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열 소장품 이야기 18 - 우타가와 구니요시 외한때 에도시대 우키요에를 수집한 적이 있었다.대표적인 작가로 우타가와 구니요시와, 히로시게, 호쿠사이 등이 있는데 북악 36경을 대표로 들 수 있다. 나는 1850년대 제작된 우타가와 구니요시의 우키요에 초판본 80여점과 북악36경등 500여점의 우끼요에를 수집하게 되면서, 한때 일본의 미술사를 달달 외울 정도로 심취하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갤러리를 시작하고, 우끼요에 몇 점을 인터넷 경매에 냈더니, 이게 한점에 30만원, 50만원에 솔솔 팔리는 것이었다. 그때 내가 판 작품 중 구
김수열 소장품 이야기 17 - 카지카와요시카즈(Yoshikazu KAJIKAWA)2022년 아산갤러리 개인전을 통해 소개한 적이 있다.쉽게 이해하기 어려울만큼 정교한 작업으로, 유심히 살펴 보다보면 인간의 손 끝에서 나왔다는게 신기할 따름이다.오래전부터 작가와의 인연으로 한점 한점 구매를 하다보니, 이제 제법 큰 전시도 독자적으로 열 만큼 준비가 되었다.2022년 아트부산 솔로부스를 성공적으로 마쳤고, 올해는 작가를 직접 초대하여 '2023아트부산' 아산갤러리 부스에서 작가의 싸인회와 함께 특별 이벤트가 열리게된다.
김수열 소장품 이야기 16 - 이숙자내가 컬렉션을 막 시작할 때 즈음, 인사동에서 이숙자 선생님의 전시를 처음 보게 되었다. 한참 그림에 재미를 붙여 싸 돌아 다닐때라 누드화엔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지만 이숙자 선생님의 이브의 보리밭은 정말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눈 둘 곳을 못 찾아 이숙자 선생님의 그림이 보리 알갱이 하나 하나를 입체로 그렸다는 것 조차 모르고 나왔었다.그래서 내 머리 속에 이숙자 선생은 더더욱 각인 되었고, 이후 이숙자 선생님이 '제 2의 천경자' 라느니 '천통 채색화의 계보를 있는 작가' 라느니 등등의
김수열 소장품 이야기 15 -김재일조각가로서 평면 작업에 도전 했고, 결국 작품성을 인정받아 해외 갤러리를 통해 국제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이다.이미지로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구멍 안에 또 구멍, 그 구멍 안에 더 큰 구멍... 작업의 방식이 워낙 독특해서 보는 사람들이 가장 궁금 해 하는 것은 "어떻게 만들었지??"라는 궁금증에서 출발하게 된다.그렸다기 보단 만들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 지도 모른다. 만들고 그 위에 채색하고 ......작업 방법은 기업 비밀이라....
김수열 소장품 이야기 14 - 곽덕준내가 컬렉션하고 있는 작가중, 가장 집요하게 추적하면서 컬렉션 하고 있는 작가 중 한분이 곽덕준 선생님이다. 곽덕준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2010년 경 경기도 미술관에서 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선생님은 신문지를 가위로 자르고 계셨다. 그 날 부로 곽덕준 선생님에 대해 궁금해 지기 시작했고, 주로 미술관 자료를 통해 알아갈 정도였으며 선생이 일본에서 활동을 하시다 보니 국내 전시에서 선생님 작품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오직 경매에 작품이 출품 되길 기다려서 겨우 구입할 수 있을 정도였으나 그마
김수열 소장품 이야기 13 - 이민혁2005 ~6년 즈음 대학원생 몇 명과 전국의 졸업생이 주축이 되어 모임을 결성하고 전국의 미대 학생들을 모집하여 전시를 열고, 미술 시장에 정식 데뷔하는 사건이 있었다. '스튜디오 유닛' 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당시 '스튜디오 유닛' 은 전국의 대학생 및 대학원생의 출품을 받아 1년에 한번 대규모 단체 전시를 하였고, 그 전시에 출품 된 작품을 경매를 통해 후원자를 이어주는 역활을 했다. 또 홍대 근처에 작업실을 열고 있는 어린 작가들의 작업실을 순회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전국의 컬렉터를 불
김수열 소장품 이야기 12 - 김환기미술품 수집이 구색 맟추기에 급급할때가 있다.내가 소장하지 못한 작가의 좋은 작품을 보면 소장욕구가 생기기 마련이다.그런데 그게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가격일때는 괜히 내가 작아지고 의기소침해 지기도 한다. 그래서 선택하는 방법이 비교적 만만한 판화나 습작드로잉으로 허전함을 달래기도 한다.나한테 김환기 화백의 작품이 항상 그랬다.내가 미술에 관심을 가지기 전부터 이미 불루칩이었고 가격은 한 없이 올라만 갔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 그림값이 지금 습작 드로잉 한점 값이나 비슷할 때였지만 내 수
김수열 소장품 이야기 11 - 김성오소장품 이야기를 시작하고 , 숙제가 되어 버렸다. 오늘은 누구를 소개할까 걱정을 하게 되고, 소개하고 싶은 작가가 떠오르면 문제는 쓸만한 작품 사진을 찾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작품을 꺼내어서 사진을 다시 찍을 상황은 못되고, 그러다 보면 정말 자랑하고 싶은 사진보다는 우선 눈에 보이는 사진으로 올리고 나면, 작품의 디테일이 뒤떨어지기 일쑤다. 어쩌랴~~!! 내 사정이 그러한 것을....하루빨리 번듯한 수장고를 지어서 한 곳으로 작품을 집결 시키지 않는 한 제대로 된 작품 관리는 어려울 수 밖에
김수열 갤러리스트 소장품 이야기 10 - 정상화한때 일본을 오가며 한국 작가의 작품을 보이면 보이는 데로 구입 해 온 적이 있었다. 지금 생존 작가 중 한국의 가장 비싼 작가 탑3에 계시는 정상화 선생님의 작품이, 한때 일본 화랑에서는 거의 휴지 값에 거래가 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시는 분은 그리 많지 않으실 것 같다. 나는 컬렉터로서 참 운이 좋았던 것이, 일본의 몇몇 경매 회사를 일찍 알았었다는 것이며, 단색화에 매력에 일찍 빠졌었다는 것이었다. 그렇더라도 비싼 작품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던 나로서는 가급적 가격이 싼 작품을 구
소장품 이야기 9 - 오경덕오경덕 작가는 지푸라기 화가로 알려졌었다. 작가는 유화의 질감에 빠져 두툼한 느낌의 그림을 마음껏 그리고 싶었고, 재료를 마음껏 쓸 만큼 사정이 그렇게 나아지지는 못했고,궁여지책으로 찾아낸 방법이 들판에 널린 지푸라기와 흙이었다. 작가는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선택한 방법이 진짜 지푸라기라고 했다. 캔버스 바탕에 지푸라기를 썰어서 깔고, 그 위에 유화 물감을 얇게 발라 두께 감을 주어 자연.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내거나, 백토. 황토. 흑토흙을 사용해 백인 종, 황인 종,
소장품 이야기 8 - 조영남그림이 투자 자산 이라고 한다면, 나로서는 가장 투자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 작가가 조영남 선생이다. 조영남 선생은 연예인 활동을 해오신 분으로, 보통은 그림을 취미로 그린다고 생각하게 된다. 본인도 취미 활동 이라는 말을 자주 함으로서 취미 생활로 인정하는데 있어서 의견차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취미로 그린 그림이 이미 3,200점이고, 설치 조각을 합하면 대략 3500점에 넘는다는 점이다. 나는 한국의 현대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한국적 팝아트의 탄생에 대한 의문점이 누구보다 강하다, 그리
소장품 이야기 7- 이건용내 소장품 중 가장 이야기꺼리가 풍부한 것은 역시 이건용 선생님의 작품이 될 것이다.2008년 이건용 선생이 미국전시를 위해 한국을 떠나있게 되었고, 그때 경기도 백남준 미술관 오픈에 맞춰 전이 열리고 있었다.당시만 해도 이건용 선생은 자신의 이벤트적 행위에 더 많은 의미를 둘 때라, 신체적 한계에 대한 증명을 해 보이는 것에 더 집착했고 이러한 작업은 일회성 퍼포먼스로 진행되기 일쑤였다.선생은 백남준 아트센터에의 전시 역시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벽면과 바닥에 작업을 하셨다. 때문에 전시
소장품 이야기 7 - 황시(쓰마오)작가를 발굴하는 갤러리로서 한국 작가만 집중하기에는 세계 시장이 너무 컸다. 해외를 나가면 미래가 촉망되는 작가를 찾기 위해 나름 노력했고, 2010년 북경 아트페어에서 작가의 작품을 처음으로 대면하게 되었다. 작가의 작업은 중국의 특권층에 대한 비판과 자연에 대한 경고를 표현하고 있었고, 개념적 사고가 분명한 이미지는 세계 어디를 내어 놔도 너무나 독자적인 작업 방식이었기에, 작가의 미래에 대해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이듬해 작가를 만나서 계약을 맺고 1년에 40점씩 5년간 200점을 구매하기로
소장품 이야기5 – 한만영한국의 팝아트 선구자에 대한 자료를 찾던 중, 몇 가지 일화를 접하게 되었다.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 선생님 초기 작업이 팝아트 적 경향을 띄고 있었다는 사실이나, 또 자신은 팝아트라고 주장을 하는데 남들이 팝아트가 아니라고 하는 조영남 선생님이나, 남들이 팝아트로 보는 것에 대해 스스로 팝아트가 아니라고 부인해 버린 한만영 선생님의 경우가 그랬다. 내가 한만영 선생님에 대해 알게 된 것은 한국의 팝아트 선구자를 찾아보는 과정에서 발견한 이름이었다. 한만영 선생님의 작품은 명화를 패러디 하거나, 실생활의 오브
소장품 이야기4 – 윤진섭'다매체 예술가 윤진섭' 내가 선생을 통칭하는 이름이다.윤진섭 선생님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은 2007년부터였다.이건용 선생님은 과거를 회상하시면서 윤진섭 선생님에 대한 말씀을 자주 하셨는데, 그래서 나는 윤진섭 선생님이 이건용 선생님과 동년배 정도로 알고 있었다.내가 아는 윤진섭 선생님은 평론가였다.그리고 전시기획자셨다.그런데 이건용 선생님의 입을 통해 듣던 그 이름은 사뭇 달랐다. ST그룹 핵심 멤버로 선생의 젊은 시절 기억 한 부분에 분명히 자리 잡은 윤진섭 선생님은 이건용 선생님의 훌
소장품 이야기 3 - 권기자 편2010년 문득 '후기파'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나는 2006년부터 독학으로 한국미술사 공부와 국제미술시장 연구에 여념이 없었다.그러면서 한국의 단색조와 전위예술에 대한 기대감에 온통 머리 속은 미래 구상에 들떠 있었기 때문에 사람을 만나면 한국의 독자적 모노크롬과, 아방가로드 예술이 국제무대에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음을 입에 거품을 물어가며 이야기했고, 지방의 변두리에서 미술이 뭔지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을 두고 이해를 시켜보려 옥신각신 했었으니 참 기가 찰 노릇이었다. 내가 그렇게
나는 단색화에 대해서 남보다 조금 일찍 빠져 들었던것 같다. 그 이유가 아마 내가 문인화를 좋아한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을까 싶다.내가 단색화에 매달린 것은 2006년경으로 생각되는데 이때만 해도 전문 컬렉터가 아니면 단색화를 도외시 할 때였다. 나는 원래 동양화 수집을 주로 했으나 서양화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2003년 즈음으로 기억된다. 이때만 해도 수집이라기보다는 누가 권하면 마지못해 한점씩 사는 정도였다. 그럼에도 어디를 가면 그림 이야기하기를 좋아했고 한번은 공사 현장에서 잡담을 나누다가 김 사장이 여기에 갤러리를
강찬모 선생님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독일에서였다.첫 느낌에서 한국작가 일 것이라는 예견은 역시 빗나가지 않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일본스럽다는 생각도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작가는 중앙대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교에서 채색화를 전공하였고, 츠쿠바 대학교 대학원에서 학예연구 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내가 처음에 느꼈던 감정이 틀리지 않았음과 강찬모 화백의 작품이 그동안 한국에서 보지 못한 독자적인 특별함을 지녔음을 더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이후 국내외 아트페어와 갤러리의 기획전 등에 몇 번의 초대로 선생님 작품
김수열 ‘소장품 이야기’를 시작하며얼마 전 김한정 회장님의 연락을 받고 깜짝 놀랐다. 내가 페이스북에 올리고 있는 소장품 이야기를 그대로 기사로 올려 달라는 말씀이셨다. 워낙 두서없는 글이고 또 보잘것없는 소장품 자랑을 깊은 관심으로 지켜봐 주셨으니 감사함을 이루 말할 수 없지만, 미술인들에게 인지도 높은 아트코리아방송에 내 글이 기사로 다루는데 따른 부담감은 너무나 크고 또 두려웠다. 나의 관종심리로 시작된 글이 독자들에게 폐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 차일피일 미루다, 몇 번의 권유를 받고 오늘 이렇듯 첫 글을 쓰게 되었다.