색환상은 비어있는 것처럼 보이나 인간의 삶을 나타내는 희노애락과 생노병사의 시간들로 채워져 있다. 시각을 달리하자면 그의 시간과 흔적은 다름 아닌 예술가가 찢고 구기고 펼치고 뿌리고 그려내는 노동의 시간이자 그 자취다.

최필규가 가꾸는 일루전의 텃밭에는 시간이 남긴 관념들이 자라고 있다. 이 모든 관념들은 실재와 일루전의 서로 뒤섞인 환상으로 제시된다. 예술이란 의식적인 자기기만이자 일루전의 유희에 바탕하고 있다는 랑게(Conrad Lange)의 예술환상설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의식적인 자기착각이라는 평면회화의 본성을 따르고 있는 그의 작업이 향후 어떤 방향으로 이어질지 사뭇 기대된다.

■ 최필규

중앙대(서라벌예술대) | 홍익대교육대학원 졸

개인전(9회) | 2013 개인전 (가나인사아트센터:서울) | 2008 롯데 갤러리 초대전(롯데백화점:안양) | 2007 평택시 초대전 (평택호미술관:평택) | 2006 세종갤러리 초대전(세종호텔:서울) | 2006 개인전 (수원시미술관:수원) | 1998 개인전 (서경갤러리:서울) | 1997 개인전 (컴아트 미술관:수원) | 1993 개인전 (장안갤러리:수원) | 1989 개인전 (갤러리 동숭아트센터:서울)

아트페어 | 2013 BIAF 부산국제 아트페어(Baxco :부산) | 2009-2012 마니프 서울국제아트페어(예술의전당:한가람미술관)

그룹전 | 2013 100호 초대전 (수원시미술관) | 2012 경기도 대표작가 초대전 (남송미술관) | 2012 한,중,일 코스모 아트전 (노송갤러리/요코하마갤러리) | 2012 소사벌 국제 아트엑스포 (마닐라 국립현대미술관) | 2010 새만금 깃발미술제 (새만금 방조제) | 2010 한국현대미술의 新르네상스展(서울아트센터) | 2009 중앙현대미술대전 (서울시립미술관 분관) | 2009 “용의 비늘”전 (서울 예술의전당) | 2009 한,일 모던아트전 (타블로 갤러리) | 2007 소사벌 아트엑스포 (평택호예술관) | 제6,7,8회 INDEPENDENT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 제2회 중앙미술대상전 (중앙일보주최: 서울) | 제27회 국전 (문화관광부:덕수궁) | 제6회 경인일보사 초대작가전 (문화회관: 인천) | D.M.Z전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 현대미술 스페인전 (마드리드 : 스페인) | 국제아트페스티발 "동방의 등불展" (뉴델리 : 인도) | 뒤쉘도르프 현대미술 초대전(독일)

작품소장 | 국립현대미술관 | 서울시립미술관 | 종이문화재단 종이박물관 | 뉴코아백화점 | 일본 센다이총영사관

현재 | 수원여자대학 교수 | 경기도 미술대전 초대작가 | 한국아동미술학회 고문 (2대 회장 역임) | 중앙대학교 서양화과 동문회장 | 한국미술협회 이사


가나인사아트센터

2013. 12. 11(수) ▶ 2013. 12. 1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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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코리아방송 김한정 기자 (merica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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